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 소개 《쌀의 행방: 1946》 이 작품은 대구 10월항쟁 80주년 전시 《살아지고, 살아지는》에서 예술무리 별난이 선보인 참여형 작업이다. 조합원과 가족, 지인 등 여러 사람에게서 쌀 한 줌씩을 모아 도자기, 소리, 퍼포먼스, 설치 등의 작품으로 풀어냈다. 관람객은 전시장에 마련된 쌀을 직접 봉투에 담아 가져갈 수 있었다. |
흔히 우리는 지식이 세계를 정확히 비춘 거울상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바라드는 이런 사고를 재현주의(representationalism)라 부르면서 비판한다. 거울 밖에 서서 원본과 상을 나란히 놓고 비교할 자리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바라드는 재현(representation) 대신 회절(diffraction)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물결이 겹칠 때 새로운 무늬가 생기듯, 무엇이 무엇을 닮았는가가 아니라 차이가 어디서 생기고 무엇을 하는가를 볼 수 있는 까닭이다(72, 185, 381). 이 전시가 1946년 10월의 대구를 재현하는 대신 그날의 쌀과 오늘의 쌀을 서로 통과시키듯, 이 글이 따라가려는 물음도 “1946년은 어떠했는가”가 아니라 “그 차이는 지금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이다.
1. 현상, 내부–작용, 행위적 절단

사진 제공 : 예술무리 별난
행위적 실재론의 핵심 명제는 세계의 존재론적 단위가 독립된 사물이 아니라 현상(phenomena)이라는 것이다(139, 141). 개체는 관계에 앞서 존재하지 않으며, 내부-작용(intra-action) 속에서 비로소 경계와 속성을 획득한다. 상호작용(inter-action)이 이미 구획된 둘의 만남을 전제한다면, 내부-작용은 관계가 개체에 선행한다. 즉 물질 또한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생산하는 동시에 생산되는 것이며,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함(doing)”이자 행위성의 응결(congealing, 엉겨 굳음)이다(137, 183).
그렇다면 무엇이 무엇인지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바라드는 이를 행위적 절단(agential cut)이라 부른다. 절단은 현상 내부의 존재론적 비결정성을 그때마다 특정하게 만드는 사건이다(140, 148, 175-176).
쌀 한 줌이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는 동안 ‘청하는 사람’과 ‘내어 주는 사람’은 그 행위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부탁을 받고 쌀독을 열어 한 줌을 덜어 내는 동안 그는 이 작업의 참여자가 되고, 서로 모르던 두 사람은 그 짧은 동작 안에서 처음으로 관계를 얻는다. 멀리서 쌀을 부쳐 오는 경우도 다르지 않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는 쌀이 오가는 동안 비로소 생겨난다. 1946년에도 그러했다. 굶주린 개인들이 먼저 있고 나중에 모인 것이 아니라, 쌀을 요구하는 행위 속에서 그들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2. 장치들: 용기, 쌀독, 봉투

사진 제공 : 예술무리 별난
바라드에게 장치(apparatus)는 대상을 관찰하기 위한 중립적 도구가 아니다. 장치는 세계의 물질적 재배치이자 경계를 만들어 내는 실천이며(142, 148), 고정된 설비가 아니라 내재적 경계를 갖지 않는 열린 실천이다(146).
이 전시장에는 세 개의 장치가 놓인다.
먼저 도자기로 만든 사발은 쌀을 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이 쌀’인지를 규정한다. 그릇 안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쌀은 이미 섞여 출처가 지워진 상태다. 그릇 자체가 흙과 물과 손과 불의 온도가 얽혀 형성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장치 역시 세계 바깥에 있지 않다.
쌀독은 다른 규정을 수행한다. 그것은 완결된 대상이 아니라 계속 줄어들고 다시 채워지는 열린 저장고이며, 전시가 관객의 손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배치된다는 사실을 물질로 드러낸다. 쌀독에 담긴 것은 그릇의 쌀과 다른 쌀이 아니다. 같은 쌀이 어떤 장치에 놓이느냐에 따라 보존되는 것이 되기도 하고 흘러 나가는 것이 되기도 한다. 쌀의 성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쌀을 규정하는 절단이 달라진 것이다.

벽면의 종이봉투는 관객을 관찰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장치의 일부로 만든다. 봉투는 바로 그 자리에 놓인다. 봉투 안의 기록은 쌀이 지나온 길을 알려 준다. 그런데 그 기록은 벽에 붙어 있는 동안에는 읽히지 않는다. 떼어 내야 드러나고, 떼는 순간 전시장에 남지 않고 쌀과 함께 흩어진다. 기록으로 붙잡아 두는 것과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그릇 속의 쌀이 이미 지나온 길을 지운 상태라면, 봉투를 떼는 관객은 그 경계를 다시 긋는 사람이 된다.
3. 엎어진 쌀

사진 제공 : 예술무리 별난
도자기 사발 옆에는 엎어진 도자기와 쌀이 함께 놓인다. 이것은 담기지 못한 것, 담김의 바깥이다. 바라드에게 배제는 실패나 잔여가 아니다. 모든 경계 짓기는 반드시 무언가를 배제하며, 그 배제는 결과에 구성적으로 관여한다(64, 93, 168). 더 중요한 것은 배제가 비결정성을 남겨 둔다는 점이다. 비결정성은 단 한 번에 해소되지 않으며, 배제된 것이 오히려 열린 공간을 구성한다(179).
담긴 쌀만으로는 이 작업이 성립하지 않는다. 엎어진 쌀은 그릇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릇의 경계가 그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함께 발생한 것이다. 담긴 쌀과 엎어진 쌀은 동일한 사건의 두 얼굴이며, 넘친 것을 셈에 넣지 않고서는 담긴 것이 무엇인지도 말할 수 없다.
1946년 10월 항쟁 역시 그렇게 읽을 수 있다. 항쟁은 미곡 수집과 배급이라는 질서가 작동하다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그 질서가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바깥으로 밀려나야 했던 것이 드러난 사건이다. 무엇이 정상적인 분배로 규정되는가는 무엇이 그 규정에서 배제되는가와 함께 결정된다.
엎어진 쌀을 쓸어 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미완의 상태를 방치하는 일이 아니다. 배제를 해소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현상의 구성 요소로 남겨 두는 선택이다.
4. 시공간 물질화와 기억
바라드에게 시간은 사건들이 담기는 그릇이 아니다. 공간, 시간, 물질은 내부-작용을 통해 매번 함께 생산된다. 그는 이를 시공간 물질화(spacetimemattering)라 부른다(179, 234). 양자적 불연속성이 함의하는 바는 과거가 뒤에 남겨져 완결되지 않는다는 것, 미래 또한 현재의 연장으로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34, 394).
이 관점에서 기억은 개별 뇌에 저장된 기록이 아니라 세계의 물질화 속에 접혀 있는 것이며, 완전히 지워지거나 되찾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 80여 년의 시간은 그날과 오늘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이 그릇 안에서 지금 다시 접히는 두께다. 쌀이 봉투에 담겨 전시장을 떠나 밥이 되고 떡이 되고 술이 될 때, 기억은 진술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물질이 된다.
5. 응답한다는 것
우리가 세계에 책임이 있는 것은 세계가 우리의 구성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390). 바라드에게 있어 정의란 단번에 도달되는 상태가 아니며 해법이 미리 주어지지도 않는다. 있는 것은 매번의 만남에 열려 있는 실천뿐이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책임이다.
이 전시가 기록할 수 있는 것과 기록할 수 없는 것의 경계 역시 절단의 결과다. 우리는 쌀이 지나온 곳을 적을 수 있지만 섞인 뒤 한 톨의 출처를 알 수 없고, 봉투에 담겨 이곳을 떠난 뒤의 행방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알 수 없음은 무책임의 알리바이가 아니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매번 다시 응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엎어진 쌀 앞에 다시 선다. 앞에서 그것은 경계가 그어질 때 함께 발생하는 배제였지만, 여기서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다. 1946년 쌀을 요구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은 역사의 바깥으로 흘러넘친 것이 아니라, 그 역사가 지금의 형태로 담기기 위해 흘러넘쳐야 했던 이들이다. 그들을 쓸어 담아 정리하는 것은 애도가 아니다. 담기지 않은 채로 셈에 넣는 것, 그 부재가 지금의 질서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묻는 것이 애도다.
굶주림의 기억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그날의 장면을 보존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무엇에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다. 봉투를 떼어 쌀을 담고, 집으로 가져가 씻고, 불을 올리는 일 — 응답의 가장 작은 단위가 거기에 있다.
쌀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물음에 확정된 답은 없다. 다만 쌀이 손과 장소를 건널 때마다 세계는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진다.
■ 참고
Barad, Karen(2007).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Quantum Physics and the Entanglement of Matter and Meaning.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글 | 남미자(예술무리 별난)
| 《쌀의 행방: 1946》 전시 정보 ⦁ 기획: 김은제 ⦁ 전시 구성 및 설치: 김신윤주, 최대주 ⦁ 전시 작품 . 1. 《쌀의 행방: 1946》 — 예술무리 별난 / 시민참여 프로젝트, 혼합매체, 가변 크기, 2026 . 2. 《용기》 — 남미자 / 도자기 2점, 39 × 39 × 20cm, 2026 . 3. 《한 줌 걷다》 — 임지연 / 퍼포먼스, 2026 . 4. 《싸운드》 — 신동석 / 사운드, 3분, 2026 (작품 듣기) . 5. 《쌀이 머무는 몸》 — 유승협 / 쌀·누룩·물·옹기·흙잔, 참여형 퍼포먼스 및 설치, 2026 . 6. 「쌀은 무엇이 되는가」 — 남미자 / 텍스트, 202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