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비자림을 통해 본 나무의 미학적 시간 – 임지연 박사와의 인터뷰

제주도 비자림을 통해 본 나무의 미학적 시간 – 임지연 박사와의 인터뷰

2019년 3월 23일 다시 제주 비자림로 확장공사가 개재되었다. 제주시가 구좌읍 송당리 인근의 나무 300그루를 벌목하기 시작하면서, 시민단체와 주민들의 항의와 시위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비자림 개발 사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리고 나무가 가진 미학적 의미를 들여다보기 위해 독일근대미학을 전공한 임지연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신승철 : 임지연 박사님, 안녕하세요? 생태미학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연구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학자로서 생태에 관심을 갖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임지연 : 독일근대미학 중 셸링의 시간론으로 학위논문을 썼습니다. 그의 철학에서는 ‘절대자’ 개념이 핵심인데 그것을 다른 말로 풀자면 ‘근원적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생태미학에 대한 정의가 따로 필요한데, 일단 저는) ‘생태미학’이라고 해서 따로 연구하지는 않고요, 셸링의 근원적 생명력 개념을 중심으로 모든 존재를 통합적으로 보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신승철 : 근원적 생명력이라는 개념이 참 심오하군요. 나무를 살아 있지 않다고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사실, 저희가 쓰는 책상도 살아 있던 나무의 부산물입니다. 나무는 왜 진화의 최상위 단계에서 제자리에서 머무는 여행을 선택했을까요? 왜 사람들은 나무를 생명이라고 인식하지 못할까요?

임지연 : 세상만물 중 생명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물며 무기물이라도 존재하는 한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간주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가시적 현상으로서는 물리적으로 딱딱하고 죽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관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나름의 독특한 삶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바라본 나무는 잠깐 스치는 풍광에 불과하겠죠.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의 입장에는 오히려 달려가는 자동차가 잠깐 스치는 존재이겠고요.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은 ‘죽은 것’이나 ‘장애물’이라 생각하기 쉽죠.

  • 세상 만물 중 생명력 없는 것은 없어
  • 가시적으로는 딱딱하고 죽어있는 것도 존재론적으로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있어

신승철 : 나무가 이룬 숲이 주는 생태계서비스의 역할에 대해서 둔감한 것 같습니다. 그저 당연하고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구성하고 창안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네요. 개발주의, 성장주의, 성공주의 맥락이 지배하던 고속성장을 자랑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생태주의 논의는 아직 답보상태인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임지연 :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2010년 문수스님이 소신공양을 했던 일이나, 2014년 평창 가리왕산 벌목, 2018년 제주도 비자림로 벌목 등은 우리 사회의 성장주의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해요. 생명의 시각에서 보자면 1그루를 자르든 100그루를 자르든, 개발을 위해 나무를 자른다는 일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사건들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것인데, 개발이익 등으로 인한 외부효과는 지속가능하지 않음에도, 그에 대한 ‘환상’이 우리 사회의 가치관으로 작동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 생명의 시각에서는 1그루냐 100그루냐는 차이가 없어
  • 문제는 그러한 사건들이 “왜 일어났는가?”이다

신승철 : 그 외부효과라는 것이 결국 책임지지 않는 건설자본의 상황을 만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개발이익이라는 단기이익은 결국 미래세대에게 전달되어야 할 생태적 가치, 보이지 않는 가치 등을 묵살하면서 지속가능성을 억압해 왔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다시 자동차 이야기로 돌아가서 풍광으로서의 숲을 생각하는 방식이 갖는 환상은 무엇일까요?

임지연 : 기계문명 속에서 속도체험은 일종의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집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밖을 보는 한, 그러한 체험은 굳이 제주도에 가지 않아도 대도시에서도 똑같이 겪을 수 있는 일이에요. 문제는 이러한 기계문명으로 인해 우리의 시간경험이 단조롭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또 그렇게 시간경험이 단조롭게 될수록 존재의 다양한 입장들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줄어들게 되죠. 개별자들의 삶은 각자의 주관적인 시간으로 펼쳐진다고 할 수 있는데, 수치화된 기계의 속도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하게 되면,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삶은 그저 낯선 것,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종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다양한 시간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개발 현장은, 시간의 주관성으로 보나 객관성으로 보나 비상식적인 게 사실이에요. 먼저 객관적으로, 자동차로 20초를 빨리 가기위해 100년 많게는 300년 된 나무들을 자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과연 수 십 초를 위해 수 백 년을 포기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시간의 주관적 다양성까지는 보지 못한다고 해도, 20초와 300년은 객관적으로 어마어마한 차이 아닌가요?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 아니었나요? 우스운 반문이긴 하지만, 우리 현대인에게는 나무의 시간보다 자동차의 시간이 중요해진 것이죠. 가리왕산은 조선시대 때부터 산림 보호구역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자동차의 시간이 보다 중요해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수 백 년 간 지켜온 나무의 시간 정도는 포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정말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숲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속도가 ‘평균적으로’ 높아지는 동안, 사람들의 시간체험 역시 모듈화되고 단순화됩니다. 물론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면 특별히 할 말은 없습니다. 시간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거기까지 가기 전에 일단 눈앞에 있는 객관적인 숫자만이라도 제대로 보았으면 좋겠어요. ‘20초’를 ‘줄이기’ 위해, ‘300년’ 된 나무를 ‘190억 원’을 ‘지출하여’ ‘베어내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는 걸까? 시간을 줄이기 위해 엄청나게 큰돈을 역시 시간을 없애는데 써 버리는 일, 소비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줄이고 없애고 써버리면서 자본의 이익이라는 ‘환상’을 낳는 것이고요.

  •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간 개념
  • 비자림 숲이 자동차도로를 위해 베어진다는 것은
    생명이 갖고 있는 시간의 상상력을 파괴하는 것과 같아

신승철 : 지금-여기의 시간이 실존의 시간으로서 의미를 갖지만, 자본에게는 일회용품과 같이 찰나에서 소모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본은 시간을 분해해서 욜로(YOLO)와 같이 찰나만을 즐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존의 시간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현존 문명에서 일회용품의 현존은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이 얼마나 찰나에서 소비되고 소모되어야 할 것으로 비하되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가 아닐까요?

임지연 : 삶을 즐기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다만 ‘지금-여기’의 실존적 삶을 일회용품과도 같이 ‘즐겁게’ 소비하도록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문제이겠지요. 삶의 시간에 깃들 수 있는 즐거움이 표층만을 부유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인데, 역시 그래도 전혀 상관없다면 정말 할 말은 없습니다. 시간은 줄어들고 각자의 삶도 표층을 떠돌고, 그러면서 다양한 시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뎌지고, 그러한 무뎌짐 속에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여러 존재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냉담해지고, 그러다 보면 결국 우리 문명도 그만 종말을 고하겠지요. 시간의 다양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그 다양성 속에서 펼쳐지는 자신의 시간도 포기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어떤 교육이나 이론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되어도 괜찮은지 스스로 자문해 보는 일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승철 : 실존이 갖는 유한성, 무상성, 전락성 중에서 저는 전락성에 대해서 주목하게 됩니다. 문명이 바닥까지 떨어질 때 놀랄 만한 주체성 생산의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까지 괜찮아”라고 하면서 마치 물이 천천히 데워지는 그릇에 놓인 개구리처럼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저성장을 넘어서 탈성장으로 향해야 하는 도상에 놓여 있습니다.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생태계위기는 우리의 목전에 다가와 있습니다. 저는 ‘더불어 가난’에 대해서 주목하게 됩니다. 함께 가난해지는 탈성장의 패러다임이 나누며 공유하며 관계의 씨줄날줄을 다시 짤 수 있는 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지연 : 개별자의 삶은 몸을 기초로 출발하고, 기술은 그 몸의 고통을 줄이려는 쪽으로 전개되어 왔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유무형의 고통을 생각하면, 개발과 성장의 논리 역시 우리 삶의 역설적 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겠어요. 다만 이제는 개발과 성장 이외의 것,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상상하고 고안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봐요. 이반 일리히 역시 문명 발전의 두 단계를 언급하며, 초기의 긍정적이라고 할 양적 성장 다음에는 반드시 그로 인한 폐해가 발생하니, 이때에는 잠시 멈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죠. 이러한 멈춤과 물음에는 일종의 문명사적 혹은 실존적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더불어 가난’도 그 일환이라 보이고요. 문명의 극단적 발전 국면에서 기꺼이 스스로 ‘텅 비도록’ 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도록 몰아세우는 사회구조 속에서도 ‘소유’ 이외에 다른 삶의 양식을 고민해볼 태도가 되어 있는가?

신승철 : 혹자는 숲과 같은 자연과 생명은 미학적으로 완성되어 있다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자연생태는 재특이화 과정 즉 예술 활동을 통해서 발명되는 것이어야 한다고도 봅니다. 재발견과 재발명 중에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조금 헛갈리는 상황이기도 한데요, 그렇다면 생태예술의 새로운 도전은 어떤 유형의 것들인가요?

임지연 : 작년 참여했던 제주도 워크숍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네요. 환경운동가, 예술가, 예술치료사, 미학이론가가 모여 ‘생태예술네트워크’를 구성해서 진행했던 워크숍 중 하나였는데, 제주도 사려니 숲에서 ‘되기-놀이’를 기획하여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나’라는 정체성 혹은 다른 말로 ‘나’를 구성하는 내외적 관계들을 재배치 해보기 위한 목적에서, ‘나무되기’, ‘네 발로 걷는 동물 되기’ 등의 활동을 했었어요. 그때 확인했던 것은 그동안 ‘나’라는 관념적 틀에 스스로가 너무 많이 갇혀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족, 친구, 직장, 혹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이나 규칙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내 몸이 말하는 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단 하나의 배치관계가 정해지면 그 틀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나마 기존의 배치관계를 뒤흔들어서 그 틀에 ‘약간이라도’ 결절을 내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발견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조직해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러한 재배치의 가능성을 예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이론적으로 정리하고만 있었던 ‘예술의 가능성’이란 말을 직접 체험한 것이기도 했어요. 새로운 위치 짓기, 시각의 전환, 관계망의 새로운 조직, 이 모두 ‘예술’이라는 활동으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물론 ‘그럼 도대체 예술이 뭐냐’, 라는 물음은 따로 논의해야 하겠지만요.

독일근대미학을 전공한 임지연 박사
독일근대미학을 전공한 임지연 박사

신승철 : 비자림이 지구의 공동재산이라면, 그 미적 가치, 경관적 가치, 보이지 않는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지구상에 가치 없는 나무는 없다”라는 구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임지연 : 시간과 자본의 추상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대목인데요, 비자림 나무들의 수명이 100년, 300년이라고 하지만, 막상 우리에게는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2천억 원의 개발이익이라는 것도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냥 숫자에 불과하거든요. 둘 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 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돈은 손에 잡힐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지구상에 가치 없는 나무는 없다’는 말에서 ‘가치’는 나무의 역사와 시간에 부여한 가치일 텐데, 개발하자는 입장에서는 그런 정도의 가치는 ‘자본의 가치’로 대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비가시적 가치를 가시적 가치로 전환하자는 것까지는 이해해 준다쳐도, 막상 자본의 가치 역시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이라는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 입장을 철저히 따라서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적으로 전환되었다고 해도, 그 돈이 내 주머니로 돌아오지 않는 이상 전혀 실질적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돈만큼 실질적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내재화되어 있어 그에 동조하는 것이죠. 원칙적으로 가치관의 우열을 나눌 수는 없겠지만, 자본주의의 극단 국면에서는 모든 가치들이 자본을 최상위에 두고 재편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을 설득하기 가장 좋은 구실은 돈입니다.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결국 그것이 돈이 되는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것이죠. 우스갯소리처럼 하자면, 공부를 하건 노래를 하건 그걸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느냐, 그래서 건물주가 될 수 있느냐로 우리의 모든 활동을 판단하는 경향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과연 우리 삶에서 ‘좋은 것’이란 뭔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고, 비가시적인 좋은 것들이 자본의 힘 속으로만 매몰되지 않도록 시야를 넓히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무의식을 전환하는 일이기에 자기 실존의 완전한 전환 내지 거듭남이라고도 할 종교적 회심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 삶의 양식이 자본의 힘에 움직인다는 전도된 생각
  • 과연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 필요

신승철 : 개발주의와 성장주의에 대한 생태미학적 해독제는 없을까요?

임지연 : 줄곧 이야기 해왔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물음이고, 그것도 그냥 묻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묻기’가 필요합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진지하게 묻고 그것을 꿰뚫어 보려는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우리 인류가 역사 이래 줄곧 물었던 물음이지만, 이러한 묻기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정해진 대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물음을 던지는 활동 자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음 던지기는 소유에서 벗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고 스스로를 미래로 여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물음을 던지는 동안 자아는 과거를 한 지점으로 삼아 그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로 스스로를 개방시킵니다. 스스로 묻는 행위의 바로 그 현재 자리에서 과거와 미래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라 하겠고, 따라서 묻는 자의 내면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존재의 역사를 하나로 아울러 헤아리게 됩니다. 나아가 그렇게 우리내 존재의 역사를 철저하게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목숨을 받아 삶을 살아 내야 하는 모든 존재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생겨납니다. 자기 삶이 무엇 때문에 힘든지, 자신에게 무엇이 고통인지,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없다면 지구 생태계의 위태로운 현실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연약함, 불완전함, 고통을 직시하는 일, 나아가 이러한 고통은 곧 지구 생태계의 모든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존재의 역사를 아는 일은 곧 고통에 대한 감수성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신승철 : 마지막으로 숲이 미래세대에게 어떤 미적 의미를 지닐까요?

임지연 :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확정되던 해에, 독일 뮌헨에서는 시민들이 축제를 엽니다. 유치를 반대했던 시민들이 축제를 연 것이죠. 또 2022년 동계올림픽에 스웨덴은 의회의 반대로 유치 신청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도 주민투표를 실시해 2028년 개최지 유치를 무산시킵니다. 17일 간의 올림픽 기간 이후에도 일상의 시간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라 생각해요. 우리도 이제는 개발이익이 주는 환상 속에서 벗어날 시점에 와 있고, 자본의 추상성 속에서 허우적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과 역사에 대한 상상력의 폭을 넓혀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지구 탄생 46억 년, 우주 탄생 138억 년, 이 시간대 위에서 우리는 지나 온 과거만을 볼 수 있을 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공간적으로는 앞을 보면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을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는 실상 미래를 등 뒤에 대고 나아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어요. 뒤로 걸으며 나아가는 길은 대단히 조심스럽고 위태롭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미래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불안감을 어설픈 환상으로 대체하는 어리석음에서 이제는 마땅히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개발이익의 환상 속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민감도를 높여야
  • 존재의 역사를 깨닫는 것은 곧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것

신승철 : 오늘 제주 비자림로 개발과 관련해서 임지연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숲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미적 가치, 그리고 나무가 던지는 시간의 상상력 등에 대해서 얘기해 봤습니다. 제가 본 동영상에서 제주도의 비자림로 개발에 맞서 시민과 예술가, 활동가 등이 나무를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더불어 숲’이 갖고 있는 오래된 꿈과 시간의 상상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사합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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