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문학모임_일요 세미나(7월 모임 후기)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에 관한 잉문학모임이 2021년 7월 한달간 매주 일요일마다 오후1시 연구공간L 주최로 온/오프라인을 통해 진행되었다. 8월 모임에서도 『지각의 현상학』를 이어서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참여 문의: 010.2716.0746

잉문학모임 『지각의 현상학』_일요 세미나(online)

■커리큘럼 :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일시 : 2021년 7월 11일 (일요일) 오후 6-9시

■내용

  • 3부 2장 3절 ‘시간의 관념성’~ 강독(불 p. 474, 영 p. 414)
  • 4절 ‘시간은 존재관계이다’
  • “생기게 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음, 완전하게 구성되지 않음은 시간에 본질적이다. 구성된 시간, 전과 후에 따른 일련의 가능적 관계들은 시간 자체가 아니고 시간의 최종적 기록이며, 객관적 사고가 언제나 전제하면서도 파악하는 데는 실패하는 시간의 이행의 결과이다. 그것은 공간의 것이다. … 내가 이행이나 경과 자체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다른 시간, 즉 참된 시간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시간은 종합을 필요로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종합이 언제나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 사람들은 그 종합이 어느 곳에서 완성된 것이라고 가정하기 위해 시간을 부정한다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영원과 변화를 넘어서 ‘삶의 영원성’을 인식하는 것은 실로 철학자의 꿈이거니와, 거기에 시간의 생산성이 탁월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을 지배하고 포괄하는 바, 시간의 정립적 의식이 시간의 현상을 파괴한다. … 이제 문제는 태동하는 상태의 시간, 나타나고 있는 중의 시간, 시간의 개념에 의해 언제나 암시되는 시간,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의 차원인 시간을 해명하는 것이다.”(619-620)
  • 5절 ‘현전의 장, 과거와 미래의 지평들’(불 p. 475, 영 p. 415)
  • ‘현전의 장‘은 “우리가 미래가 현재와 가거로 미끄러져가는 것을 보는 곳이다.”(621) “후설처럼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도식으로 표상할 수 있거니와 완전하도록 하기 위해 예지의 대칭적 조망을 덧붙여야 한다. 시간은 줄(ligne)이 아니라 지향성들의 망(réseau d‘intentionalité)이다.”(622) * 7절 ’시간의 이행 자체에 의한 시간의 응집‘ – “새로운 현재는 미래에서 현재로의, 이전의 현재에서 과거로의 이행이다. 시간이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움직이게 되는 것은 단 한 번의 운동에서이다. … 결합된 현상들의 다수성이 아니라, 오로지 흩어짐의 단 하나의 현상이 거기에 있다. 동작이 그 동작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근육의 수축을 포함하듯이 시간은 그 자신의 모든 부분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적합한 유일무이한 운동이다.”(626)

■일시 : 2021년 7월 18일 (일요일) 오후 6-9시

■내용

  • 3부 2장 8절 ‘주체로서의 시간과 시간으로서의 주체’
  • 시간의 흐름과 공백: “단 하나의 밀기가 있을 뿐이고, 흐름 속의 단 하나의 누락[‘공백’이 더 올바른 번역임]이 뿜어내기를 끊기에 충분할 것이다. 강의 비유가 정당화되는 것은 여기서인데, 강이 흐르는 한에서가 아니라 강이 자신과 하나가 되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시간의 영속성의 이러한 직관은 공통감각에서 위태롭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을 주제화하거나 객관화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시간을 잃는[‘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629-630)
  • 시간과 주체성: “시간을 주체로서, 주체를 시간으로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백하게도 이러한 원초적 시간성은 외적 사건들의 병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건들이 상호 멀어짐으로써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유지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궁극적 주체성은, 시간적이라는 그 말의 경험적 의미에서 시간적이 아니다. 시간의 의식이 연속하는 의식상태들로 이루어진다면, 그 연속을 의식하기 위한 새로운 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하 계속 그러해야 할 것이다. 주체성은 시간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을 인수하거나 체험하기 때문이고 삶의 응집과 뒤섞이기 때문이다.”(630-631)
  • 9절 ‘구성하는 시간과 영원성’(불 p. 483, 영 p.422)
  • “시간의 종합은 전이의 종합이고 자신을 전개하는 삶의 운동이다. 그 삶을 체험하는 것 이외에 그것을 실현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시간의 장소는 없다. 자신을 운반하고 되받는 것은 시간 자신이다. … 시간은 자신을 다시 시작한다.“(632)
  • 열린 시간성과 열린 소통: “영원성이 뿌리를 가지는 그 각성의 시간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넓은 의미의 현전의 장, 즉 발원적 과거와 미래의 이중 지평을 가진 현전의 장, 그리고 기한이 찬 또는 가능한 현전의 장들의 열린 무한정성이다. …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의심의 여지없이 의사소통하는 것은 세계와 의사소통함으로써이다. 우리는 시간을 오직 전체적으로 보지하고 우리 자신에 현전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에로 현전하기 때문이다.”(632-634)

■일시 : 2021년 7월 25일 (일요일) 오후 6-9시

■내용

  • 3부 2장 11절 ‘시간성은 자기에 의한 자기촉발이다’(불 487, 영 425)
  • “시간은 자기에 의한 자기 촉발affection이다. 촉발하는 것은 미래로의 밀기와 이행으로서의 시간이다. 촉발되는 것은 일련의 전개된 현재들로서의 시간이다. 촉발하는 자와 촉발되는 자는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시간의 밀기는 현재에서 현재에로의 전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탈자성, 즉 불가분적 힘이 그 자신에게 현전하는 항에로 투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체성이다. … 주체성은 움직이지 않는 자기 동일성이 아니다. 주체성이기 위해 타자에게로 열리는 것,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시간에 본질적이듯 주체성에 본질적이다. 우리는 주체를 구성하는 자로서, 주체의 많은 경험들이나 체험들을 구성된 것으로 표상해서는 안 된다.”(636-637)
  • 12절 ‘수동성과 능동성’
  • “우리가 주체에 대해 말한 것 중에는 잘못된 어떤 것도 없다. 자기에 대한 절대적 현전으로서의 주체는 엄밀하게 말하면 거절될 수 없다는 것, 그 자신 내에 밑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는 어떤 것도 그에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연속과 다수성에서 자신의 상징을 스스로에게 제공한다는 것, 그 상징들이 자신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637)
  • 수동적 종합과 탈자성: “사람들이 수동성이란 부르는 것은 우리가 낯선 실재성을 받아들임이나 외부가 우리에 대해 작용하는 인과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 앞서 존재하는, 우리가 끝없이 반복하는,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둘러싸임이고 상황 속에 있음이다. 단번에 ‘획득된’ 자발성이자 그 획득에 의해 존재로 영속하는 자발성이야말로 정확히 시간이요, 주체성이다. 그것이 시간인 이유는 뿌리가 현재에 있지 않고, 따라서 과거에 있지 않는 시간은 더 이상 시간이 아니라 영원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 시간이 탈자성이고 현재와 과거가 이 탈자성의 두 결과라면 어떻게 우리는 시간을 현재의 관점에서 보기를 완전하게 멈출 것이며, 어떻게 우리는 비본래적인 것에서 단호하게 빠져나올 것인가 … 우리가 중심이 되는 것은 언제나 현재에서이고, 우리의 결단들이 나오는 것은 현재로부터이다.”(638-639)

연구공간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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