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⑱ 아이들은 어떻게 놀이를 할까?

“~은 ~이다”라고 고정된 의미로 단정내릴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과 제도, 관료시스템에 얽매여 있는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외부를 보지 못한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의미와 재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특히 아이들처럼 놀이의 활력과 에너지가 이 단조롭고 비루한 일상을 만드는 문명의 해독제가 될 것이라 제안한다.

놀이터에서 사라진 아이들

어제는 저녁 11시 넘은 시간에 아파트 놀이터에서 어떤 중학생이 줄넘기를 하였습니다. 저희 집이 1층인 터라 한여름 밤의 휙휙휙 팔딱팔딱팔딱하는 그 소리가 고스란히 베란다를 넘어서 방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잠에 막 들려는 상황이었는데 깨어나서 놀이터를 유심히 살펴보았지요. 아마 늦은 시간까지 게임을 하다가 운동을 나왔나 봅니다. 최근 아파트 놀이터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미세먼지와 무더위로 인해서 사람들이 전혀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뿐 아니라 주택가의 아이들까지 모여서 시끄럽게 놀이를 했지요. 공, 줄, 미끄럼틀에서 꺄르르 웃으며 달려 다녔지요. 시끄럽지만 활력이 넘치고 난리법석이지만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지요.

오늘은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합니다. 놀이하면 아이가 먼저 떠오르는데, 아이들보다 놀이의 특성을 잘 보이는 것이 동물들 그중에서도 어린 동물들이기도 합니다. 북극에서 촬영된 영상 중에서 개가 줄에 매어져 있는데, 굶주린 북극곰 한 마리가 접근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그 개는 죽겠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북극곰이 으르렁거리는데도 개가 장난을 거는 겁니다. 그러자 북극곰과 개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동안 장난에 몰두합니다. 그 후로 북극곰은 여러 번 다시 찾아와서 개와 장난을 쳤다고 합니다.

어릴 적 저에게는 모든 것이 장난감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들이며, 산이며, 돌이며, 줄이며, 나무조각이며 모두 게임기능이 장착되어 있는 것처럼 여겼던 적도 있습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비석치기, 공치기, 오징어, 얼음땡 등 공터만 있으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이에 전념했습니다. 저는 집에 있는 모든 종이를 딱지를 만드는 데 사용하다가 어머니께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딱지 한 무더기를 따서 가지고 오면 얼마나 배가 부르고 뿌듯한지 몰랐습니다. 물론 놀이에도 이기고 지는 승부가 있고,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놀이에 있는 금은 금기나 터부, 사법적 처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살짝 밟고 지나가도 발견만 되지 않는다면 요행히도 놀이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한 놀이에서는 죽었다 살았다라는 죽음과 삶의 경계가 놓여 있었지만, 그것은 진짜 죽음이 아니었고 놀이의 설정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부활은 늘 놀이 안에서 가능했지요. 그러한 많은 아이들은 모두 골목에서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텅 빈 놀이터는 조용하기만 합니다. 그때의 아이들은 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놀이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이 있다면 애니멀루덴스(animal Ludens)도 가능하지 않을까? 사진출처 : Stainless Images

놀이는 어쩌면 무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온 힘을 다해 전념해도 노동으로 간주되지도 않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아이들은 재미를 위해, 순전 재미만을 위해 모든 힘과 에너지와 활력을 놀이에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에너자이저들이지요. 놀이연구자 J씨는 저의 후배이고,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동고동락을 했지요. 이따금 그 친구와 같이 얘기를 하면서 놀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의 놀이의 방식은 규정된 어떤 놀이모델을 제시하지 않고, 끈이며, 깡통이며, 칼이며, 자며, 종이 등이 놓인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이지요. 그러면 아이들은 엄청난 지루함 때문에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급기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오락가락 서성이지요. 놀이선생인 J씨는 뭐하라고 시키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은 지루해서 주변에 놓인 물건들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리고 만들고 조립하고 연결하는 등의 공작활동을 시작합니다. J씨는 능청스럽게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아이들이 뭐하나 하면서 관찰하며 돕기만 합니다. 조금만 지나면 아이들은 온갖 놀이감을 만들어서 뛰어다니고, 비명을 지르고, 몰려다니고, 만들고, 창조합니다. 그의 지론은 지루함이 놀이의 전제고, 지루함이 자율성의 전제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어수선한 놀이가 진행되면, J씨를 제외한 다른 선생님들은 제지하느라 진땀을 뺍니다. 그러나 J씨가 원했던 바는 바로 그것이지요.

J씨는 고정된 놀이 모델을 의도적으로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여러 놀이를 창조하고 횡단하게끔 유도합니다. 이에 따라 놀이시간 동안 수 십 번 다른 놀이들이 창조되고 바뀌고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완전히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도로 자유롭지만 고도로 조직된 규칙이 있는 것이 놀이이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은 금방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고, 수정하고, 다시 없애고, 또다시 만드는 과정에 있습니다. 심지어 공터에서 깡통에 구멍을 뚫고 나무를 집어넣은 후 모닥불을 지펴 라면이나 감자를 조리해 먹는 과정도 훌륭한 놀이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놀이이기 때문에, 굳이 놀이의 규칙을 선생님이 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J씨는 그저 조력자일 뿐이지요. 예를 들어 목공을 하는데, 칼을 쓰는 위험한 일을 아이들이 하게 되면 아이들에게 일부러 칼의 위험성 등을 얘기하면서 제지하는 척 합니다. 하지만 칼을 쓰지 못하게 막지는 않습니다. 그런 스릴을 느낀 친구들은 칼을 조심히 다루면서도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J씨가 작년 여름캠프를 마치고, 저희 연구실에 찾아왔을 때였습니다. J씨와 저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들인 ‘하나의 모델에 집중하는 몰’(mole)과 ‘여러 모델을 횡단하는 분자’(molecular)의 개념을 놓고 여러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일과 의미모델이 몰적인 것이라면 놀이와 재미모델은 분자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깊은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지요. 또한 이것을 노동 모델과 활동 모델간의 비교로도 생각해 봤습니다. 이를테면 선생님이 어떤 놀이모델을 미리 제시해버리면, 그 놀이모델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몰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선생님이라는 지위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권력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더더군다나 그렇게 될 위험이 큽니다. 그래서 아이들로 하여금 어떤 모델 없이 스스로 모델을 만들고 바꾸게끔 하는 것이 놀이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날 이야기를 마치고 J씨는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든 피리를 저에게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그 피리를 받아서, 이따금 놀이의 원리가 지루함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마다 불곤 합니다. 지루함을 잊게 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마술피리라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지요.

호모루덴스, 놀이의 목적은 무엇일까?

요한 호이징아(Johan Huizinga)는 호모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창조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만드는 인간(Homo Faber)’,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이 그것입니다. 그는 놀이는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일 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놀이 속에서 울고 웃고 이기고 지고 싸우고 화해하고 경쟁하고 협동하는 등의 모든 행위들은 놀이 자체가 끝나면 재미있는 기억으로만 남습니다. 호모루덴스 개념은 이런 모든 인간과 동물의 행위의 이면에 있는 본질을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여기다 애니멀루덴스라는 개념을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동물도 아이들 못지않게 굉장히 놀이를 좋아하니까요.

해석학자 가다머(Gadamer, Hans—Georg)는 『진리와 방법』(2012, 문학동네)이라는 책에서 놀이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며, 놀이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즉, 너와 나 사이에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어떤 제 3자가 출현하는 것만 같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번지는 것은 너와 나를 특정하지 않고 우리 중 어느 누군가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중세 때부터 지속되었던 “두 명부터 공동체인가?, 아니면 세 명부터 공동체인가?”라는 논쟁에서 서구철학은 두 명부터일 것이라고 간주해 왔습니다. 왜일까요? 가다머가 얘기했던 너와 나 사이에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어떤 제 3자가 출현해서 3명을 구성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 생각이 발전되어 가다머와 같은 철학자는 2자 관계 내부에 있는 제 3자로서의 간주관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이주체성으로도 불리며, 두 사람들 간의 관계를 보다 역동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들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간주관성은 둘 사이에서 소통과 놀이, 관계 맺기, 접촉 등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리 중 어느 누군가’입니다. 그래서 놀이를 할 때 마치 두 사람 속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가다머의 생각처럼 놀이는 주체와 객체, 자아와 대상이라는 구분을 사라지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2001, 문예출판사)에서의 생각처럼 ‘나’와 ‘그것’의 관계, 즉, 자아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라는 수평적인 관계 더 나아가 간주관성이라는 창조적이고 예술적이고 생산적인 측면을 회복하는 것이 놀이행위 자체일 수 있습니다.

저는 갑자기 아내와의 관계가 떠올랐습니다. 아내와 저는 서로 별명을 부르고, 놀이처럼 모든 일들을 해내고 있는데요. 그래서 아내와 저 사이에는 제 3자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서로를 뻔하게 보지 않게 되었지요. 매일매일 새로운 주체성이 튀어나오다 보니 삶에 놀이적 요소를 조금 가미했을 뿐인데도, 삶에 청량제가 생기고, 활력소가 생기고, 놀이 같은 관계로 재탄생합니다. 아내는 종종 제가 만든 노래와 춤, 놀이와 함께 하면서, 우리 중 어느 누군가가 생긴 것처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따금 음성변조를 통해서 대화하기도 하고, 패러디가 대부분인 하이코미디 – 아내는 아재개그라고 하는 – 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저희 부부의 놀이적 설정이 생활의 고달픔과 힘듦을 잊고, 재미있고 활력 있는 삶을 만드는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희 부부의 관계는 철학공방 별난이라는 공동체의 토대이자 기본 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게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놀이이론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놀이와 인간』(1994, 문예출판사)에서 놀이의 구성요소를 ‘운’, ‘어지러움’, ‘경쟁’, ‘모방’으로 봅니다. 사실 이러한 구성요소는 산업사회 초기의 골목놀이에서는 통합되어 나타나고 아직 기능적으로 분화되지는 않았겠지요. 그런데 이 통합된 놀이를 근대 문명은 잘게 쪼개어 기능화합니다. 즉, 운은 도박으로, 어지러움은 놀이기구로, 경쟁은 스포츠로, 모방은 연극, 영화 등으로 기능적인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특히 최근 전통놀이를 완전히 대체하고 있는 온라인게임은, 이러한 기능을 매뉴얼화하여 더 세분화하고 기계화하기에 이릅니다. 마치 병원놀이를 하면 공터가 병원이 되고, 감옥놀이를 하면 골목이 감옥이 되는 등의 상상력에 기반한 가상성 역시도 가상공간 내부의 화려한 배경이나 세련된 디자인으로 대체됩니다. 이에 따라 놀이가 갖고 있는 상상력 대신 가상현실의 화려한 디자인이 대신하게 될 때, 놀이는 창조성과 생산성을 잃게 됩니다.

제 후배 중에 게임을 유난히 좋아했던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심지어 마우스 클릭을 너무 많이 해서 손목인대가 늘어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가 고립된 채로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사람도 안 만나고 하루 8~9시간을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과연 어떻게 그렇게 할 열정과 에너지, 시간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청년 시절에는 게임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대학원 다니면서 공부 때문에 게임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그래서 학위논문을 마치고 아내와 스타크래프트를 하러 PC방에 손잡고 놀러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폭탄이 터지고 죽고 싸우는 모든 화면이 너무 화려해서 눈이 너무 아파왔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힐끔 보니 아내도 눈이 아파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와 아내는 황급히 PC방을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게임을 하기에는 체력이며 시력이며 나이라는 한계가 걸려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들뢰즈가 이미지도 생명이라는 철학을 전개했듯이, 게임 하는 그 친구들에게 “네가 죽인 괴물도 생명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게임에서 제 아바타가 장렬히 사망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두렵거나 공포스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게임이 놀이가 갖고 있는 모든 게 폐지될 수밖에 없고 유한하고 그 자리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분명 호모루덴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순전히 재미에 따라 놀고 즐기고 노래하고 춤춥니다. 사진출처 : michelleraponi

게임에 빠져든 청소년들에게 기성세대는 우려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무조건 게임시간을 줄이거나 아예 게임에 접근을 차단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많지요. 그러나 그들이 게임 이외에 선택할 배치가 없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은 학교나 학원에 다녀와서 놀 수 있는 공간이 없고, 놀 친구도 게임에서 만날 수 있고, 마을이나 공동체와 이웃이 없는 상황과 대면해 있습니다. 그러한 배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게임 이외에는 선택할 경우의 수가 없는 상황인 셈이지요. 그래서 저는 청소년들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대신 게임을 하되 적당히 자신이 제어할 수준에서 하라고 말하게 됩니다. 제가 최근 게임을 살펴보니 중독성이나 재미가 굉장히 높은 게임이 대다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게임에 몰두하는 청소년들을 야단칠 것이 아니라, 친구, 이웃, 가족, 공동체 등으로부터 분해되고 분열된 현 문명의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배치를 재배치함으로써, 게임 밖의 다른 놀이를 할 수 있는 상황과 장소, 친구들을 마련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다 다양하게 선택할 경우의 수 하나하나를 청소년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미와 재미 사이

자본주의는 “~은 ~이다”라고 고정된 의미로 단정내릴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며, 그 이외에는 모두 와해되고 해체된 상태로만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책상은 책상이기 때문에 팔릴 수 있는 상품이 되는 원리이죠. 그냥 넓고 평평한 나무판이라고 부른다면 상품화되기 어려웠을 테지요. 특히 법과 제도, 관료시스템 등은 의미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규칙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이는 의미의 논리가 아니라 재미의 논리에 따라 유연하게 횡단할 수 있고 고도로 자유로우면서도 고도로 조직된 규칙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심리치료사 펠릭스 가타리는, 의미와 일의 논리를 기표(signifiant)라고 하고 재미와 놀이의 논리를 도표(diagram)라고 말합니다. 도표 개념은 자유로운 놀이에도 고도로 조직된 규칙이 있다는 점을 말하기 때문에, 자유가 아닌 자율이라는 개념이 왜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활동하다보면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해서 열심히 하다보면 시간이 갈수록 엄청나게 재미가 없고, 재미있어서 한 일은 종종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 둘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하지요. 그래서 의미와 재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이 학교, 군대, 감옥, 시설 등에서의 일상은 대부분 의미가 있는 일들로 디자인되어 있어서 그 속에 있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힐 것만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가 재미로 시작했다가 의미가 생겨 일이 되는 횡단적인 측면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의미와 재미는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분명 호모루덴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순전히 재미에 따라 놀고 즐기고 노래하고 춤춥니다. 기존 계몽주의 전통은 이런 아이들의 신체와 마음을 결박하고 의미모델로 훈육하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육방법은 오늘날의 학생인권이나 미래세대의 권리에 위배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릴 적에는 놀이가 세상의 전부였고, 놀이를 기다리고 늘 설렜습니다. 그래서 하루가 굉장히 짧고 강렬하고 모험으로 가득한 이유는 바로 놀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다 놀이처럼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굉장히 위험한 것으로도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이의 활력과 에너지가 이 단조롭고 비루한 일상을 만드는 문명의 해독제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릴 때처럼 아이의 마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가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혹여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특이점인 것은 분명합니다. 놀이하는 아이들로 가득차고 뜨겁고 강렬했던 골목과 거리가 생각나는 오후입니다.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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