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평화의 데팡스

내핍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자본의 속도에 동조된 소비를 재정의 해서 탈성장 이론으로서의 데팡스를 구축해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소비양식으로 대안을 찾아보자.

기후위기의 시대. 문명이 계속 남아 지금의 시대를 부른다면 이 이름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훗날이야 알 수 없지만 많은 과학자들과 지구인들은 기후위기의 문제를 걱정하고 문명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소비를 줄이자고 말하고 있다. 플라스틱의 소비를 줄이고 육식의 소비를 줄이고 에너지를 줄이자고 말하고 있다. 지구가 버텨내기 힘든 과잉 에너지-물질의 소비가 더 과잉된 에너지-물질 생산을 부르고 있다. 아니 그 반대이려나? 그것을 답할 수 없지만 꼬리를 문 생산과 소비는 서로를 증폭시키며 점점 더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 없으리라 예측되고 있다.

소비를 줄이자는 이야기는 하나의 정신운동으로 발전하여 미니멀리즘이라는 고유명사까지 얻게 되었으나 아직까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는 속도에 비해 사회와 개인의 각성은 늦고 국가와 국제기구의 체계적 대응은 언제나 더 늦어지고 미뤄지고 있다. 그 사이 과학자들이 상정한 불가역적인 마지노선은 이미 뚫렸다고 말해지고 있다. 생산은 국가와 자본의 영역으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쉽게 개인의 행동에서 소비를 줄이는 실천대응을 말하곤 한다. 그것이 자본과 국가의 영역에 목소리를 높일 압력을 줄여나가기에 자본에 포섭된 것이라고 이야기 하곤 하지만, 자본과 국가의 생산에 대한 직접적 개입이 불가능한 개인들의 선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액션이자 저항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양심의 영역이자 신념의 영역이라 쉽게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핍과 절제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왜 이들의 목소리가 쉽게 사람들에게 설득되지 않고 사람들은 자본이 제공하는 소비의 유혹에 소비가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기계에 쉽게 포섭되는지, 그것이 단지 대중매체의 의한 세뇌에 의한 것일 뿐인지 답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대중들이 소비에 중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아직 기후위기의 개념이 일반화되기 이전 20세기 초의 생산의 시기에 소비의 개념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 바타이유의 ‘데팡스’ 개념을 오늘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해 봄으로써 기후위기 시대의 개인이 강요된 선택이 아닌 적극적 행동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향의 이정표를 찾아보려고 한다.1

우리가 바타이유의 소비를 중심으로 한 일반경제 이론에 주목하는 것은 성장을 목표로 하는 생산의 경제학에 대척점에 서 있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후 위기가 일반화된 이후로 우리는 많은 탈성장이론의 가능성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지만, 위기에 몰린 상태에서 당위적으로 외치는 외침보다 차분히 탈성장의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시대의 이론을 탐구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때로는 위기에 대한 의식이 절망적인 소비를 부추기고 대안의 에너지를 감쇠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부정하거나 절망적 소비의 형태로.

물론 바타이유의 시대가 차분한 시대라고는 말할 수 없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관통한 그의 시대는 그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암울한 비극의 시대였다. 하지만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경제 성장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성장의 통제하는 권력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세계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타이유는 ‘성장의 시대’에 이미 성장의 한계가 파국으로 나타날 것이며, 생산이 아니라 소비의 개념을 가지고 일반경제를 분석한다. 또한 소비를 두 종류의 소비로 나누면서 ‘데팡스’에 주목한다.

바타이유는 인간의 소비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생산적 소비’로서 개인이 생명을 보존하고 생산 활동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소비를 뜻한다. 쉽게 말해, 먹어야 숨도 쉬고 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다른 하나는 ‘비생산적 소비’로서 생명 보존과 재생산이 아니라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소비이다. 바타이유는 대개 생산적 소비의 개념에는 ‘콩소마시옹(consommation)’이라는 용어를 부여했고, 비생산적 소비의 개념에는 ‘데팡스(dépense)’라는 용어를 부여했다. (같은책 p58)

넓은 의미에서 데팡스는 물리적 정신적 한계 때문에 이용할 수 없는 에너지이고 시스템 내로 배분되거나 자연에 흩어져야 하는 에너지-물질이다. 존재하나 이용할 수 없는 형태로 변환되어야 하는 에너지 물질이다. 그러나 사회의 시스템은 데팡스를 합산되어질 수 있고 이용되는 에너지로 재정의한다. 이는 실재 사회에서 ‘비생산적 소비’ 영역이 잉여소비, 3차 서비스 산업의 영역 등으로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경제의 주요 영역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바타이유 이론에서도 고대 사회로 부터의 데팡스가 무의미 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의 기본 방향을 결정짓는 행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소비가 합산되고 이용되어 더 큰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자 생산의 목표로서 정의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구 에너지의 순환을 열역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길 제안한다. 바타이유 또한 에너지를 모든 경제 활동의 원천으로 보았다.

개별적 개체가 항상 자원 고갈의 위험 그리고 소멸의 위험에 직면하는 반면, 일반적 실존 즉 지구 생명체 전체에게 자원은 항상 넘쳐난다. 개체의 관점에서 문제는 자원의 부족이지만. 전체의 관점에서 문제는 잉여이다.(같은책 p80)

비생산적 소비가 현대경제의 주요영역이 되다.

그렇다면 왜 지구에는 항상 잉여, 즉 과잉 에너지가 발생할까? 그것은 일체의 ‘성장’의 근원인 태양빛이 대가없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태양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태양은 우리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끊임없이, 그것도 공짜로 준다. 생명체는 그 넘치는 에너지의 일부를 포획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이며, 에너지의 초과분을 체계, 예컨대 신체의 성장에 쓴다. 문제는 성장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이다. 그때부터 초과 에너지는 반드시 대가없이 상실되고 소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생명체는 비극을 맞는다. (같은책 p53)

지구 전체의 에너지의 순환은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연관이 된다. 기본적으로 지구는 태양에너지를 받아들이는 만큼 지구복사를 통해 에너지를 내보내며 에너지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는 안정된 시스템이다. 그러나 지구 대기의 변화가 복사에너지의 방출 효과에 영향을 주어 지구의 에너지의 평형을 무너뜨려 온실효과를 일으켜 지구의 기후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산화탄소 배출의 조절, 잠자고 있는 형태의 태양에너지인 화석연료의 사용 억제를 해결책으로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체와 시스템의 에너지 사용에 작용하는 또 한 가지의 열역학 법칙이 있는데 이을 열역학 제 2법칙이라 하고 이는 또 다시 두 가지의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에너지는 비가역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시스템에 유입된 에너지는 점차 이용 불가능한 형태의 평형상태를 향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에너지에 사용측면에서 본다면 열에너지는 전부 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되는데, 기관의 에너지 효율이 절대로 100%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에 유입된 태양에너지를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 바꾸는 식물의 광합성이나 태양전지판도 결코 효율이 100%가 될 수 없으며, 이렇게 생산된 2차 에너지 또한 개체와 시스템에 사용될 때 결코 100%가 이용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데팡스 그 자체가 아니라 데팡스를 포획하는 플랫폼이다. 사람들은 본래 원했던 욕망을 자본의 상품이 주는 쾌락으로 해소해야 한다.
문제는 데팡스 그 자체가 아니라 데팡스를 포획하는 플랫폼이다. 사람들은 본래 원했던 욕망을 자본의 상품이 주는 쾌락으로 해소해야 한다.
사진 출처 : needpix.com

개체는 데팡스를 통해 에너지와 물질을 완전한 평형 상태까지 소비하고 배분하며 자연으로 배출한다. 그 과정에서 개체와 시스템은 평형상태 속에서 보존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에너지를 또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삼아 시스템의 발전요인으로 삼는다. 자본의 축적을 위해 개인적인 데팡스의 영역을 통제하고 변형시키며 자신의 발전 속도에 개인의 데팡스를 동조화 시킨다. 사치, 종교 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는 모두 상품화 되었고 더 이상 고대의 양식으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요는, 흩어짐으로 사회의 평형을 유지하던 데팡스가 사회적으로 합산되어지면 거대한 에너지 자원이 되고 그 상징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와 산업으로 정의되고 그것이 데팡스의 성질 자체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흩어지는 에너지가 이용 가능한 형태가 된다며 소비하는 기관은 어느덧 발전기가 된다. 물론 에너지의 효율적 사용과 재활용으로 에너지를 아끼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제본스의 역설”은 역설이 아니라 계획된 것이다. 에너지와 물질의 소진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 이상 자본의 순환주기에 맞추어진 에너지의 소비는 불완전 연소를 촉진하며 더 많은 에너지의 사용과 쓰레기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쓰레기는 불완전 연소된 에너지의 결정이다) 데팡스는 더 이상 잉여의 소진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잉여의 생산을 촉진한다.

소비중독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 : 자본에 동조된 데팡스

고대 사회의 데팡스는 사회의 잉여에너지를 나눔과 베품으로 재분배 하고 사회의 폭발적인 성장의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시스템의 공멸을 막으며 개인에게도 행복과 평화를 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그 에너지의 합산이 과도해지며 시스템은 개인을 도구화 하고 시스템에 복속시킴으로 개인에게 더이상 평화와 행복을 주지 못하게 되었으며 데팡스가 가지는 시스템의 보호 기능도 소멸하게 되었다.

문제는 데팡스 그 자체가 아니라 데팡스를 포획하는 플랫폼이다. 느리지만 완전한 연소가 아니라 자본의 순환에 맞춘 빠른 불완전 연소를 통해 계속 쓰레기를 만들지만 데팡스가 지닌 에너지를 자본의 재생산에 이용 가능한 형태로 포획하는 것. 느린 완벽함이 아닌 대량생산 소비의 불완전 연소는 개인에게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갈증을 유발하며 에너지를 포획한다. 만족을 모르는 절제. 우리는 결코 완전히 절제할 수 없다. 이제 사람들은 본래 원했던 욕망을 자본의 상품이 주는 쾌락으로 해소해야 한다.

재생산을 멈춘 소비이자 소멸 : 데팡스의 복원

자본주의 사회는 기관의 효율을 데팡스를 모두 콩소마시옹의 일부로 편입했으며 생산과 소비는 서로 맞물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바타이유가 걱정하던 파국은 지구적 차원으로 도래한 것이다. 바타이유는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을 문명의 파국으로 보았고 그걸 막기 위해 데팡스에 주목했지만 이제 닥친 지구의 위기에서 세계대전은 그 위기의 한 요소에 불과해 보인다.

우리가 여가를 즐기는 산업은 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평온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그것은 개인이 지니는 시간이라는 또다른 자원의 소비의 불완전 연소와 관련되진 않을까? 고대의 데팡스는 시간을 자원으로 측정하지 않았다. 과잉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소멸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우리가 더 이상 이용 불가능한 형태로 쓰레기와 남는 에너지 없이 완벽하게 소멸시키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개인과 시스템의 평화와 행복을 얻어냈다. 하지만 자본의 순환속도에 시간의 사용을 점령당한 후에 우리는 본래 얻어야 했던 평화와 행복을 쾌락 상품으로 소비하고 있다. 그렇게 얻어진 쾌락의 총량이 많아졌다고 해도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얻음으로 함께 소모해버린 공허함과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쾌락의 총량이 늘어갈수록 공허함과 슬픔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숨어들며 개인과 시스템을 병들게 하고 파괴로 몰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팡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데팡스는 존재의 필요조건이다. 일정정도의 형태의 비어있음은 언제나 필요하다. 생산에 관여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합산되지 않고 오로지 평화의 형태로 존재하는 데팡스가 필요하다. 있음 속에서 존재하는 없음. 명상과 발산의 시간. 데팡스는 재생산을 염두에 두지 않는 완벽한 소비이자 소멸이다. 그 목적은 행복의 극대화 만족의 극대화에 있다. 시간이나 비용 효율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느리고 완벽한 휴식은 추가의 휴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더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는 에너지를 완벽하게 소멸시키는 것. 데팡스는 자본주의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계를 지니고 있다.

데팡스의 욕망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쓰레기 제로로 만드는 완벽한 사용이다. 물질과 에너지가 남지 않을 때까지 소진하고 분해한다. 오직 소멸되는 것은 시간과 스트레스일 뿐이다. 탈성장의 데팡스는 오히려 기관의 효율을 낮추고 에너지의 사용자체를 줄이는 사보타지 같은 방식은 아닐까? 합산되어지지 않는 저항들의 미시적 운동이 다른 기계들과 공명을 이루는 방식은 아닐까? 개인은 더 이상 시간을 상품의 소비로 소모하지 않고 최소한의 에너지와 물질을 완벽하게 소비하는 방식으로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사랑 같은 것. 대가 없는 자비 같은 것. 그것이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오직 생명만이 중요하다. (제5원소)

  1. 이글은 『탈성장 개념어 사전』 콜로키움에 발제문의 보론으로 데팡스의 개념을 평론하며 나온 주제를 발전 시킨 것으로 데팡스의 더 깊게 파악하고자 『조르즈 바타이유: 저주의 몫, 에로티즘』 (유기환; 살림 이하 같은책으로 표기)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함을 밝혀둔다. 데팡스에 대한 개념의 설명보다는 데팡스의 기후위기 시대 해석에 대한 주관적인 내용이 많으므로 데팡스에 대한 일반이론은 다른 글이나 책을 참고하길 바란다.

오민우

문학회 출신의 약사다. 비건이면서 요가철학을 공부하고 지역품앗이한밭레츠 대표를 맡고 있다. 욕망에 휩쓸리고 화를 내기도 하고 깨달음을 추구하기도 하는 에고를 관찰하는 취미가 있다. 그걸 글로 쓰고 있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