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기의 순간 : 드라마 『눈이 부시게』

되기의 순간은 곁을 내어 주고 사랑하는 순간이다.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이 시대, 우리는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나비가 된 장자와 장자가 된 나비, 젊은 나를 꿈 꾼 늙은 나와 늙은 나를 꿈 꾼 젊은 나. 되기의 순간은 서로 분명 다르지만,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이 많아질수록 기적 같은 일이 늘어날 것이다.

장자의 호접몽

햇살 따사로운 봄. 꽃이 하나 둘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살랑 불어 접었던 날개를 살포시 펼친다. 몸이 바람결을 따라 흔들린다. 날개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좁고 어둡고 축축한 고치에서 나와 처음 바람을 느꼈을 때 세상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날개가 점점 따스해졌다. 웅크렸던 몸을 펼쳐 살며시 날개를 흔들어 본다. 움직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다. 이 작은 날개짓으로 평생 가닿지 못할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푸른 물길이 나뭇가지에 돋아난 새순까지 뻗어 올랐다. 나무는 샛노란 햇살을 받자 초록빛이 짙어진다. 그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산철쭉. 나비는 이리저리 흩날리며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닌다. 순간 바람이 불어 눈을 떴다. 장자는 생각했다.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가? 알 수 없구나. 장주와 나비는 분명 다르거늘. 이런 것을 두고 ‘무엇인가 되고 있다(物化)’고 말하는 것이구나.’1

혜자의 눈부신 순간들

누구나 눈부신 순간이 있다. 25세의 혜자는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함께 웃고 왁자지껄 떠들고 힘들 때 위로해 주는 친구들이 있다. 삼겹살이 먹고 싶어 환기 안 되는 방에서 혼자 연기 풀풀 날리며 고기를 구워 먹다 순간 기절하는 찌질한 오빠가 있지만, 서로를 응원하고 위하는 가족이 있다. 그리고 위태로워 보이고, 가엾어 보이던 남자는 어느 날 혜자의 마음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사랑이 되었다. 울고 웃고 떠들고 달리는 혜자. 노래방에서 몇 시간이고 춤추며 노래 부르며 고함질러도 끄떡없던 그녀. 그런 혜자가 어느 순간 할머니가 되었다.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하루아침에 할머니가 된 혜자는 힘차게 팔을 내저으며 걷지 못한다. 천천히 느릿느릿, 쉬어가며 걸어간다. 취직을 못 해도,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어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친구들과 쇼핑을 가서 조금만 걸어 다녀도 힘겹고 졸리고 하품이 난다. 사랑하는 사람도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도 새로운 친구가 있고, 돌봐줘야 하는 더 나이든 노인이 있고,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 그렇게 혜자는 살아간다. 젊음의 속도가 아니라 늙음의 속도로, 천천히, 느릿느릿, 그리고 조금은 흐릿하게.

흐릿하던 기억이 떠오르며 혜자는 병실에 누워 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는 이리 저리 흔들리며 뒤섞인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흐른다.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2

되기의 순간

되기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누구나 무언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다 무언가가 될 수는 없다. 되기의 순간은 곁을 내어주고 사랑하는 순간이다. 거대한 물길을 가르며 넓은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 곤은 하늘로 날아올라 붕이 되었다. 붕이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면 하늘이 덮이고 산이 날개죽지 아래 놓인다. 붕이 된 곤은 언제나 물길이 바람길이 되는 순간을 상상했다.

나비가 된 장자는 고치 속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움직이지 못하던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순간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이 순간만은 커다란 붕이 아니라 가냘프고 작은 나비가 되고자 했다. 장자가 된 나비는 천하를 호령하는 제왕이 아니라, ‘노니는 마음’3을 가진 철학자를 꿈꾸었다.

그리고 한순간에 늙어버린 25세의 혜자. 그녀는 젊음과 늙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들은 분명 다르지만, 또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노인은 젊은 혜자의 시선과 마음을 가지고 있고, 젊은 그녀는 늙은 혜자가 왜 쉬엄쉬엄 움직이는지 알게 되었다.

누구나 다 아이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모두가 어릴 적 아이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른이 아이가 되고, 여자가 되고, 늙은이가 되는 순간, 아이들을 밀어내고, 여자를 위협하고, 늙은이를 무시하는 순간이 사라질 수 있다. 되기의 순간은 서로 분명 다르지만,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이 많아질수록 세상에는 기적 같은 일이 늘어날 것이다.

  1. 장자, 『장자』, 조현숙 옮김. 책세상, 2016, 68쪽

  2. 김석윤 연출, 이남규, 김수진 극본, 『눈이 부시게』, JTBC 드라마, 2019, 10회

  3. 장자, 『장자』, 조현숙 옮김. 책세상, 2016, 42쪽

나무

숲을 이루고 싶은 나무입니다.
다양한 숲이 많이 생겨, 지구와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이 평안하길 기도합니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