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야만적인 신자유주의는 인류의 소중한 공동 자산인 자연을 일찍부터 상품화한 결과, 자연은 황폐화해져 지구촌 곳곳에 자연 재해의 원인이 되어 많은 인명피해까지 일으키고 있다. 이제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마저도 상품화하여 인간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으로 양분화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잘못된 삶’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장애인인 저자는 변호사로 일하면서 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 등을 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잘못된 삶’이란, 착하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삶이 아니라 존중 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 당한 삶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하고, 교육 받지 못하고, 장애나 질병이 심하고, 다수가 혐오하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 성소수자들은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정의해 버린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히틀러나 일부 극우세력들이 주장하고 실행했던 우생학적 정책을 인권 차원에서 강력히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여전히 우생학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아름다움을 최고의 선이라 생각하여 미용 성형을 일상화하며, 채용에서도 용모를 우선시하는 것들 모두 무의식 속의 우생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특히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나 편견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처럼 장애인을 포함한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이른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해 변론을 한다.
대부분의 일반인은 자신이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나 이들을 혐오하지 않는다고 말들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보인다. 얼마 전에 청년들을 위한 저렴한 임대주택이나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지역 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는 모습에 우리는 익숙해진 지 오래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비이성적인 행동들을 보면, 우리가 ‘잘못된 삶’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고는 아마도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강한 경쟁심에 노출되다 보니 자신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한 전략으로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멸시와 폭력을 일삼는 듯하다.
저자는 ‘잘못된 삶’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신자유주의에서 강조하는 ‘품격’이 아니라 ‘존엄’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품격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격이나 내적인 가치보다는 사람이나 조직, 국가 등이 그 지위와 역량에 맞게 갖춰야 할 외적 형식이기에 최고 품격과 저질의 품격이 있지만, 존엄이라는 것은 인류와 모든 국민이 동등한 수준으로 보유하는 것으로 최고와 최저가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 아름다운 외모의 영향력이 강력하고 광범위하다는 실증 연구는 결국 사회의 각 영역에서 ‘매력 불평등’을 유발한다. 저자는 이러한 매력 불평등을 해결할 방안으로 화가가 마치 초상화를 그리는 것처럼 대상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내면에 있는 세부적인 것들을 끌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으려면 오랜 시간 교류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예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 또는 성소수자들과 교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들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가 줄어든다는 연구 보고가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저자는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연출하기도 하면서 배우로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을 늘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아직도 비장애인들은 흔히 장애를 결핍으로 보기 때문에 장애인은 기피의 대상 혹은 동정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조금만 인식을 바꾸면 장애는 결핍이 아니라 차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강자의 무지는 쉽게 폭력이 된다고 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장애인과 성소수자를 포함한 실격당한 자들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