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정성 시대와 행정의 전환

우발적인 상황은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피해야 하는지 아니면 때로는 무릅써야 하는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갈등을 끊임없이 품게 한다. 내일이 오늘만 같을 것 같고, 아니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것 같고, 그 다음날도 크게 다르지 않은 속도와 양상으로 펼쳐질 것 같은 기대를 점차 줄여가야 하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불확정성을 대하는 자세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기 전까지 어떤 사건이든 잘 실감하지 못한다. TV뉴스는 쉴 새 없이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건들을 생생하게 보여주지만 우리가 그것을 취하는 형태는 경험이라기보다 관람에 가깝다. 어떤 장면에서는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나에게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일 경우가 많다.

코로나 19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최초 발생 이후 매일 확진자 숫자와 발생지역, 사례들의 보도를 보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동시에, 조심하면 설마 내가 저렇게 될까 하는 한 발짝 거리를 둔 상태에서 접근한다. 우리는 그렇게 사건들과 일정거리를 유지하지만 그 거리가 좁혀지는 원인은 단지 우연에 근거할 뿐이다. 계획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우발성 속으로 어느 순간 내던져지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공공장소에 가야 하고, 식사를 위해 대중식당을 방문해야 하며, 이동을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수들은 대체로 자의나 자력이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 언제 어디서 불의의 ‘그것’을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안은 채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by cottonbro  www.pexels.com/ko-kr/photo/3951355/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공공장소에 가야 하고, 식사를 위해 대중식당을 방문해야 하며, 이동을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수들은 대체로 자의나 자력이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 언제 어디서 불의의 ‘그것’을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안은 채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사진 출처 : cottonbro

저마다 크고 작은 집단 속에 속해 있는 우리는 피할 수 있는 집단의 수를 줄여 나가더라도 생존을 위해 가정 및 회사나 영업장, 학교, 군대, 감옥 등과 같은 집단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경우가 많다. 일회적으로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공공장소에 가야 하고, 식사를 위해 대중식당을 방문해야 하며, 이동을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수들은 대체로 자의나 자력이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 언제 어디서 불의의 ‘그것’을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안은 채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집단이라는 유형의 격리 위에 덧칠해진 바이러스라는 무형의 격리 요소가 이중으로 교차되며 실생활을 장악했다. 그것은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피해야 하는지 아니면 때로는 무릅써야 하는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갈등을 끊임없이 품게 한다.

실체가 된 우발성

가족구성원 중 한 명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확진자가 나왔으니 당장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가야한다는 전화를 받은 후, 처음 든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밀접접촉자와 같이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중매체에서 얼핏 듣기로는 화장실이 딸린 방 하나를 따로 사용해야 한다는 정도가 다였다. 방에 분리된 상태로 식사를 따로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식기 도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빨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족들은 외출을 해도 되는지 등의 생각들로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복잡해진 생각은 혹시 모든 가족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해야 할 때는 어떻게 하란 말인지, 환기가 잘 안 되는 공간 밖에 없는 사람은 어떻게 지내란 것인지, 같이 사는 가족이 식사를 차려줄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에는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 등으로 번져갔다. 또한, 밀접접촉자로 분류되는 기준은 무엇인지, 능동감시자와의 차이는 무엇인지, 격리기간이 대충 2주 정도인 건 짐작하겠는데 그 기준점이 되는 날짜는 어떻게 결정되는지 등 갑자기 닥친 외압적 폭력이 순식간에 많은 생각들을 흩뿌려대기 시작했다.

이제 곧 집에 도착할 예비 밀접접촉자가 쓸 방 하나에 혼자 사용할 짐들을 대충 몰아넣은 후, 몰려드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아는 그 번호, 1339에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1339 콜센터 직원은 질문자의 문의 내용에 대해 함께 매뉴얼에서 찾아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매뉴얼에 없는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니, 얼버무리면서 해당 관할 보건소의 코로나 대책반에 문의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관할이 어디인지, 발생지 기준인지 거주지 기준인지 다시 문의하자, 발생지에서 거주지로 이관될 것인데 그 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답변으로 허무하게 상담이 종료되었다.

행정력의 권한과 규칙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면 확진자와 접촉한 시점에서 최대 14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관할구의 담당자와 연락하며 매일 자가진단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여기서 관할 구란 거주지를 말하는데 발생지와 거주지가 다를 경우 이관되는 절차가 있어 최장 3~4일 후에 담당자가 정해지는 경우가 있다. 담당자가 정해져야 주의사항 및 방역물품을 비롯한 생필품을 전달받을 수 있고 자가진단 보고도 그 이후에 이루어진다. 이관되기까지 받을 수 있는 정보나 조치사항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확진자의 접촉자 분류까지가 발생지 관할의 업무이고 접촉자 관리는 거주지 관할의 업무여서 상황에 따라 며칠이 될지 모를 이 ‘이관기’는 두 기관 중 어느 쪽의 책임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굳이 책임소재를 따지자면 책임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고 봐야 한다. 책임이라기보다 행정기관에서는 그저 일정 시점까지의 역할이 있을 뿐이고 그에 따르는 피해는 다분히 당사자의 몫이 된다. 당사자로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도대체 이 문제의 행정적 관할이 어디인지를 찾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

코로나 19의 경우만 봐도 각 지자체 및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를 비롯해 보건복지부, 교육부, 행정안정부 등 관련 기관이 많은데 같은 지침을 두고도 다른 해석을 하거나 서로 지침에 대한 공유가 안돼 있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비상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정책에는 빈틈과 변수가 있게 마련이고 그 미처 대비하지 못한 빈틈과 변수에 대한 대응방식은 각 지자체의 권한이라는 명목으로 일관성 없이 시행된다. 예를 들면 확진자의 동선 공개를 반투명하게 게재하는 지자체에 대해 시민의 안전을 위한 알권리로서 투명한 공개를 요구한다 해도 영업장의 피해 우려나 개인정보보호법이라는 명목으로 거부해버리면 그만이다. 누적된 유학생활의 피로를 풀기 위해 제주여행을 간 모녀의 편을 들 것인지, 그로 인해 생업에 지장을 받은 사람들의 편을 들 것인지가 지자체의 권한에 포함되는 겪이다. 행정기관이 일정한 대지침 사이사이로 발생할 수 있는 갖가지 변수에 대해 지자체의 권한을 여러 가지 명목을 들며 일방적으로 시행하면, 시민으로서는 그에 따르거나 혹은 거부하고 처벌 받거나 하는 선택밖에 할 수 없게 된다.

불확정성에 대한 권리

전대미문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바이러스라는 커다란 우발성 아래에 서식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경우의 수라는 우발성들을 헐거운 규칙의 가두리 안에 어떻게든 밀어 넣고, 거기서 밀려나는 역량은 행정권으로 밀어붙이며 강제한다면, 그리고 그런 패턴이 관행화되고 우리가 그것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진다면, 시민은 언제든지 위기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국가의 명목 높은 폭력에 꼼짝할 수 없음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밀접접촉자로 분류된 자와 생활공간을 같이 하는 사람이 접촉시점이나 격리 시점 등 전후좌우 상황을 검토해 볼 때, 실제로 코로나19에 감염될 수 있는 확률이 0%라 하더라도 이미 ‘분류됨’ 그 자체가 일종의 법령이 되어 규칙 밖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경우처럼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겠지만 위기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는 온정(?) 어린 답변과 함께 행정권의 격자에 갇히게 될 수 있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불확실성에 대한 책임은 모두에게 있고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피해도 모두의 것이니 그에 대처하는 방식도 일방 하향식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by Matilda Wormwood
불확실성에 대한 책임은 모두에게 있고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피해도 모두의 것이니 그에 대처하는 방식도 일방 하향식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진 출처 : Matilda Wormwood

출입하는 곳마다 적어 놓은 이름과 전화번호는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철저히 폐기되고 있는지, 평소에 노출하기를 극히 꺼리는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는 모든 곳에 적어 놓고도 ‘위기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미명하에 한 마디 항의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닥친 불확실성에 관한 준비는 너나할 것 없이 미비한 모습을 띠고 있다. 불확실한 우발성에는 그 특성상 준비가 안 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는데 마치 전문가들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꼼꼼히 잘 정돈된 것 같은 일방적인 행정적 시행 앞에 시민이 반응하고 개입할 수 있는 통로는 열려있지 않다. 그와 함께 정부가 신속하게 나름 꼼꼼한 매뉴얼을 만들어서 배포하고 발표해 주기를, 우왕좌왕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그런 역할을 해 주기를 앉아서 바라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 더 확률이 높을 수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책임은 모두에게 있고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피해도 모두의 것이니 그에 대처하는 방식도 일방 하향식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한 준비를 조금씩이라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암묵적인 수긍과 준수만이 ’사건‘을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조성된 분위기는 얼마 못가서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아니, 벌써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하는 일

자가격리자는 단독가구가 아닌 이상 스스로 거동할 수 없는 것도 아닌데 환자와 같은 수준의 돌봄이 필요하다. 같이 생활하는 나머지 식구들을 위해 ’누군가‘는 꼼짝없이 붙어서 꼬박꼬박 따로 식사를 차리고, 별도로 세탁물을 처리하는 등의 품을 들여야 한다. 위기상황에도 ’누군가‘의 돌봄노동은 당연시되며 아무도 그 중요성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노동으로 밀려난다.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결국 ’누군가‘가 하게 되어 있는 영구 후순위 노동인 것이다. K방역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세계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위해 곳곳에서 가중된 ’누군가‘의 돌봄노동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림자노동일 뿐이다.

사건성의 외부에 있다가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겉으로는 정교해 보이는 과정에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직접 목도하게 된다. 이틀만에 이관이 완료되었는지 담당자의 전화가 왔고 사흘째 되는 날 자가격리자의 생활지침이 담긴 전단지와 함께 이미 거의 모든 집에 비치되어 있는 간단한 소독용품이 배달되었다. 그리고 통보된 자가격리 기간은 단 일주일. 확진자와의 최종 접촉일이 일주일 전이므로 자가격리기간인 14일에서 뺀 나머지 기간이 실제 격리기간으로 할당되었다. 확진자 접촉 후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평균 4~5일 후임을 감안할 때 이미 감염될 확률이 높은 기간을 훨씬 넘겨서야 자가격리자로 지정된 셈이고, 이관받은 지자체의 담당자는 최초 1회 전화해서 자가격리자용 앱을 설치하고 하루 1회 스스로 체크하라는 말만 전하고는 이후에 다른 연락은 전혀 없었다.

정리해 보면, 당사자는 무조건 생업을 포기해야 하고, 당사자와 함께 거주하는 가족 중에 학생이 있을 경우 무조건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조건은 확실히 지정해 줄 테니, 당사자는 감염 가능성과 관련한 시점이나 기간이 어떻든 무조건 지정된 날짜까지 알아서 집(방)밖을 나오지 말 것이며, 그 가족들은 자가격리자에게 온전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련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의문점에 대한 답변을 듣고자 수차례 시도해도 도무지 접촉할 수 없는 여러 행정기관의 담당자들 중 일부와 어렵사리 통화가 되었지만 하나 같이 최종적으로 본 기관의 소관사항이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고, 급기야 사람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호소까지 듣게 되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맞고 사람이 하는 일이니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긴 한데, 그 사람이 하는 일에 문제가 생겼을 때 왜 사람이 관여할 수 없는 건지, 앞의 사람과 뒤의 사람이 왜 같은 사람이 아닌 건지, 난데없는 ’사람론‘은 어떻게든 문제의 답을 찾아보려는 노력에 허탈함의 재를 뿌렸다.

불확정성 시대에 대처하기

이후에도 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며 수업 중에 갑자기 하교하는 아이를 맞기도 했고, 학원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해서 한동안 원격수업하는 아이를 돌봐야 했고, 지난 번 밀접접촉자로 곤혹을 치른 후 확률이 떨어질 거라 안심하고 있던 가족의 근무지에서 다시 다른 확진자가 나와 2주간 재택근무자를 위한 비상체제가 가동되기도 했다. 우발성의 확률은 확실히 확률인지라 고르지 않을 수 있지만 너무 자주 반복되는 비일상적인 상황에 이제는 좀 덜 놀라고, 덜 당황하면서 크고 작은 파도를 넘듯 사건들을 대하게 되었다. 내일이 오늘만 같을 것 같고, 아니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것 같고, 그 다음날도 크게 다르지 않은 속도와 양상으로 펼쳐질 것 같은 기대를 점차 줄여가야 하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늘 하던 대로만 하면 별 문제없이 가던 방향으로 계속 흐를 거라는 당연한 기대와는 달리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이후에도 맞게 될 것이다. 그에 대비하려면 리더쉽 강한 지도자 혹은 행정기관의 진두지휘나 더 복잡하고 정교한 매뉴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예외와 변수를 감안 혹은 감내하는 적응력을 키워야 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정해진 규칙보다 즉흥적인 대처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이 초래할 과정적인 시도의 위험을 무릅써야 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한 유연성은 일방적인 소통방식이 아닌 다발적인 통로를 통한 활발한 소통과 그를 위한 실제적 제도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기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그에 대한 장단기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과, 그 전에 전지구적인 생활환경에 위험이 될 수 있는 요소를 사전에 제거해 나가는 것이 순차적인 일일 것이다.

노마드

혼자 또는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소소하게 실천하는,
평범하게 살지만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색깔이 분명해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투명함을 지향하는,
분자적 노마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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