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공간의 정치가 무력화된 곳에는 속도의 정치만이 존재하게 된다. 정치는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제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되었고, 대중은 속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저 움직일 뿐이다. 속도는 민중에 대한 전쟁 선포이며, 자동차나 운송수단은 이동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쟁기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932년 파리에서 태어난 폴 비릴리오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의 탱크와 전차를 앞세운 전격전에 깊은 외상과 충격을 받아 속도의 정치를 연구하였다. 그는 철학자, 도시계획 전문가, 문학이론가, 영화비평가, 큐레이터, 군사역사가, 평화전략가 등 다양한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질주학’(Drom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과를 창시하기도 했다. 그의 《속도와 정치》는 요새화된 도시로 통합되기 시작한 인류 문명이 어떻게 속도를 점유해서 지리적 장소성을 소멸시켰는가를 연구한 저서이다. 첨단기술사회에서 정보통신과 교통수단의 발전으로 인해, 빛의 속도로 먼 거리에서 소통하고 빠른 시간에 이동하면서 지리적 장소성과 영토 개념은 흔들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독일군이 보여주었던 전격전과 마찬가지로 총체적인 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비릴리오의 진단이다.

비릴리오는 전쟁에서 속도가 도입된 최초의 사례를 《손자병법》에서 찾는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이긴다는 ‘지피기지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구절로 유명한 《손자병법》은 사실 전쟁에 속도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병법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적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기동적으로 적과 싸울 것을 제안한다. 비릴리오는 2,500년 전 손무(손자)가 보여준, 속도를 전쟁에 도입하는 생각을 정치 전략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손무 이전에는 전쟁을 적에 대한 무차별 기만이나 후방 교란, 기동전과 같은 속도가 개입된 요소보다는 진지, 참호, 요새, 성과 같은 영토적인 성격으로만 바라보았다. 《손자병법》은 이후 전 세계 군사전략가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그 최종 결과물이 나치의 전격전이었다.

비릴리오에 따르면, 도시국가는 에너지나 물자가 어떤 장소에 머물러 있도록 영토성과 장소성의 속성을 갖는 요새도시를 형성했으며, 그러한 장소성을 기본으로 교통, 운송, 전쟁이 이루어져왔다. 그러한 공간의 정치는 결국 근대에 이르러 광장을 점거하고 가두행진에 나선 노동자 운동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러시아혁명 때 페테르부르크 거리 행진이라는 극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시위를 하는 것은 도시라는 영토를 점령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공간의 정치를 작동시킨다. 나치는 노동자들의 이런 가두행진이나 거리 시위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 17만 명의 도시 중산층으로 하여금 폭스바겐을 사도록 유도했으며,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거리를 점령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이를 통해 공간의 정치는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 자동차가 달리는 것은 민중과 노동자에 대한 영구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간의 정치가 무력화된 곳에는 속도의 정치만이 존재하게 된다. 정치는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제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되었고, 대중은 속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저 움직일 뿐이다. 속도는 민중에 대한 전쟁 선포이며, 자동차나 운송수단은 이동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쟁기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민중의 공간의 정치에 대한 전쟁, 생명의 느림에 대한 전쟁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질주한다. 비릴리오에 따르면, 나치의 파시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 무지막지한 속도로 움직이는 자동차의 총력전 상황에서 살아 있다.

‘형이상학의 노동자’라고 불릴 정도로 무력화되고 신화화된 노동자 운동이 출현하게 된 것에는 영토성과 장소성의 정치를 완전히 절단 냈던 자본주의 문명의 속도의 정치가 숨어 있다. 사람들은 바쁘게 자동차를 타고 출퇴근하거나 소비를 하지만, 정작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의미가 머물 수 있는 장소를 파괴하는 범인이 자동차라는 사실은 잘 모르게 된다. 비릴리오에 따르면, 진보를 파괴한 것은 바로 질주하는 자동차였으며, 교통신호 체계 같은 것으로 존재하는 자동차의 속도가 수행하는 총력전을 전제로 한 평화만을 평화의 본질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속도 자체는 평화를 파괴해 영구적인 전쟁 상태를 만들며 역사의 진보를 파괴하는 원천이다.

이 글은 신승철 저,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2012, 서해문집)에 수록된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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