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준비하는 법 :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an, 2006)』

2027년,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인류는 파국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암울한 미래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임산부 소녀 ‘키’가 나타나고 사회운동가였다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 테오가 우연찮게 그녀와 아이를 지켜내기 위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인류의 아이들, 암울한 미래와 맞닥뜨리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을 본 것은 2018년 초였다. 난데없이 몸이 안 좋아 며칠째 누워있던 차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해서 철지난 SF영화들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프로메테우스』나 『에이리언 커버넌트』, 『블레이드러너 2049』, 『디스트릭트 9』 등 영화들을 보았는데, 이틀 연속 암울한 배경의 SF영화 너댓 편을 보고 밤에 에이리언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류의 영화 시청이 병세를 악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타고난 공돌이적 기질에 적당한 비관주의가 믹스되어 있는 내 잠재의식은 어느새 포털에서 ‘SF 영화 명작’같은 키워드를 검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21세기 최고의 SF 명작 『칠드런 오브 맨』!’ 뭐 이런 이야기를 써 놓은 블로그인지 유튜브인지를 보게 되었다. 아니,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영화인데 21세기 최고의 SF라니…. 잠시 동안 충격과 함께 ‘그동안 내가 너무 문화적으로 무지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자책감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영화 정보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감독이 알폰소 쿠아론이 아닌가. 알폰소 쿠아론은 멕시코 출신으로, 역시 명작으로 꼽히는 SF 영화 『그래비티』의 감독이다.(물론 그 외에도 여러 좋은 영화들을 감독했다.) 『그래비티』 또한 아련히 추억에 남아있는 영화인데, 예전에 학교에서 일 할 때 『그래비티』를 꼭 보라는 제자들의 말에 “그걸 왜 보냐? 두 시간 동안 우주에서 버둥거리는 영화 아니냐?”라고 무심결에 얘기했다가, 분노한 제자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할 뻔한 기억이 있어서이다. 나중에 영화를 보고 나서는 함부로 입을 놀렸던 나의 무식함을 깊이 반성하게 했던 좋은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 의 국내 개봉 포스터.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 의 국내 개봉 포스터.

아무튼 『칠드런 오브 맨』의 이야기는 이렇다. 2027년,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인류는 파국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적 무정부상태가 계속되고 있고, 그나마 영국이 정부와 치안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곳도 테러가 일상화된 위험사회다. 난민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 강제 수용이 자행되고, 복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정부는 노인들에게 자살약을 배급하고 복용을 권고한다. 이 암울한 미래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임산부 소녀 ‘키’가 나타나고, 사회운동가였다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 테오가 우연찮게 그녀와 아이를 지켜내기 위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이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많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날 수 없는 시대에 마지막 임산부를 지켜낸다는 설정, 그리고 소녀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SF 영화라고 해 놓고, 로봇도 인공지능도, 심지어 자율주행차 정도도 안 나오는 영화에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소셜 픽션의 SF인가?’라고 잠시 의구심을 가졌던 기억도 난다.

그러던 중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십년후연구소 조윤석 소장의 최근 강의에서 다시 이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조윤석 소장은 기후변화 문제는 단순히 물리적인 이상기후나 자연재해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후변화의 피해는 전 세계 인류에게 평등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물리적・사회적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경제 수준이 낮은 국가들일수록 기후변화의 피해를 심각하게 입게 된다. 이는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의 내전과 대규모 난민 발생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난민이 밀려드는 유럽에서는 극우정치가 부활하기도 한다. 조윤석 소장은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추천하면서, 기후변화가 초래할 미래 사회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암울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덧붙였다. 조 소장처럼 기후변화에 대한 정보를 접하다 보면 미래에 대한 걱정이 밀려들고, ‘이걸 어찌 대비해야 하나? 애를 괜히 낳았나?’(참고로, 필자는 두 아이의 아빠다.)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기도 한다.

『칠드런 오브 맨』이 그린 미래는, 이미 도래해 있다

최근 세미나에서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를 함께 읽었다. 유발 하라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생명공학 및 인공지능과 결합한 초인류(호모데우스)가 탄생할 것이라 예견한다. 대다수의 호모사피엔스들은 불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며, 발전된 인공지능들의 뒤치다꺼리를 담당하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세미나 참가자들은 함께 다가올 미래에 대해 걱정했다. 미래에 발전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이야기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같은 영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지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 대부분을 대체하고 인간이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을 생각하면 미래가 그다지 밝게 느껴지지는 않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기계의 지배를 받고 기계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것이 과연 미래의 일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기적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이후, 요즘 나는 한 달에 몇 차례씩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집회에서 영상을 송출하는 것과 관련된 잡다한 일들을 하는 아르바이트인데, 지난 겨울 한 집회에서 오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 친구와 교대조로 일하던 한 직원이 컨베이어 아래 쌓인 석탄을 청소하다 컨베이어에 옷이 끼어들어가는 사고를 당해 사망하게 되었다. 그가 24세의 청년 노동자 고(故) 김용균이었다. 2인1조로 해야 할 일을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혼자 하고 있었고, 기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컨베이어 주변 안전펜스마저 철거한 상태였다. 그날 오랜만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는 “나는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않는 기계였는데, 용균이는 애가 착해서 시키는 대로 하다가…”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고(故) 김용균
고(故) 김용균

고(故) 김용균을 추모하는 집회들을 가까이에서 촬영하고 그때마다 오열하는 그의 부모를 보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유발 하라리가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나는 그것이 미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19세 청년 노동자가 스크린 도어에 끼어 숨졌던 2016년 구의역 사고, 그리고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사고를 보며, ‘이미 우리는 기계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비용의 효율화와 기계를 잘 돌리기 위해 안전을 도외시하는 현실 속에 비참한 노동을 하고 있는 이들은 이미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 실업이 만연할 것이라고 하는 예측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카카오의 카풀 서비스 시행이 택시기사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며 세 명의 택시기사가 분신을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우리는 미래는 걱정하면서 현재를 그것과 연결 짓지는 못하는 것 같다. 김용균 님의 사망사고가 난 지 3개월여가 되었지만 발전소 현장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택시기사 분신 기사 아래는 “집단이기주의”라거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다”는 댓글이 달린다.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다시 설정해야 할까?’, ‘기술의 발전에 따라 발생하는 실업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던가, ‘정부 차원의 지원이나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본 적이 없다.

유발 하라리가 예측한 미래는, 지금 이미 도래해 있다. 단지 전면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정도의 차이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기계를 돌보는 노동자들을, 기술 발전의 결과로 일자리를 빼앗기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의 미래 예측은 점점 정교해지지만,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고 사고하는 듯하다.

이것은 기후변화 이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파티를 시작하자.” 2019년 3월 15일 한 젊은 백인 남성이 차량 트렁크에서 소총을 꺼낸 뒤 이슬람 사원으로 들어가 총기를 난사했다. 뉴질랜드에서 벌어진 이 범행 장면은 페이스북을 통해 17분 동안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범행을 저지른 28세 브랜턴 태런트는 자신을 ‘평범한 호주의 백인 남성’이라고 소개하면서 “침략자(난민, 이민자)들로부터 백인들의 땅을 지키고 싶었다.”고 밝혔다. 난민에 대한 테러와 공격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한국도 제주도에 피난 온 200명의 예멘 난민에 대해 비슷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난민 기사에 난무하는 괴담과 저주의 댓글들을 보면, 총만 있었다면 누군가 그들을 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칠드런 오브 맨』이 그린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우리 삶은 바뀔 수 있다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뉴질랜드 정부의 태도다. “우리가 공격 대상이 된 것은 포용성과 자애, 동정심을 대표하는 나라이며, 이런 가치를 필요로 하는 난민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분명히 말하지만 이번 공격으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총격사건 이후 뉴질랜드 총리는 이야기했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이 아닐까? 심각해진 기후변화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파국을 막는 것은 ‘지금 난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지금 기후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열악한 국가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미래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미 도래한 미래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가 결국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 의 스틸컷.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 의 스틸컷.

『칠드런 오브 맨』은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히는 후반부의 7분이 넘는 롱테이크 씬과 그 마지막에 아기의 울음소리에 전투를 멈추는 경이로운 장면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쉽게 볼 수 있는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평범한 흑인 소녀와 아이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메시지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소수자들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나름 안락한 삶을 살아가다가 인류의 마지막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주인공 테오의 모습은, 우리의 삶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래에 대한 진정한 대비는 “야. 인공지능이 발전해서 사람은 할 일이 없어질 거래. 미래엔 돈 있는 인간이 생명공학으로 불멸의 인간이 돼서 우리를 지배할 거래. 기후변화로 사람들이 굶게 될 거래. 그러니까 창의성을 키워야지. 아니 어차피 망할 거 되는 대로 살자.” 이렇게 호들갑을 떨거나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곁의 실업, 소외된 노동, 난민과 기후 부적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이런 ‘소수자 되기’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평범한 이들이 한 소녀의 생명을 구하려고,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고 노력했듯이 말이다.

심순

타고난 과격한 성격을 고치고 착하게 살아보고자 심순(心淳)이라는 별명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수시로 버럭과 반성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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