[듣기의 윤리] ➂ ‘떠도는 말’을 따라 – 응답하기

불투명한 주체의 말에 적극적으로 경청하기 – 타자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불공정한 사회에 도덕적 책임을 지고, 우정과 연대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이 글은 김애령 선생님의 저서 『듣기의 윤리』 3부를 읽고 썼다. 이 작업은 이전에 기고했던 「실패로부터 시작하는 자기 창안」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떠도는 말을 따라 응답하기

「실패로부터 시작하는 자기 창안」에서, 불투명한 주체가 어떻게 유일무이한 자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루었다면, 「‘떠도는 말’을 따라 – 응답하기」에서는 불투명한 주체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정의와 책임을 통한 우정과 연대의 가능성을 말한다.

저자는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윤리가 우리에게 항상 자기 동일성을 표명하고 유지할 것을 요구하고, 타자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자기 동일성, 완벽한 일관성에 대한 요구는, 불가능한 것이다. 주체화의 과정은 타자성의 계기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그리고 또한 주체는 시간 지평 안에서 늘 변화하고 유동한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면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 자기 동일성을 표명하고 유지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윤리적 폭력이다.1

저자는 듣기의 윤리란 환대라고 주장했다(「그림자를 드리운 말」 참고). 환대는 내가 타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나에게 들어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환대의 듣기는 판단과 평가를 하지 않으며 듣기이다. 하지만 듣기의 윤리는 판단과 평가를 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한가?

청자는 화자가 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창안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경청해야 한다. “진정성을 담은 말하기와 윤리적 경청의 전제는 투명한 자기의식을 지닌 주체들의 동등한 상호 인정이 아니라, 주체화에 개입하는 타자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버틀러에게서, 주체의 불투명성에서 출발하여 타자의 취약성에 응답하는 윤리적 실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2” 언어 규범, 신체, 관계 맺는 타인들이 타자성에 포함된다. 나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혹은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이 나를 구성하고 변화시킨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자아의 총체성을 투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가, 타자에 대해 그와 같은 동일성이나 불변성을 요구할 수 없다.3 따라서 주체의 불투명성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버틀러는 한 번의 답변에 만족하지 않기를, 더 나아가 ‘계속 모르기’를 수행하길 요구한다.

판단과 평가를 유보한 채 질문을 이어가는 윤리적 듣기는 한편 정치적 실천이기도 하다. 아이리스 영에 따르면 “책임은 타인의 물음,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다.4” 타인의 물음과 요청에 응답하기는 소수자를 소수자로 만드는, 부정의와 불공정이 만연한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에게 요청하는 도덕적 책임이자 정의이다.

그 출발점이 최소한의 합리성이고 구조적인 실천의 모색인 이유는, 우리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묻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Kelsey Chance

타자에 대한 응답하기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우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인용해 우정이 나와 나 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한다. “나는 언제나 또다른 나와의 대화에 너무나도 열성적이다. 만약 한 사람의 벗도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견뎌 낼 것인가? 은자에게 벗은 언제나 제3의 인물이다. 이 제3의 인물은 마치 코르크와 같아서 나 자신과 나누는 나의 대화가 너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막아 준다.5

우정은 차이를 받아들인다. 다른 의견, 지향, 취향이더라도 우정이 있다면 벗이 될 수 있다. 더 쉽게 연대하고 환대할 수 있다. 리쾨르가 구분한 대로, 우정은 사적인 관계에서 형성되는 무엇이기 때문에,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모든 대화가 공적인 영역에서 드러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의 개념은 요청, 약속, 헌신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타자에 대한 책임과 응답을 이끌어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맺는 말을 통해 타자와 연대하는 방법을 계속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절대적 환대나 정의와 같은 듣기의 윤리가 제시하는 이념들은 어려운 것이다. 그것들은 불가능한 경험으로 제시된다. 인정투쟁, 경쟁, 불공정, 부정의한 관행들, 불평등한 구조, 그리고 그로 인한 억눌린 분노, 그것이 격발한, 넘쳐나는 타자에 대한 폭력, 혐오, 모욕. 이같은 현실에서 절대적 환대, 정의, 연대와 책임같은 아름다운 이념들은 너무 멀고, 너무 무력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정의, 책임, 연대는 더 이상은 우리의 세계가 이렇게 지속될 수는 없다는 최소한의 합리성에 근거한, 그래서 공동의 해결을 모색하는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이자 실천이다. 그 출발점이 최소한의 합리성이고 구조적인 실천의 모색인 이유는, 우리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묻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이들을 벗으로 삼고 환대하기는 어렵기도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로 듣기의 윤리를 사회적 정의로 확장시킨 점이 놀랍다. 저자가 소수자와 타자를 생각하는 경로에 배치한 철학자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 즐거웠다. 이 책 자체가 연대의 결과물이다.


  1. 김애령 저, 『듣기의 윤리』(봄날의 박씨, 2020), p.228.

  2. 위의 책, p.211.

  3. 위의 책, p.229.

  4. 위의 책, p.256.

  5. 위의 책, p.225.(프리드리히 니체, 「벗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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