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합니다] ⑥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이라는 지향(3)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사적소유와 임금제도 없이 풍족한 물질의 생산과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가능성으로 잠시 주목받았던 이유이다. 하지만 야마기시즘은 21세기 들어 양적인 팽창과 이즘의 갱신을 더 이상 진척시키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질문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와 종교에 대한 야마기시즘의 관점을 또 다른 질문으로 남긴다.

야마기시즘이 주목 받았던 이유

아래 문단은 지난 글([미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합니다] ④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이라는 지향(1))에서 발췌한 것이다.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의 일상이 임금과 사유재산 없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단순화해서 설명한 내용이다. 복기해보도록 하자.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풍부한 물자와, 건강과, 친애(親愛)의 정으로 가득 찬,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인류에 가져오도록 하는 것‘을 취지로 하고 있다. by Maria Orlova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4947031/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풍부한 물자와, 건강과, 친애(親愛)의 정으로 가득 찬,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인류에 가져오도록 하는 것‘을 취지로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Maria Orlova

“여기 야마기시즘 실현지에 살고 있는 A가 있다. A는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의 생활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의 인물이다. A는 야마기시즘의 이념에 동조하여 실현지 생활을 하고자 자기의지로 참획을 결정했다.(야마기시즘은 실현지에 들어와서 살고자 하는 행위를 참획(參劃)이라 지칭한다. 계획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A는 자신의 전재산을 야마기시즘 실현지에 내어놓는다. 재산의 크기 등 관련된 일체는 참획자인 A의 지위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A는 1인 가구로서 전용공간인 방을 하나 사용한다. 방에는 TV와 침구류, 책상 등의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물품들이 존재한다. A는 양계부에 배치된다. 양계부는 A의 직장이다. 그는 일과시간을 양계부에서 보낸다. 식사 때가 되면 실현지의 공동식당인 애화관(愛和館)을 찾는다. 애화관에서 밥을 먹으며 돈을 계산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식사준비는 식생활부가 담당하는데 식생활부 역시 실현지의 직장이다. 일과를 끝낸 A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빨래거리를 빨래함에 분리해서 넣는다. 실현지 구성원들의 빨래를 담당하는 직장은 의생활부다. 그리고 의생활실에는 개인별 옷가지가 정돈되어 있어 샤워 전후, 외출 전후, 사람들은 이 장소를 활용해 옷을 갈아입는다. 저녁을 먹은 A는 마을 로비를 찾는다. 로비에는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고, 신문이나 잡지 등이 비치되어 있다. 역시 비용을 따로 지급하는 일 없이 누구든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이라는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사회원리가 실제로 구현된 일상을 표현해보고자 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구현된 이러한 일상은 사회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90년대가 그런 시기였다. 그리고 야마기시즘 실현지의 지향과 실천의 양상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이른바 ‘흑자경영’을 하고 있는 공동체적 실험이었다는 점이다.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실현지 공간을 생태공동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 (물론 몇 차례 강조했듯이, 야마기시즘은 내용적으로 공동체가 아니라 일체(一體)라는 지향을 강조하고, 세간의 생태주의에 관한 이해와는 다르게 기계와 과학기술의 적극적인 활용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야마기시즘을 ‘생태공동체’로 읽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일종의 오해)에 따르면 생태공동체인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흑자경영을 지속하고, 생활면에서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조건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다방면에서 주목 받는 조건으로 충분했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 국가 사회주의 실험의 몰락을 목도했던 이들에게도 사적소유와 임금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야마기시즘 실현지의 양적 팽창은 흥미로운 분석 대상이었다.

이른바 ‘고르게 가난한 상태’는 야마기시즘의 지향이 결코 아니었다. 야마기시회(會)는 회(會)의 취지를 ‘’풍부한 물자와, 건강과, 친애(親愛)의 정으로 가득 찬,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인류에 가져오도록 한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야마기시즘의 제안자인 야마기시 미요조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에서 “나는 높은 것을 탈취하거나, 부수어 끌어내려 고르게 하거나, 신장(伸長)하는 자를 억제하거나 하지 않고, 또 납득도 시키지 않고 폭력을 행사해서 희생자를 내거나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낮은 자를 끌어올리는 수단을 채택하여, 가지지 않은 사람이 가지도록 합니다. 이것이라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의뢰하지 않아도, 탈취하지 않아도, 승낙도, 희생도, 반대도, 저항도 없이 해결하고, 한사람 남김없이 모두 풍부하게 되겠지요. 가진 사람을 울리지 않고, 빈핍인(貧乏人)을 기쁘게 합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야마기시즘의 이러한 관점이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던 20세기적인 상상력의 결과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적절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마기시즘이 ‘풍부한 물자’와 ‘쾌적한 사회’라는 것을 강조하고, 평등한 상태를 이루려는 시도가 ‘낮은 자를 끌어올리는 수단을 채택한다’고 표명한 점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다. 야마기시즘은 ‘풍부한 물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물자가 어떻게 순환하게 할 것인지 적극적으로 고민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성장이 아니어도 풍요로울 수 있다’는 명제를 증명했다. 공용(共用), 공활(共活)이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채택된 사회운영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공유(공동으로 소유)가 아니라, 무소유이면서 공용, 공활이라는 것이 야마기시즘 사회 운영 원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전제가 된다.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주목받았던 두 번째 요소는 야마기시즘이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무소유라는 사회 원리가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사유가 소유 관념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유의 조직이 ‘종교적’이지 않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나는 ‘연찬’이라고 하는 사유 방식이자 소통 구조가 ‘무소유 일체사회’라는 지향을 실천으로 전개해감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연찬’에 관해서는 지난 글([미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합니다] ③ 야마기시즘 연찬과 의식 혁명) 참고) ‘종교적’인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절대자’가 존재하거나, 이성을 불신하거나, 내세주의가 있다거나 하는 종교적 특성이 야마기시즘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야마기시즘이 종교 사상으로,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종교적인 실험으로 의심 받는 것은 야마기시즘이 제안하는 삶의 방식, 즉 이즘 생활(연찬 생활)이 ‘수행’의 과정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이 발생하는 양상에 대해서는 질문으로 남겨두도록 한다.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 원리의 확대 가능성

과연 야마기시즘의 구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대체 원리로서, 혹은 보완하는 기획으로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by Cary Bass-Deschenes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bastique/4761202659
과연 야마기시즘의 구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대체 원리로서, 혹은 보완하는 기획으로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사진 출처 : Cary Bass-Deschenes

2008학년도 서울대학교 수시입학을 위한 논술고사에 ‘야마기시즘’이 등장했다. 해당 논술고사 문제는 아담 스미스 『국부론』의 일부 구절(제시문 가)을 제시하였고, 또 다른 제시문(제시문 나)에는 4가지 사회의 경제 체제와 관련된 글을 실어 ‘제시문 가’에서 이야기하는 경제체제의 요소와 ‘제시문 나’에 등장하는 4가지 경제 체제의 특징을 연결하여 분석하고 ‘제시문 나’의 경제적 특성의 일부 또는 선택적 조합을 통해 ‘제시문 가’의 경제체제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지 질문했다. ‘제시문 나’의 4가지 사례는 각각 ‘사회주의 경제의 자원 분배 효율성 논쟁’, ‘미크로네시아 야프 섬의 돌바퀴 화폐 사례’, ‘서양 중세 봉건사회의 장원 경제’, ‘시장, 화폐,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야마기시즘 사례’였다. 비록 대입 논술 문제이긴 하지만 야마기시즘의 지향과 실천 경험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대체하거나 그 문제를 보완하는 경제적 원리로서 지목된 것이다.

과연 야마기시즘의 구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대체 원리로서, 혹은 보완하는 기획으로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야마기시즘의 실천적 전개와 실현지라는 구체적 실험이 어떤 한계에 부딪혔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종합적인 사회기획으로서 야마기시즘을 전개해 감에 있어 발생한 쟁점을 정확히 발굴해낼 필요가 있다. 현재 시점에서 야마기시즘은 이즘으로서의 확대 가능성을 거의 상실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확대되는 양상을 중지켰고, 이즘의 갱신을 중단시켰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야마기시즘의 경험을 보편적으로 확대하고,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가장 좋은 경로가 될 것이다.

가장 먼저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야마기시즘은 ‘국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야마기시즘은 다소 아나키즘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야마기시즘 사회는 법이나 제도, 관습 등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가 ‘원시적 무정부, 무규범 사회’가 아니라는 점 역시 강조한다. 야마기시즘 사회가 지향하는 제도란 “사람이 자유롭게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대도를 만들어…(중략)…타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각자의 자유의지와 능력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장치”에 가깝다. 따라서 야마기시즘이라는 구상에서 국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거나 없어져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기구이다. 하지만 야마기시즘이 실천으로 전개되어 가는 현실의 과정에서 국가란 항상 중요한 행위자였다. 특히, 긍정적인 협력관계에 있을 때보다는 국가 단위의 규범과 야마기시즘 사회의 규범이 충돌하는 장면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관계를 맺었다. 조류독감 국면에서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겪은 사례들이 대표적이며, 부동산 소유 문제, 구성원 교육 문제, 참획 과정에서 발생하는 재산 이전 문제 등 다양한 방면에서 국가의 규범은 야마기시즘 실현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야마기시즘이라는 기획을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일종의 Niche(틈새) 전략으로 볼 것인지, 혹은 전면적이고 완결적인 혁명 운동으로 볼 것인지 역시 중요한 쟁점이지만 내부적으로 정리되지는 않은 듯 보인다. 야마기시즘이라는 기획의 수행이 사회변화의 틈새 전략으로 위치한다면, 이러한 경험이 어떻게 다시 국가를 경유해 피드백되고 확장될 것인지도 중요한 물음이 된다. 그리고 야마기시즘에 대해 내용적으로는 종합적이지만, 이행전략 면에서는 틈새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중적인 접근이 가능하다면,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보편적 사회서비스(Universal Basic Services)와 같은 최신의 주장들과도 연결될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앞서 남겨둔 질문이기도 한데) 야마기시즘은 종교가 어떻게 아닐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종교적인 것’의 정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야마기시즘의 어떤 요소가 종교적인 것으로 지목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를 통해 사회 내에서 종교적인 요소의 기능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추측컨대, 의식혁명을 통해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부분이 이른바 ‘종교적’인 것으로 읽히는 것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의식의 변혁 없이 사회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반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야마기시즘에 관한 탐구와 야마기시즘 실천에 대한 추적을 통해 ‘종교적’인 것의 의미와 역할을 재구성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야마기시즘 실현지 문화과. 1999.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야마기시즘 농법: 돈이 필요없는 사이좋은 즐거운 마을 이야기』. 야마기시즘 실현지 출판부 역. 야마기시즘 실현지 출판부.

이태영

야마기시즘 실현지(산안마을), YMCA, 체화당과 풀뿌리학교, 녹색당에서 성장하고 배우고 일했습니다. 지금은 제주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소유자나 소비자가 아닌 정체성으로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이에 대해 질문하고 탐구하는 이가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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