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성숙한 문명의 징표인가 – 생태 위기 속에서 아이스퀼로스의 「코에포로이(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읽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작가 아이스퀼로스의 희곡인 「코에포로이(제주를 바치는 여인들)」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가장 먼저 도달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만약 인간 탐구가 자연 탐구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탐구라고 본다면, 이 작품에는 이 작품을 낳은 문명의 그만큼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내용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성숙함의 징표를 찾아보고, 그러한 성숙함을 생태 위기 속에서 새삼스럽게 살펴본다.

복잡한 내면을 가진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작가 아이스퀼로스의 희곡인 「코에포로이(제주를 바치는 여인들)」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아들과 딸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아버지이자 왕인 아가멤논을 죽인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의 어머니이자 아가멤논의 왕비이고,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의 사촌 동생이자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내연남으로 그려진다.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이는 아들 딸. 이것만으로도 이 희곡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며, 희곡 속 등장인물들의 발언은 모두 읽는 이를 일상을 넘어선 생각으로 이끈다.

이 희곡에는 이 희곡의 제목이기도 한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이 희곡 속 코로스는 이 여인들의 말이다. “…… 나는 우리 도시에 멍에를 씌우신 / 신들의 뜻에 따라 / 고향도 친척도 멀리하고 / 노예의 운명이 된 신세” [75~78]]1라고 하는 말을 보면 이 여인들은 트로이에서 끌려와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트로이를 멸망시키고 개선하였으나 자기 아내와 사촌동생에게 죽은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에게 제주를 바치는 일에, 동원된다. 이를테면 트로이의 원수에게 술을 바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희곡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다.

“코로스 :

궁전의 분부 따라

손으로 가슴을 세차게 치며

고인을 위하여 제주를 가져온 이 몸

두 뺨은 온통 손톱에 찢겨

새빨간 피 이랑이 생겼구나.

오랜 세월 비탄의 노래로 살아온

가련한 내 신세여,

슬픔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이 옷은

운명의 타격에 넝마처럼 해어진 채

가슴 앞에서 너덜거리고 있구나.” [22~31]

아이스퀼로스 저 「코에포로이(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이 실려 있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문예출판사, 2001) 표지.

이들은, 노예가 된 자신들의 처지를 비통해 하지만, 자신들이 아가멤논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앞에 인용한 바와 같이 “우리 도시에 멍에를 씌우신 / 신들의 뜻에 따라” 노예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트로이를 멸망시킨 아가멤논을 원수로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이들은 “……정의의 여신의 저울은 언제나 지켜보고 있으니 / 어떤 이는 일찌감치 대낮에 방문을 받고 / 어떤 이는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 해질 무렵에야 고통을 받고 / 어떤 이는 무력한 어둠 속에 싸여버림이라” [61~65] 라고 하였는데, 천병희는 이를 “어떤 이는 젊었을 때 벌을 받고, 어떤 이는 노년에 가서 벌을 받고, 어떤 이는 당대에는 벌을 면하더라도 그 후손들이 결국 벌을 받게 된다”2 라는 말로 해석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아가멤논이 트로이를 멸망시켰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트로이가 멸망되고 자기들이 미케네의 노예가 된 것을 신의 뜻으로 보았기 때문인지, 이들은 아가멤논을 살해한 자들이 천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마음의 동요 없이,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트로이가 아가멤논에게 입은 피해를 아가멤논 살해자들이 자기들 대신 되갚아 준다는 식의 셈은 그들의 의중에 없어 보인다.

“코로스 :

……

종가

하나 나는 우리 도시에 멍에를 씌우신

신들의 뜻에 따라

고향도 친척도 멀리하고

노예의 운명이 된 신세.

주인의 처사가 옳든 그르든 꾹 참고

쓰라린 마음의 증오를 억제해야 하니

남 모르는 고통에 추위를 느끼며

이렇게 옷자락에 얼굴을 파묻고

주인의 허무한 운명을 눈물로 슬퍼하고 있노라.” [78~83]

희곡 앞 부분에 나오는 코로스 등장가가 끝날 때, 코로스 즉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은 위와 같이 노래하였다. 이 노래에 따르면, 이들은 트로이의 멸망을 신의 뜻으로 보면서도, 억제해야 할 만큼의 증오 또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다. 남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모를 것이라 하면서 비참함[추위]3 을 느끼고 있음을 확실히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결국 천벌을 받게 될 주인 즉 아가멤논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클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의 허무한 운명을 슬퍼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반어적 표현이라기보다는 하늘의 뜻과 더불어 세속의 권력도 그것 나름대로 존중한다는 생각을 드러내는 말인 듯 하다. 그러면서도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에 대해서는 “아아, 제발 그들이 송진이 부글부글 끓는 / 화염 속에서 타 죽는 꼴을 보았으면 좋으련만!” [258~259]이라 할 만큼의 적의를 분명히 한다. 이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의 내면에서는 함께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각기 다른 방향성을 가진 생각들이 서로 엉킨 채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내면의 애매모호함은 이들이 아가멤논의 무덤을 두고 “선악을 초월한 이 무덤” [153]이라고 한 것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이런 식의 말은 자기들의 판단의 대상이 아닌 영역이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말 같다. 이런 말을 보고나니, 신성불가침은 아닐지라도 불가침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바탕으로 이런 말이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 도덕법칙이 관철되지 않는 것을 싫어해서, 그 법칙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천벌’이 행하여지는 데 심정적으로라도 동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들은, 애매모호하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무척 복잡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코로스장 :

잘들어봐요?

어떻게 된 걸까? 집안에서 일이 끝난 것일까?

일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멀리 떨어져서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끔찍한 일에 가담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테니까. 싸움은 이미 끝났으니 말이오.” [870~874]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은 엘렉트라로 하여금 “적에게 죗값으로 재앙을 내려달라는 기도” [123]를 드리도록 부추긴다. 그리고는 일관성있게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의 ‘복수’ 겸 ‘천벌대행’을 응원한다. 그러다가, 막판에 이르러 막상 오레스테스가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자, 그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는, 위의 인용문에 보이는 것처럼, 오레스테스와 거리두기를 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이 또한 이들의 내면이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비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레스테스의 ‘복수’ 겸 ‘천벌대행’이 정당하면서도 가족에 적용해 마땅한 인륜에 어긋나기에 비난과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음 또한 전제하였기에 이처럼 행동하였을 것이다.

정당한 복수를 한다면서도 이미 심판을 받아들인 오레스테스

한편 오레스테스는 ‘복수’ 겸 ‘천벌대행’의 두 대상 가운데 한 사람인 어머니를 앞에 두고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클뤼타이메스트라 :

내 아들아, 이 모든 일이 운명의 탓도 없지는 않을 게다.

오레스테스 :

그렇다면 그대의 죽음도 운명의 탓이겟지요.” [910~911]

“클뤼타이메스트라 :

너는 어머니의 복수심에 불타는 개들을 조심하도록 해라.

오레스테스 :

하나 그대를 살려주면 아버님의 개들은 어떻게 피하죠?” [924~925]

운명도 부정할 수는 없다는 논리를 펴려는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 앞에서, 어머니가 죽을 운명임을 받아들이라고 냉정하게 말하였고, 왕을 죽인 왕비의 죽음에 대한 복수보다 왕비에게 죽임을 당한 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더 중한 일이라고 잘라 말함으로써, 왕비이자 어머니인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자기 정당화를 단호히 배격하였다. 그렇지만 오레스테스는 자기의 ‘복수’ 겸 ‘천벌대행’이 완벽히 면책되는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언젠가 있을 재판에 대비하기도 한다.

“오레스테스 :

……

(하인들을 향하여)

가까이 빙 둘러서서 남자를 위한 이 큰 수의(壽衣)를

펼쳐 보여드려라. 아버지께서 보실 수 있도록.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만물을 굽어보시는 위대한 아버지

태양께서 말이다. 그래야만 그 분께서 어머니의 저주받을 소행을

보시고 언젠가 재판을 받게 되는 날 내가 어머니를 죽인 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나를 위해 증언해주실 게 아니냐.” [991~996]

세속의 아버지의 복수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서슴없이 실행하였으나, ‘만물을 굽어보시는 위대한 아버지’의 심판을 피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오레스테스가 “…… 나는 나의 행동과 고통과 온 가문을 슬퍼하노라. / 내가 얻은 것은 피에 얼룩진 자랑스럽지 못한 승리뿐임이라.” [1016~1017] 라고 한 데에도 암시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오레스테스만 한 것은 아니었다. 복수를 응원한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 또한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희곡은 묘사하고 있다.

“코로스 :

아아 슬프도다. 이 무슨 끔찍한 짓이란 말인가!

그녀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여 가고 없으나

아아, 뒤에 남은 자에게도 고통의 꽃은 만발하리라.” [1007~1009]

“코로스 ;

……

내 이제 그를 구원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아니면 파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이 살인의 광기는 기운이 다하여 잠들기 전에

또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코로스 오케스트라를 떠난다.)” [1073~1076]

복수를 응원하였지만,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은, 더 높은 급의 심판이 오레스테스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무엇이 성숙한 문명의 징표인가

앞서 쓴 바와 같이, 이 희곡은 이 희곡을 읽거나 이 희곡을 대본으로 상연된 연극을 보는 이들을 일상을 넘어선 생각으로 이끄는 힘을 가졌다. 이 힘이 이 희곡을 수천 년 동안 거듭 읽히는 고전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상 속의 사람들은 대개 나름의 ‘상식’에 의거하여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상식에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포함되는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들은 무릇 사람이란 일정한 모습을 적당히 유지하고 있어야하는 존재라고 가정하고 나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변했네”, “이상해졌어” 등등의 평가의 빈도가 높아지면, 그런 사람과의 관계는 시나브로 어그러지고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사회는 사람들이 정체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면서 맺는 관계의 망이라 할 수 있다.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는 이질적 요소들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엉켜있기 마련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출처 : Mathias Reding

아이스퀼로스가 「코에포로이(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속에 그려 넣은 사람들은 위에서 제기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존재들이 아닐 수 있다.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 각각의 내면에서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엉켜있는 듯하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이 세속의 인륜보다 급이 높은 심판대에 설 것을 이미 충분히 알았으면서도 인륜에 입각한 복수를 실행에 옮긴 것 같다.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은 열렬히 복수를 응원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자 마치 한 발 빼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게 그려졌다. 그렇지만, 생각을 더 해보다보면,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는 이질적 요소들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엉켜있기 마련임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들은 스스로 오류 가능성을 인정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 내부에는 그들의 생각을 스스로 검증할 가능성과 수정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설사 거기에까지 이르진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내면에서 이질적 요소들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엉켜있음을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경우라고 해야 할 듯하지만, 오레스테스 또한 세속의 인륜과 그보다 급이 높은 심판대라는 두 기준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절대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면이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과 비슷하다.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법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이나 오레스테스 같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아 배제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에서는 변화가 허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미 검증된 경로에 의존하여 살아갈 것이다. 그런 사회에 적응하다보면, 사람들은 내적 모순을 이해하기 어렵게 될 것이며, 변화에 적응하기도 어려워할 것이며, 어떤 변화가 필요할 때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무척 어려워할 것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그저 살아오던 대로 살아가려 할 것이다.

그저 살아오던 대로 살아가는 삶은, 생태 위기를 맞이하면서 지극히 위험한 삶의 방식이 되었다. 생태 위기는 경로의존적 생활방식이 사람들에게 강요되다시피한 결과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이 원하는 한쪽 방향으로의 변화 만 극단적으로 허용되고 장려된 결과가 지금의 생태계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생태 위기를 느끼지 못하거나 느끼기를 거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이스퀼로스의 「코에포로이(제주를 바치는 여인들)」를 문학 분야 대입 참고서의 해설에 나오는 것처럼 이해할 것이며 그러한 이해의 결과는 이 희곡을 마치 막장 아침 드라마 보듯 이해하는 상태일 것이다. 반면에 생태 위기를 절감하는 사람이라면 「코에포로이(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속의 트로이 출신 여자 노예들이나 오레스테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게 될 듯하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또한, 자본이 원하는 한쪽 방향으로의 변화만 극단적으로 허용되고 장려된 결과로 누릴 수 있었던 편의성을 다 찾아 누렸으면서도 그것이 생태 위기를 초래하였다는 것 또한 절감하는, 지극히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숙한 문명의 징표는 그 안에 있는 자기를 돌아보고 바꿔나갈 수 있는 능력과 분위기일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 그 문명이 정체되고 퇴행하는 것을 늦추거나 막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징표는 생태 위기에 처하여 그 위기를 넘어보려는 사람들이 갖춰야할 능력과 분위기이기도 할 것이다.


  1. 아이스퀼로스, 「코에포로이」, 소포클레스·아이스퀼로스, 천병희 (옮김), 『오이디푸스왕』, 대한민국 서울 :문예출판사, 2001, 114쪽. ‘[]’ 속의 숫자는 텍스트의 행수이다. 이 이후 인용문의 출처 밝히기는 이 행수로 대신한다.

  2. 위와 같은 책, 113쪽, 각주 9.

  3. 천병희는 ‘추위’라는 말이 ‘비참’이라는 말 대신 비유적으로 사용된 듯하다고 하였다. 위와 같은 책, 114쪽, 각주 11 참조.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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