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함께 하는 것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어색했던 내가, 작업실과 집을 함께 고치며 가족간 관계가 변화했던 이야기입니다.

1. 우리 집과 우리 가족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건설회사에 다니던 아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사시던 땅에 5층 건물을 지었다. 재작년 남동생이 결혼하고 집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5층에, 할머니는 2층에 살았다. 올해로 거의 20년째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 5층 우리 집엔 옥탑방이 하나 있는데 그 공간이 언젠가부터 내 방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방이란 게 그냥 잘 수만 있으면 된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가족에게도 관심이 없었는데 그래서 좀 더 독립된 옥탑방이 자연스럽게 내 방이 된 것 같다.

나는 방에서 취미생활을 한다거나 제대로 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그저 방이 있으니까 시간을 보낸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이나 그림을 벽에 붙여놓는다거나, 소품이 내 스타일이라거나 하는 식의 나의 개성은 전혀 없는 방이었다. ‘아, 얘는 그냥 잠자는 곳이면 그게 어디든 상관 없겠구나’가 개성이라면 개성이랄까. 대부분 시간을 미술학원, 실기실에서 보내서 ‘내 공간’이라는 개념이 집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불어 부모님과 동생, ‘우리 가족’은 나에게 너무나 당연한 개념이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우리 집은 너무 평범했다. 지금에서야 평범하게 화목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지만 어린 시절에 그런 것에 알 바였겠나. 가부장적이지만 책임감 있는 아버지, 다정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 알아서 잘 놀고 잘 사는 동생, 그래서 관심이 없었다. 나만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우리 집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나와 동생이 싸운다거나(그것도 잘 생각해보면 내가 시비를 걸었다.) 내가 학교에서 작은 사고로 학교에 부모님이 불려가지만 않으면 아무런 사건・사고가 없는 평범한 집이었다. 나의 사춘기와 사고 수준도 객관적으로 보면 그다지 큰 사고도 아니었으므로 전체적으로 아주 무난한 가족이었다. 나와 내 동생의 성적과 학교생활도 무난했다. 그래서 부모님은 성적을 가지고 잔소리를 하거나 하기 싫은 것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의 고민과 관심은 ‘가족’과 ‘성적’ 이런 것보다는 가장 좋아했던 ‘그림 그리기는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지’ 정도였다. 그래서 나의 공간과 가족이 예쁘건 안 예쁘건 편안하건 불편하건 관심이 없었다. 나는 미술을 하는 사람치고 의상이나 외모 등의 일반적 ‘꾸미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공간’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아주 작은 단위의 물건들, 나의 색연필, 나의 펜, 나의 필통 같은 물건에만 관심을 두었다. 잘 변하지 않고 언제든 들고 움직일 수 있는 걸 좋아했다.

2. 오래오래 쓸 수 있는 작업실을 만들어야겠어.

유학을 결정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살면서 ‘나의 공간’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내가 쉴 수 있고 무언가 ‘일’, ‘작업’을 할 수 있게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 친구와 작은 작업실을 구해서 작업했지만 아무리 싼 월세라도 매달 나가는 돈과 언제라도 나갈 일(주인이 나가라고 한다거나, 나의 생활반경이 작업실 근처가 아니게 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나가야 하는 작업실은 싫었다. 거기다 그간 유학생 신분으로 이 나라 저 나라에 무거운 짐을 지고 왔다 갔다 했던 경험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나의 공간’을 원하게 하였다.

이런 생각의 꼬리를 잡고 가면, 나에게는 그런 공간이 하나 있지 않은가. 나의 유학 시절 동안 창고로 쓰던 옥탑방을 나의 작업실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이란 뚜렷한 이력과 경력이 없었고 무엇보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 방을 고쳐야 했다. 옥탑방을 내주는 것과 재료비를 지원해 주는 것도 부모님이 내가 ‘가족’이니까 봐 준 결정이었다.

일단 옥탑의 공간을 확보해야 했는데, 공간의 2/3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30년 된 피아노, 10년이 넘은 아빠의 자료들, 20년은 더 된 백과사전 전집과 동화책들, 거기다 헬스클럽용 러닝머신까지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치우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돈이 될 만한 것은 팔고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버렸다. 버리려고 내놓으니 작은방 정도의 면적이었다. 나의 사회인으로서 미래가 불확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빠는 나를 믿지 못했고 방을 치우는 것도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가장 많이 버린 것이 아빠의 오래된 물건들이어서였기도 하다.

“대체 너 뭐하려고 집을 이렇게 뒤집는 거야? 나중에 이런 거(오래된 물건들, 책들, 피아노 등) 다 버려서 후회하지 마, 진짜 중요한 거가 뭔지 잘 생각해.”

라고 눈을 흘기던 날도 있었다. 나도 내가 뭘 하려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었지만, 작업실을 고치는 이 ‘작업’이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시작한 터라 여기서 멈추면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애’가 되어버려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장 무언가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끝까지 잘 마무리해서 내가 상상하던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공사 중인 옥탑방. by 박현주
공사 중인 옥탑방. by 박현주

전공이 미술인 터라 눈이 높은 데다 유럽에서 본 것들은 많아 모든 것이 다 쉽지 않았다. 노란 장판과 누런 실크 벽지부터 난이 그려진 창문, 벌레들이 잔뜩 낀 아크릴 전등까지 대체 여기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과 재화는 한정돼 있었지만, 다행히 나는 시간이 많았다. 벽에 페인트칠하고, 바닥엔 데코타일을 깔고, 창문을 뜯어 페인트칠하고, 조명을 바꾸고, 레일 조명을 설치했다. 작은 물건이나 디테일을 좋아해서 손잡이나 스위치, 소품들도 신경 썼다.(사실 이런 것을 하려고 공간을 바꾼 거란 생각도 든다.)

작업실 구석구석을 장식한 소품들. by 박현주
작업실 구석구석을 장식한 소품들. by 박현주

대부분 혼자 작업했지만, 당연히 엄마와 아빠, 동생의 도움이 필요했다. 특히 조명이나 전기, 무거운 것들 설치는 혼자서 할 수 없어서 정말 부탁하기 싫었지만, 부탁을 해야 했다. 특히 아빠와는 처음으로 같이 ‘일’ 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대화라고는 한 달에 한두 마디 정도 하던 사이였고, 무엇보다 아빠는 이 작업을 탐탁지 않아 했기 때문에 함께 무언가를 하는 건 힘들었다. 너무 어색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 친구 작업실에 피신을 간 적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자 ‘아빠와 관계가 나쁘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잘 이해할 방법들을 시도했다. 함께 산책하고, 식사 때 일상적 대화를 시도했고, 앞으로 내가 어떤 일들을 하고 싶은지 아빠에게 정성껏 말했다. 7평 남짓한 옥탑방이 분위기 좋은 작업실로 바꾸는 데 한 달 정도가 걸렸는데 바뀐 모습을 보고는 엄마가 5층 집도 수리를 원했다. 15년 이상 리모델링 없이 집을 썼기 때문에 벽지가 뜯어져 있고, 등이 나가고, 가구들도 망가지거나 유행이 한참 지나있었다.

옥탑방과 마찬가지로 돈은 없고 시간은 많았기 때문에 다시 셀프인테리어 작업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좀 더 좋은 재료들과 비싼 가전, 가구를 살 수 있었다. 이미 작업실을 바꾼 것이 나의 이력이 되어 가족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결정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짐이 가득한 상태여서 곤란했다. 작은방 페인트칠 할 때는 작은방의 짐을 거실에 놓아야 했고, 거실에서 작업할 때는 거실 짐은 작은방에 옮겨놔야 해서 옥탑 작업실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인테리어는 살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과 공간이 빈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닫던 순간이다.

인테라어공사를 끝마친 작업실 전경. by 박현주
인테라어공사를 끝마친 작업실 전경. by 박현주

이 집을 고치는 시간이 생전 처음 부모님과 제대로 함께 일한 기간이었다. 온종일 짐을 옮기고 페인트칠을 하고 나서 외식이나 맛있는 것을 해먹었다. 식사시간 동안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내일 할 일을 정리하면 동료애가 싹트는 것 같은 기분도 느꼈다. 아빠와 동생이 페인트칠이나 조명을 설치하고 있으면 나와 엄마는 가구와 가전을 사러 다녔다. 맞춤으로 제작하고 싶은 부분은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목공방에 가서 직접 만들었다. 눈은 높고, 갖고는 싶은데 가진 건 돈이 아니라 시간과 재주라 시도한 것들이다. 지금도 잘 쓰고는 있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전문가는 따로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것을 원하면 제값을 주고 맡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재주가 좋은 편이어서 평소 이것저것을 배워놨는데, 인테리어 쪽에서 활용 가능한 재주는 가죽공예와 목공이었다. 그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식탁, TV 진열장, 부엌장 등을 싹 바꿔 버렸고 그간 모아 놓았던 예쁜 소품과 그림들을 어울리게 놓았다. 돈을 많이 들인 인테리어는 아니었지만 직접 모든 가족들이 바꾼 집이라 더 애착을 두고 소중하게 쓰고 있다.

엄마가 붙여놓은 쮸카페 문패. by 박현주
엄마가 붙여놓은 쮸카페 문패. by 박현주

5개월 정도의 힘든 셀프인테리어 과정이 끝난 뒤, 우리 가족에게 남은 것은 같은 장소에 있을 때 일상대화가 더는 어색하지 않다는 것과 산책을 갈 때 서로를 찾는다는 것, 서로가 왜 기분이 언짢거나 우울한지 눈치챌 수 있는 것 등이었다. 계속 함께해야 하는 가족과의 관계가 불편할 때엔 본격적으로 함께 ‘일’을 만들어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함께 화분갈이를 한다거나 미루던 책장 정리 등의 작은 일이라도 말이다. ‘일’을 함께해야 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지내는 시간이 는다는 것은 ‘일’을 해서 그 ‘일’이 해결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함께 하는 이들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작년 문래동 작업실에서의 일이 늘자 나의 작업실은 ‘쮸 카페’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부모님의 데이트 장소로 가장 많이 쓰인다. 눈이 오거나 날이 맑으면 창밖의 풍경을 보며 커피 마시기에 딱 좋은 공간이다.

박현주

동양화, 판화를 전공하고 시각작업과 제작업을 하고 있는 박현주입니다. 실질적인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적절하고 적당한 영향을 주고받음을 목표로 합니다. 공동체, 비예술인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활동을 많이 합니다. 그러한 작업과 활동에 영향을 받아 창작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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