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자본주의(Affective Capitalism)

최근 정동(affect)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데, 그것은 자본주의가 정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플랫폼을 통해서 정동을 활성화하여 부수적인 이득을 얻으려 하는 최근의 상황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정동을 탐내는 자본주의를 채굴자본주의, 추출자본주의, 정동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 등으로 부른다.

정동(affect)에 대한 논의가 최근 활발한데, 그것은 자본주의가 정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플랫폼을 통해서 정동을 활성화하여 부수적인 이득을 얻으려 하는 최근의 상황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정동을 탐내는 자본주의를 채굴자본주의, 추출자본주의, 정동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 등으로 부른다. 여기서 정동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는 기쁨, 슬픔, 욕망과 같은 것이고, 지도그리기가 가능한 감정유형이다. 특히 플랫폼에서 정동은 인기, 재미, 흥미, 운, 활력, 기쁨 등의 양상을 띤다. 이렇듯 정동은 자본주의에게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주는 원천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정동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소비로 귀결시키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한다. 일단 자본주의는 정동이 갖고 있는 횡단하고 이행하는 흐름을 상품소비로 집중시키고 수렴시키려는 시스템을 설립하려고 한다. 그것은 정동의 “~이거나~이거나”라는 지도화를, 상품소비의 “~은 ~이다”라는 의미화로 환원하는 과정이다.

정동은 관념과 관념, 표상과 표상 사이에서 코드변환을 할 때 발생된다. 내가 “이것은 책상이다”거나 “이것은 의자다”라고 할 때는 정동은 발생되지 않지만, “책상 옆에 의자를 두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코드변환을 할 때 정동은 발생한다. 또한 정동은 꼼짝 안할 때의 마음인 감정, 환상, 망상과 달리 움직일 때의 마음이다. 즉, 자기원인을 가지면서 닦고 정돈하고 아끼고 보살필 때의 마음이 정동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동은 돌봄, 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과 동의어이다. 문제는 정동의 자기원인이 바로 다시 정동이라는 점에서 무한한 증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 유한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내면적으로 감정소모가 많은 감정노동을 염두에 두는데 반해, 사랑이 무한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사랑할수록 사랑의 능력이 증폭되는 정동노동을 염두에 둔다. 이는 사랑이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고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가정과 사회에서는 정동적 평등의 입장에서 모든 사람이 정동에 참여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젠더불평등에 따라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정동적 평등의 입장에서 성-역할 전부를 해체하고 모두가 정동의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돌봄노동과 관련된 논쟁에서 돌봄의 사회화가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주장은 일면 타당하지만, ① 돌봄노동자들의 정동의 가치를 제대로 보상하고 있지 않는 현실과 ② 여전히 젠더불평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 ③ 정동노동을 감정노동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정동의 오래된 지혜와 긍정적인 힘을 돌봄의 사회화 국면에서 어떻게 현대화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동은 사물의 곁, 가장자리, 주변에 서식하고 있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에, 본질을 적시하는 의미화가 불가능하다고만 간주되었다. 즉, “책상은 내거다”라는 소유권의 의미화방식과 달리, 책상을 정돈하고 닦고 아꼈던 정동은 의미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평가절하가 되기 일쑤인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정동의 강렬한 가치, 즉 욕망가치에 대한 논의는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급’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기본소득의 논의까지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돌봄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아이나 광인, 노인조차도 학습노동, 정상화노동이나 욕망노동을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수자들은 첨단 기술사회의 기계류를 만들 집단지성과 생태적 지혜의 성숙에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고 있다. 첨단기술사회인 정동자본주의의 개막은 오히려 강렬한 정동의 가치 즉 욕망가치의 현존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차별 없는 보편적 기본소득이 정당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정동은 첨단기술사회에서 인공지능이나 기계류가 아닌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역량으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동시에 정동은 커먼즈(Commons)에 기반한 공유사회를 이룩할 인류의 오래된 지혜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정동은 인류의 사랑이 넘치는 미래를 약속하며, 지속가능성의 기준이 되는 삶의 필수요소인 셈이다.

생태적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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