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와 출구의 분열 : 적절한 타이밍에 한 템포 쉬어가는 법

“만약 당신이 영어시험을 보았는데 망쳤다면, 당신은 영어 공부를 더 하겠습니까? 아니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의 대답은 어느 쪽인가?

“만약 당신이 영어시험을 보았는데 망쳤다면, 당신은 영어 공부를 더 하겠습니까? 아니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질문을 받자마자 난 고민 없이 후자를 택했다. 질문한 이는 웃으며 그럴 것 같았다고 답했다. 내가 그런 사람일 것 같았다고.

하하.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구나. 그때 과거 한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수능을 보기 닷새 전, 모의고사의 성적이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았던 날이었다. 성적을 한참 들여다보던 엄마는 날 꾸짖는 대신 미용실에 데려갔다. 기분전환을 하자면서. 이미 남다른 엄마에게 익숙한 나였지만 그래도 의아했다. 한 글자라도 더 공부하라고 하긴커녕 장장 4~5시간은 걸리는 파마를 해주다니. 이게 혼내는 방식인 건가 싶기도 했다. ‘가망이 없으니 그냥 놀기라도 하라’는 메시지인 건가… 여기서 아니라고, 공부 더 하겠다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기엔 나는 이미 들떠있었다. 찰랑찰랑 정돈된 새 머리를 갖게 된 것도 좋았지만 공부에 대한 생각을 잠시 쉴 수 있다는 것이 특히 좋았다.

시험을 망친 딸을 미용실에 데려가신 어머니

그렇게 며칠 뒤 본 수능에서 나는 평소보다 좋은 성적을 받아 원하는 대학에 갔다. 엄마는 나를 잘 알아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인생 레슨을 해준 것 같기도 하다. 제목은 ‘적절한 타이밍에 한 템포 쉬어가는 법’.

이런 생각이 드니 엄마가 가끔 하는 말도 떠오른다.

“힘주며 살지 마, 인생은 생각보다 그럴 가치가 없어. 즐기면서 살아도 충분해”.

당황스러운 말이다. 모두 힘든 것을 꾸역꾸역 참으며 살아가는데…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가며, N포 세대라고 불리며 살아가는데… 음.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것’이 정말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었을지. 7살이 되면 유치원에 가고, 초·중·고를 다니며 수능을 위해 살고,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자식을 키우고, 은퇴해서 그럭저럭 사는 거? 무엇을 원해서 이런 길을 고집하는 걸까? 아니면 이런 길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느끼는 건가? 하고 싶은 것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내가 들어간 길의 ‘입구’가 나의 의지로 선택된 게 아니라면 ‘출구’ 또한 제대로 성립될 수 없는 것 아닐까? 나의 입구와 출구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그것이 엄마가 내게 전하고 싶은 에너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삶의 입구와 출구를 내가 선택해야

그런 에너지를 기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택하는 게 편하고 안전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남들이 수학, 영어학원을 다닐 때 엄마는 내게 철학을 가르쳤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기르게 했고, 인생에는 수많은 입구와 출구가 있으며 어느 길로 갈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임을 배우게 했다. 정답을 찾는 삶보단 만들며 사는 법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엄마의 노력에 내가 잘 부흥하여 자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하거나 아쉬운 순간은 없다. 내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쉬고 싶을 땐 쉬고 걷고 싶을 땐 걷고, 너무 힘들다 싶으면 다른 길을 가보기도 하고. 그 길이 아니면 다시 돌아가도 좋고. 그냥 하루하루 주어지는 삶에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것. 영원이 아닌 삶이기에 지금에 집중하며 적당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건강하고 힘찬 에너지를 뿜어내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영어시험을 망쳤다면, 우선 날 위로하기 위해 노래방을 가서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영어시험을 보려고 하는지 다시 생각해볼 것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거나 걷고 싶은 길로 가기 위한 것이라면 엉킨 머릿속을 잘 정돈하여 다시 도전하면 되니 한 템포 쉬어가자고 다독일 것이다. 목표와 생각이 정리된 후에 보는 영어시험은 분명 잘 볼 거다.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성적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거다. 나의 선택에 충실했고 노력했다면 말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결과가 데려다주는 그 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순간들에 집중할 것이다. 어느 길이어야 한다는 답은 없으니까. 입구와 출구의 분열은 늘 일어날 수 있고 내가 기대했던 바가 아니더라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이 A+B=C는 아니므로. 스스로 선택한 순간들이 주는 답이 A+B-ㄹ+C=?인 삶도 또 다른 가치와 매력이 있음을 오늘도 마음에 새긴다.

이연우

생물과 무생물을 모두 좋아한다. 직업은 시각예술작가이자 출판/콘텐츠/문화기획자, 한마디로 프리랜서다. 독립출판물 가지가지도감과 장롱다방:대화집, 방산어사전 등을 엮었으며, 〈Portrait in Plastic〉과 〈정서적고향〉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동물권과 환경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고 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