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⑳ 혁명(revolution)인가? 역행(involution)인가?

미래에 도래할 혁명에 대비하여 혁명은 이미 도처에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가타리의 낙관적 입장을 소개한다. 그러나 그 혁명의 모습은 지구의 한계, 생명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직시한 역행의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명나라 철학자 이탁오의 주장처럼 “아이가 되기 위해 공부”한다는 이 글은, ‘아이되기’가 왜 진보의 선형적 세계관을 넘어 생태위기 속에서 지금 당장 행동할 수 있는 사유로 이어지는지 설명하고 있다.

아이되기의 시간

아내와 함께 살면서, 저는 아이가 된 적이 참 많습니다. 아이처럼 토라지기도, 짜증내기도, 떼를 쓰기도, 장난하기도, 음성변조하기도, 몰래 숨기도, 춤을 추기도 많이 했지요. 아내에게 저는 고양이들과 동급이지만, 말을 하는 동물이나 아이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귀여움을 대가로 무한한 보살핌을 받는 대상이랄까요? 다른 분들도 저처럼 아내 앞에서, 애인 앞에서, 여자 친구 앞에서 아이가 된 기억이 꽤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아이되기는 역행의 시간과의 접속입니다. 오늘 할 이야기가 아이되기에 대한 부분이라서 그것을 염두해 두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되기는 유치해지고 유아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됨으로써 부드러워지고 발랄해지고 용감해지고 모험심 넘치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유치한 것은 오히려 어른들의 질서이지요. 문명은 성인-남성-정상인들에게 유아적이고 유치한 틀을 부여하고 있어서, 그 안에서 무언가 기득권만 조금 생기면 잔뜩 무게를 잡고 유치하게 굴지요. 이를 테면 상사들과 함께 하는 직장회식 자리를 살펴보면 마치 골목대장 놀이를 하는 것만 같지요. 반면 아이들은 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그런 주체성입니다.

저는 아내와 연애할 때, 아이 캐릭터들을 잔뜩 개발해서 각 상황마다 한 아이씩 출현을 시켰지요. 각각의 특성을 갖고 있는 아이들은 해당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곧장 사라졌습니다. 그중 한 아이의 캐릭터는 아내에게 높은 점수를 받아서 현재까지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노래하고 춤추는 재기발랄한 아이지만, 그리 착하지 않은 아이라서 요행을 바라는 측면도 갖고 있고, 약간 머리를 잘 굴리면서 요리조리 피하기도 잘 하고, 변명과 거짓말에 능한 그런 캐릭터입니다. 처음에는 무척 착하고 순수한 캐릭터도 많이 등장했지만, 그때마다 아내의 반응이 신통치 않아서 새로운 캐릭터 개발에 열중하다 급기야 현재의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를 질투해서 납치사건을 벌이고 “이 녀석을 다시 보고 싶으면 양반김 한 박스를 가져와라”라는 메시지를 아내에게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이 문제의 인질범 캐릭터를 영구추방하고 아이 명단에서 배제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순전 실험이며, 예술이며, 재미를 위한 장난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그러나 분명 아이되기는 반문명주의, 반문화주의라는 역행의 시간과의 접속의 철학이 담겨 있었지요.

도래한 미래, 돌발적인 미래

색다른 미래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아이들이 만들 미래임에는 분명합니다. 사진출처 : getarchive

미래를 생각하면, 유토피아(Utopia)가 먼저 떠오릅니다. 유토피아의 유(U)의 의미는 없다(no)라는 뜻이고 토피아(topia)의 의미는 어디에(where)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없는’(no where)이라는 희망과 지향성으로서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칭타칭 혁명가 K씨는 유토피아적인 미래가 돌발적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친구였습니다. 그의 생각 속에는 현재의 다양한 잠재적인 것들과는 무관한 미래가 펼쳐집니다. 그는 갑자기 습격이나 돌발 사건처럼 미래가 도래할 것이고, 그것의 메시아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면서 자신이 비루한 일상을 살고 있는 이유는 다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혁명이 한 큐에, 단방에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는 과격한 모험주의를 보여주는 인물이었었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대놓고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의 생각대로 하면 폭력혁명이나 무장투쟁과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걱정이 들었습니다. 혁명적 유토피아는 여전히 우리 삶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혁명의 순간이 있을 수 있을까? 오히려 혁명은 도처에 내재해 있고,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그때 품었지요.

프랑스 심리치료사 펠릭스 가타리는 “혁명에 관한 한 나는 낙관적이다. 혁명가도 없고, 혁명운동도 없지만, 도처에서 혁명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을 하자는 것이다.”라는 묘한 아포리즘을 남겼습니다. 그의 말처럼, 도처에서 서식하고 잠재되어 있고 내재한 혁명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혁명적 유토피아주의와 손을 끊는 색다른 혁명임에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삶에서 생활에서 일상에서 진행되는 혁명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한 혁명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라, 현재에 잠재되어 있고 내재해 있는 미래, 즉 아이들의 미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 하겠다”라고 나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혁명이라는 돌발적이고 어디에도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no where’의 단어의 배열을 바꾼 ‘now here’, 즉 지금 여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고 보살피던 사람이 지구의 미래와 자연과 생명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이나 배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여기의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미래의 자연, 생명, 생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아이들이 이미 도래한 미래라는 주장은 여기서 나옵니다. 돌발적이고 사건적인 혁명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래하고 잠재되어 있는 미래를 북돋고 보살피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혁명가는 남성-정상인-성인의 형상을 가진 노동자가 아니라, 바로 옆에 우리를 돌보고 보살피던 주부라는 생각도 듭니다.

역행, 추첨제 민주주의의 진실

최근 생태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접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면서도 생명 위기 시대에 직면해서 대처할 수 있는 정치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추첨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 그 중에서도 추첨제 민주주의를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논증과 추론능력을 가진 엘리트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전제되고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누가 대표나 관료가 되느냐의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가위바위보, 제비뽑기를 통해서 대표나 관료를 뽑았던 것입니다. 결국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서는 감각과 지각능력을 가진 모든 존재 – 그가 아이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에게 모두 진실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관철됩니다. 물론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여성과 노예를 배제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또한 전쟁이나 폭동 등 유사 시기 동안은 독재유형의 정치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현재 생태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큽니다.

생태민주주의의 원형이 되었던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 즉 추첨제 민주주의를 극도로 싫어했던 철학자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현존 아카데미의 원형을 제공했던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정치가 사실은 이집트 파라오라는 절대왕권을 흠모한 결과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전제되어 있다는 추첨제 민주주의의 근거를 철저히 부정하며, 현실의 감각적인 세계로부터 분리된 이상적인 질서 즉 이데아의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데아의 질서에 접근하려면 논증과 추론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단언했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비난하고 평가절하하면서, 현존 아카데미의 반동성, 보수성, 권력지향성의 토대를 만들었던 장본인인 셈입니다. 그 플라톤이 가장 존경한 인물이 소크라테스이고 소크라테스의 애제자가 바로 플라톤입니다. 그런 점에서 왜 아테네가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줄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정황증거 역시도 드러납니다. 즉, 그가 소피스트의 대변인이거나 청년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적이고 반동적인 질서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생태민주주의는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전제되어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진리를 알고 있다”라는 말을 하면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사실 계몽주의적 교육전통은 아이들은 모르며, 논증과 추론 심지어 상상력까지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계몽주의를 떠받치는 것이 보편주의 어법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될 수 있는 보편주의 어법이나 논리, 추론이 있어서, 이를 학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뭔가 변함없이 올바른 것이 있고, 그것을 배워가는 것이 교육이라는 관점이지요. 그러나 보편주의 어법은 무장소성, 무시간성, 무역사성을 특징으로 하는 지식권력의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어법을 사용하는 계몽주의는 결국 강권, 훈육, 통제, 감시, 규율 등의 행동방식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아니라고 말하면 어거지로 때려서라도 그렇다고 말하게끔 만드는 권력이 숨어 있는 셈이지요. 결국 지식권력 즉 앎의 의지가 권력의 의지라는 미쉘 푸코의 통렬한 지적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그것이 끔찍한 수용소와도 같은 의무교육의 진실인 셈입니다.

이탁오의 동심설

“아이가 되기 위해서 공부한다”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중국의 양명학자이자 명나라 사상가였던 이탁오(李卓吾)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동심상실의 문명에서 동심회복의 문명으로 가야 한다고 역설했지요. 즉, 들뢰즈와 가타리가 발전시킨 아이되기 사상은 이탁오로부터 그 원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탁오는 참된 마음은 아이의 마음이라고 말하면서,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공부의 목표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단적인 사상으로 인해 감옥에서 비명횡사했는데, 그가 남긴 명언들은 후대에 길이 남아서 후학들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그는 동심설(童心設)을 창안하기 전까지 유학자로 살았던 과정을 다음과 같이 통렬히 반성합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에 있는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 짖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가 짖은 까닭을 묻는다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라고 말입니다.

몇 년 전 저는 이탁오의 글을 보고 무릎을 탁 치며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이의 마음이 되기 위해 공부하자!”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습니다. 온갖 화려한 논증과 추론, 프로그램으로 세상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으며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보편주의 어법의 논리에 빠져들지 말고, 삶과 일상의 내재성이 말하고 있는 색다른 문제제기, 즉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그때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글은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개념실재론처럼 개념이 살아 있는 것처럼 등장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멈추게 하기도 하고, 논증적인 글쓰기의 흔적이 너무 강해서 여전히 생각을 많이 해야만 겨우 이해할 수 있는 글들입니다. 그러나 저의 신조는 “아이가 되기 위해서 공부한다”라는 지점으로 향하고 있고, 글쓰기는 그러한 과정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시대의 이단아 이탁오를 받아들인 후학 중 우리가 잘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홍길동전을 쓴 허균입니다. 홍길동전은 이탁오의 동심설의 조선 후기 판타지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길동전 중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아이가 등장하여 신통방통한 도술로 저항의 도주선을 그려내서 결국 율도국이라는 유토피아로 향하는 여정이 쓰여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본 허균의 생각들입니다. 그 소설에는 동심설이 갖지 못한 다양한 아이들의 마음의 요소들이 숨어 있습니다. 저는 허균의 홍길동전을 보면서 용감하고 모험심이 강하고 횡단하고 도주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현존 문명에 파열음을 내고 저항하고 도주하고 창조하는 색다른 미래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아이들이 만들 미래임에는 분명합니다.

68혁명의 반문명주의

68혁명 시기 동안 반문명주의, 반문화주의, 생태주의, 히피 등의 집단들이 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진 출처 : Najda

“상상력에게 권력을”, “금기를 금지하라”, “노동하지 말라” 등 68년 혁명의 슬로건은 문명의 내부에 잠복해 있었던 욕망이 발언하기 시작한 국면을 느끼게 합니다. 욕망이 발생할 때 모든 기존 체제와 시스템은 문제시됩니다. 왜냐하면 욕망이 “네가 원하는 게 뭐냐?”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욕망의 주체성은 단연 아이, 동물, 광인, 소수자, 청년 등이었습니다. 가장 시스템이 안정화되었다는 유럽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 욕망해방, 소수자의 혁명 등이 발발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반란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질서에 속한 좌우파라는 정치세력이나 노동과 여가의 따분한 반복에 대한 아이들의 전면적인 저항이었습니다. 그래서 68혁명 시기 동안 반문명주의, 반문화주의, 생태주의, 히피 등의 집단들이 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고 68년 혁명은 녹색당이라는 대안세력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반문명, 반문화 사상에 대해서 기성세대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으로 여기는지는 분명합니다. 문명이 갖고 있는 보편주의 어법과 계몽주의, 훈육과 통제의 그물망 등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68혁명의 반문명 사상은 아이들이 갖고 있는 역행적인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아이되기를 더 급진화하다보면 반문명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어른들의 질서에 대한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반란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현재진행형 혹은 미래진행형적인 과정에서 아이들의 반란은 도처에서 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68혁명 이후부터 청년세대를 무력화하기 위한 문명 전체의 시도와 기획이 작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최근에는 청년들이 일자리, 소비, 생산 등에서 완전히 배제되다시피한 상황입니다. 그것은 아이와 근접해서 언제든 아이되기를 할 수 있는 청년세대의 위험성을 68혁명 시기 동안 자본주의가 이미 겪었기 때문에, 청년세대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분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혁명인가? 역행인가?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1993, 솔출판사)에서 말하는 미래는 돌발적으로 찾아오는 것이었고, 그래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꾸는 사람은 메시아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미 도래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자연과 생명, 아이로 향하는 역행은 바로 이미 도래한 미래에 대한 접속과 같은 수준의 놀라운 사건입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진보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생각함으로써, 미래를 미지의 사건이자 모든 것의 해결책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일이 되면 뭔가 바뀌고 해결책이 생기겠지, 하는 나이브한 생각이 지배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지구의 한계, 생명의 한계, 인간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오늘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내일 마치 몸에 털이 자라듯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문제점이 많은 생각입니다. 미래는 이미 도래해 있지요. 지금처럼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면 미래의 지구의 모습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처럼 자원을 펑펑 쓰면 미래에는 어떤 현실이 기다릴지는 분명합니다. 지금 준비하지 않고 지금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으면, 미래는 어둡고 암울합니다.

그런 점에서 역행의 방법론은 문명이 갖고 있는 유한한 시간의 지평을 밝히는 유력한 방법입니다. 역행은 바로 아이되기를 통해서 미래의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도래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래해 있는 미래와 접속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은 퇴행이 아니냐며 진보에 대해서 옹호하기도 합니다. 퇴행은 이미 도래한 미래세대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억압하는 현존 문명의 모습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미래세대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을 배우려는 태도가 역행입니다. 진보의 선형적인 세계관이 능사만은 아닙니다. 진보는 유한에서 무한으로 시간이 미지의 것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향할 것이라는 낙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 다가올 것이라는 예감이나,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한에서 무한으로 향하는 돌발적인 사건의 시간은 지구라는 유한한 시공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행(involution)은 미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 패러다임을 전환시킵니다. 낯설고 새롭고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미지의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과 설렘만 가지고는 기후변화와 생물 종 대량멸종, 인류의 멸종 가능성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현 시점에 대한 해결책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지요. 우리는 가까이에 그리고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아이라는 이미 도래한 미래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게 역행적 시간관을 가질 때, 우리는 놀랍고 색다른 현실진단의 단초를 마련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생각이 저의 아이되기에 대한 철학의 전모입니다. 물론 아이되기가 이루어지는 연인과 아내와의 만남의 달콤함은 엄청난 웃음과 해학, 낙관주의를 만들어내지요. 도래한 미래로서의 아이들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의 달콤함이 미각을 감도는 오후입니다.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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