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피조물 개념에서 배우는 오늘의 기후 행동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프란치스코를 ‘생태학의 주보성인’이라 하셨다. 모든 피조물을 경배했고 그들과 우정을 나누었으며 벌레를 밟을까 염려하고 꿀벌들과 꿀과 포도주를 나누던 분이셨다. 해와 달을 누이라 부르고 모든 동물을 형제를 부르며 매미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기후행동의 어려움 앞에 다시 생각해 본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피조물의 전체적 균형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피조물의 친구로서 그는 모든 짐승, 식물, 자연, 그리고 해와 달을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는 것에로 초대했습니다.”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평화, 창조물과의 평화” 중에서

성 프란치스코, 가톨릭교회의 ‘생태학의 주보성인’

지극한 가난과 겸손, 단순함, 자연과의 친밀성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생태 문제를 다룬 저술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태양의 노래’라는 죽음 직전에 지은 찬미가와 함께 식물, 동물, 무생물들과 어떤 친밀한 관계 속에 있었는지에 대한 타인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11월 29일에 발표한 사도적 서한 「Inter sanctos praeclarosque viros」를 통해 프란치스코를 ‘생태학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고,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평화, 창조물과의 평화”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피조물의 전체적 균형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피조물의 친구로서 그는 모든 짐승, 식물, 자연, 그리고 해와 달을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는 것에로 초대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제2의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거울’라고 불립니다. 가난한 이들을 벗 삼고 그들이야말로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선포한 예수(마태 5,1-12; 루카 6,20-26)를 충실히 따랐기 때문입니다. 1182년(혹은 1181년)에 이탈리아 작은 도시 아씨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1226년에 죽을 때까지 “나는 가난이라는 부인과 결혼했다”는 말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죽기 1년 전에는 십자가 처형 때 예수 몸(손과 발, 옆구리)에 생겼던 다섯 상처(오상)가 프란치스코 몸에도 생겼고, 이 상처로 인한 극심한 병고와 거의 눈의 먼 상태로 「태양의 노래」(원제는 「피조물의 찬가(Laudes Creaturarum)」)를 지었습니다.

그 아픔과 결핍 속에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게도, 태양의 노래에는 하느님과 그분이 창조하신 만물을 찬양하는 기쁨과 감사로 넘칩니다. 또한, 이 노래 안에는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사이에 깊은 친교와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겪은 고통과 상처를 온전히 받아 안은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 인간과 피조물 사이를 이어주는 아름다움과 선함, 시간과 영원성 사이에 놓인 거룩한 화해를 노래했던 것입니다.

피조물의 찬가, 일명 태양의 노래

「태양의 노래」는 14장으로 되어 있고,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 부분은 각기 피조물의 노래(1-9장), 용서의 노래(10-11장), 죽음의 찬가(12-14장)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3-9장을 고 최민순 사도 요한 신부님의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본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였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불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줍니다.

언니 햇님, 누나 달과 별,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와 사시사철, 언니 불, 누나요 어머니인 땅에 이르기까지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과 우리 인간이 서로 자매 관계임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피조물 앞에 형용하는 호칭이 100% 여성형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구약성서 중 잠언서 8-9장에 나오는 의인화된 여성 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 옆에서 도와주었고 자기 집에 음식을 차려놓고 손님들을 접대하며 지혜를 선포한 예언자 부인은 프란치스코가 노래한 언니요 누나요 어머니와 풍요로운 우주적 지평을 열어줍니다.

프란치스코의 피조물 개념

프란치스코에게 피조물들은 단순한 사물도,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도,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불가결한 자원도 아닙니다. 자연과 세상 만물은 하느님의 사랑과 아름다움과 선함과 지혜를 드러내고 전하는 표징입니다. 이 피조물들을 통해서 인간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배웁니다. 자연과 우리가 만나는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비추는 거울”이고 하느님 가까이 닿게 해주는 ‘영성의 사다리’이며 하느님의 발자취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첫 전기작가인 토마스 첼라노(『아씨시 성프란치스꼬의 생애』, 분도출판사, 1986)는 프란치스코의 자연관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모든 사물들이 그에게는 선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만드신 분은 가장 좋으신 분입니다’라고 그에게 외쳤다. 그분의 발자국이 서려 있는 사물들을 통하여 그는 어디서나 사랑이신 그분을 따라갔다. 그는 홀로 모든 사물에서 사다리를 만들어 그 사다리를 밟고 옥좌로 올라갔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에게 모든 자연과 피조물은 인간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온갖 피조물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인격적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소중한 존재이며, 하느님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을 통하여 인간이 사랑의 응답을 하길 기다리면서 당신의 뜻을 실현하길 바라신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우정을 나눈 성 프란치스코

이러한 그의 피조물에 대한 생각은 올곧게 실제 삶과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전기를 보면, 다채로운 사례들이 나옵니다. 프란치스코는 바위(1코린 10,4)로 불리던 그리스도를 떠올리며 돌 위를 조심스럽게 걸었고, 십자가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수도회 형제들이 땔나무를 벨 때는 나무를 통째로 자르지 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풀과 꽃들을 보며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햇순”(이사 11,1)을 떠올리고, 만물의 아버지가 지니신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밭일하는 형제에게는 밭 둘레를 그냥 놔두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길에서 만난 벌레가 밟히지 않도록 옮겨 주면서 “사람도 아닌 구더기 야훼의 종”(시편 22,7)을 묵상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다가 풀려난 어린양을 보고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요한 1,36)과 “묵묵히 어린양처럼 끌려가신 야훼의 종”(이사 53,7)을 묵상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피조물들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빼루지아(『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 분도출판사, 1977)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분은 피조물을 매우 사랑했으며 자애롭게 대하셨고, 귀하게 여기지 못할 때는 심란해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피조물이 지성과 말을 가진 듯, 하느님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듯 그렇게 내외적인 큰 기쁨을 가지고 피조물과 대화하셨습니다. 자주 이럴 때가 그분이 하느님께 사로잡힌 때이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와 영성으로 프란치스코는 벌레가 발에 밟힐까 염려스러워 길에 있는 작은 벌레를 옮겨 주고, 꿀벌들이 겨울 추위에 굶어 죽지 않도록 꿀과 가장 좋은 포도주를 주었으며, 모든 동물을 형제자매라 부르고, 매미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가 나눈 자연과의 친밀하고 사려 깊은 교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매일 기도하는 시간을 매가 알려주었고 그 시간에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심한 병에 시달릴 때는 매가 그를 걱정하여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프란치스코가 설교를 할 때 제비들이 시끄럽게 지저귀자, 제비들에게 조용히 해줄 것을 명하니 순종하였다고 합니다. 한 귀족이 프란치스코에게 준 꿩을 어느 의사가 키우려고 데려갔지만 통 먹지를 않아서, 도로 프란치스코에게 데려오니 즐겁게 모이를 먹었고, 바람이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피조물에 대한 인간 행위의 발자취들

성 프란치스코의 피조물 개념과 우정어린 관계를 요약하고 나니, 그의 삶이 뭇 사람들이 생각하고 걸어온 지평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학과 신학이라는 서구학문을 공부해온 저는 한국인이지만, 서구문명사의 시대구분에 따라 인간의 환경(자연, 피조물)에 대한 시선과 태도를 정리하려 합니다.

고대인은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동식물을 우러르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자연에 강력하고 신비한 힘(마나)이 있다고 믿었고, 다양한 신들(다신론)과 정령들을 숭배(애니미즘)하였으며, 힘센 동물들을 추종(토템이즘)하기도 했습니다.

기후위기는 종교적 관점에서 창조세계 전체에 닥친 위기가 틀림없다. 가난과 피조물 전체에 대한 경배는 소비주의에 물든 현대적 삶을 극복하는 중요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사진 출처 : pxhere
기후위기는 종교적 관점에서 창조세계 전체에 닥친 위기가 틀림없다. 가난과 피조물 전체에 대한 경배는 소비주의에 물든 현대적 삶을 극복하는 중요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사진 출처 : pxhere

서구 중세인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억압적 이원론(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을 바탕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을 열등하고 타락한 惡의 산물로 치부하고 착취하는 데 골몰합니다. 따라서 피조물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배우고 따랐던 성 프란치스코는, 동시대인들과 아주 다른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근대인과 현대인은 프란치스코가 아니라 중세인의 피조물 개념을 받아들였고, 한발 더 나아가 ‘신을 죽이고’ 그 자리에 인간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자연 지배를 본격화하여 소비자본주의를 촉진해왔습니다. ‘피조물’의 뜻이 하느님이 만드신 만물이므로,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근현대인에게 ‘피조물’이라는 단어 사용은 영 어색하고, 인간에게 생태 위기가 지구 자체의 생태 위기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탈현대를 주장하며 행성적 관점에서 인간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는, 지난 인류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앞으로도 건강히 생존하며 지구의 한계를 넘어서서 멋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살펴보았다시피,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분이 창조한 피조물들과 우정을 나누며 아주아주 가난하게 살다가 44세로 단명했습니다. 너무나 단순하지만 소비주의에 물들대로 물든 우리가 너무나 따라 하기 힘든 기후 행동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군요.

유정원

생태신학을 계속 공부하면서도 생태실천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있는, 머리의 지식이 손과 발로 온전히 내려오지 못한 미숙한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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