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⑲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이 닥쳐올 때 미래세대들이 직면할 현실은 불평등 차원을 떠나 생존의 상황이 문제로 다가옵니다. 현존 문명의 대답이 아닌 문제제기로서의 미래세대의 권리를 바라보고, 도처에 있는 미래, 아이들의 시간의 윤곽선을 지도처럼 그려냄으로써 지속가능성에 대한 색다른 구도를 그려내야 할 시점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기후변화의 상황

아내와 차 마시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주제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겪게 될 상황이 얼마나 혹독하고 비참할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내는 지금 현재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해 그 아이들은 굉장히 어렵고 험난한 길을 걸을 것이라며 침울해하고 비통해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마에 손을 올리고, 난처하고 어쩌지, 하는 생각에 잠시 말을 끊고 침묵으로 향하지요. 저처럼 성장주의 시대의 끝자락이라고는 하지만 성장의 단물을 체험했던 기성세대로서, 지금 현존하는 아이들의 미래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미래는 암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제게 만약 아들딸들이 있었다면 기성세대를 믿지 말라고 꼭 얘기해 주고 싶습니다. 미래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전망 상실, 비관, 침울, 불안이 저희 부부의 티타임을 장악할 때가 많습니다. 저희 부부 사이에는 아이가 없지만, 기후변화 시대에 직면할 아이들 얘기만 나오면 늘 침묵이 감도는 어색한 시간이 지속되어 버리지요.

사실 저희 부부는 후원단체를 통해 제3세계 어린이를 후원하면서 느끼는 바가 참 많습니다. 이를테면 제3세계 어린이들에게 후원되는 품목들을 보면 먹는 거, 입는 거, 예방접종, 학용품 같은 아주 기본적인 것들지만, 아이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는 점에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런 기본적인 것도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 가슴이 아파집니다. 특히 제3세계의 소식을 아는 어떤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후원을 받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들 사이에 도시쥐 시골쥐 우화처럼 약간의 위화감이나 부러움 등이 교차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희가 후원하는 아이는 방글라데시 지역에 사는 모사로프라는 아이인데, 미취학아동일 때는 나중에 커서 도둑을 잡는 경찰이 되겠다고 저희에게 편지를 썼지요. 몇 년 후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이번에는 의사가 되겠다고 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이국적인 그 아이의 사진을 볼 때마다 저희는 그 아이가 기후변화에 직면해서 겪어야 할 상황들에 대한 걱정이 앞섭니다. 대개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들은 제3세계 가난한 민중들에게 먼저 들이닥치곤 하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시리아사태 직전에 5년 동안의 가뭄과 물 부족 상황이 초래한 전대미문의 상황을 떠올리기도 하지요. 테러리즘의 발호와 내전의 발발, 주권 질서의 붕괴 등은 기후변화를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하거든요. 그런 뉴스를 들으면 시리아에 사는 아이들이 얼마나 열악하고 혹독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 걱정이 듭니다.

헌법에서의 미래세대 권리

독일 헌법에서는 “미래세대의 자연의 권리를 보장할 것”이라고 간단히 언급된 구절이 생명권과 미래세대의 권리를 보장하는 구절로 유권 해석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 Wesley Tingey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에서 명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구절은 매우 유명합니다. 그런데 국민에 대한 유권해석이 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로만 제한되는 것이 맹점입니다. 그래서 이 참에 개헌을 할 때 국민의 범주를 미래세대와 생명까지 포함시키자는 목소리가 강력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실은 소수파의 의견이고, 생명운동, 공동체운동, 협동운동하시는 분들이 시민단체와 개헌단체들에 개입해서 목소리를 높이고는 있지만, 아직 역부족인 상황입니다. 미래세대의 권리를 이야기하기엔, 아직 현재 우리의 권리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의견이 주된 근거입니다. 이를테면 현재 정부의 추경예산은 분기별 예산으로 짜여 있어서 현 시점의 몇 개월만을 겨냥하지요. 그래서 미래세대를 위한 기금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는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독일 헌법에서는 “미래세대의 자연의 권리를 보장할 것”이라고 간단히 언급된 구절이 생명권과 미래세대의 권리를 보장하는 구절로 유권 해석되는 상황입니다. 저희도 헌법의 본문이 아니라 각문이라 하더라도 생명권과 미래세대의 권리는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상황에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미래의 구매력을 이자로 만들어서 미래를 차압하는 시스템을 내부에 갖고 있습니다. 즉, 미래를 흥청망청 다 현재에 써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빚진 사람들은 현재를 살지만 미래를 차압당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왜곡된 미래관은 자본주의의 성장시스템을 맹목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금융시스템을 확대하여 빈곤을 가속화하였습니다. 지금 미래세대의 권리를 헌법에 명시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성장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제동을 걸 유력한 권리영역을 명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정부정책과 민주주의 역시 현재 시점의 민중과 국민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아이들까지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시점입니다. 우리가 미래세대를 위해 조금 아끼고 덜 쓰고 나누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축장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미래는 다가올 현재이기 때문에,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제 민주주의는 아직 태어나지 않는 미래세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민주주의는 시간을 횡단하는 색다른 정치형태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참혹한 현실 속의 미래세대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젊은이들의 상황에 대해서 가감 없이 듣게 될 기회를 갖게 됩니다. 특히 바로 눈 앞에 취업과 일자리, 노동이 제거된 상황이 기다리는 졸업반들의 얘기들은 가슴 깊게 와 닿았습니다. 청년들은 “아르바이트하면서 취업준비하고 있어요.”라거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어요.” 등 비슷한 말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딴 소리로 넘어가지요. 제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하더라도 취업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고, 대부분 골라서 좋은 데를 가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조교들이 취업원서를 가지고 있어서, 과 사무실에 자주 들리던 학생들 중에서 취업 기회가 많이 생긴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무척 달라졌습니다. 일자리가 거의 없는 상황, 비정규직이 대다수인 상황, 알바와 직장이 구별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얘기를 들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지곤 했습니다.

앞으로 저성장사회의 진입으로 젊은이들이 취업기회 조차 갖지 못하는 상황은 점점 더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얘기를 듣다보면, 이제 사람이 할 일을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대신하는 상황이 등장한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아마 10년 이내로 일자리의 대부분이 사라지겠지요. 더더군다나 기후변화 시대가 함께 다가온다는 점이 더 문제입니다. 이제 불평등 차원을 떠난 생존의 상황이 문제로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기회의 풍요 속에서 살았던 기성세대들은, 기회의 빈곤 속에서 살고 있는 청년 세대와 나아가 기회의 소멸 속에서 살게 될 아이들을 잘 이해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꼰대라는 얘기가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도 사치가 되고, 결혼도 사치가 되고, 출산도 사치가 되는 그런 시절입니다. 잘게 나뉘어져서 1인 가구로 현실에 직면하게 된 현 세대의 젊은이들의 어려움은 실로 참혹함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할 열악한 조건입니다. 이에 대해서 기성세대와 사회는 어떻게 공감하고 대응해야 할까요? 한국사회는 더 섬세하게 새로운 세대들의 삶의 조건과 생활양식, 미래전망에 대해서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서울시와 성남시에서 청년 기본소득 정책이 나왔을 때, 저는 아내에게 아주 흥분해서 얘기를 했지요. 아직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 제도가 더 확대되면 더 많은 이들이 지원을 받고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 안도감이 들었고 상상력이 생겼습니다. 사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과 기후변화 시대를 맞이하여 기본소득이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만들어낼 유력한 정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생산과 시장에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색다른 상황은 다가올 현실입니다. 그런 현재의 시점에서 기본소득은 단순히 시장에서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를 만들어낸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예술, 창조, 과학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결국 기계류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할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반전의 상황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기본소득이 거대한 위기 상황을 기회로 만들 색다른 토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 뿐 아니라 또한 과학기술, 예술창조, 대안적 삶이 발흥하고 꽃 피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행이었던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

2000년 초중반 레스터 브라운에 의해서 제안되고 유엔환경위원회가 채택했던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한국사회에도 유행이었습니다. 저도 그 개념에 대해서 열광했지요. 미래세대의 필요와 욕구를 고려한 현재 세대의 욕망을 규정하는 내용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세대의 권리조차 고려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현실에서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은 통속화되고 속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현존질서가 현재의 성장 자체를 유지하고 지속시키기 위한 슬로건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지요.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슬로건은 기업의 영리활동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위한 슬로건 중 하나가 되면서 활동가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지속가능한 약탈이 아니냐, 역성장으로 정확히 표기하라는 요구 등도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글러스 러미드가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11, 녹색평론사)에서 언급했던 발전(development)개념에 대한 비판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발전은 봉투, 싸매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envelope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de는 벗어나다의 의미지이요. 그러므로 봉투 모양의 꽃망울이 개화하고 벌어지는 것과 같은 형상이 거기서 등장합니다. 즉, 미개에서 문명으로, 야만에서 계몽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제3세계 사람들을 미개나 야만으로 보고, 제 1세계 사람들을 문명으로 보는 사고는 문제점이 많습니다. 그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발전이라는 개념은 성장과는 달리 양적인 척도가 아니라 질적인 척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장처럼 실물적이고 외양적인 것이 아니라 내포적이고 관여적인 특징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성장이라는 개념을 대신하는 발전 개념은 일말의 긍정성을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에 대한 세미나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문제제기와 비판이 오갔습니다. 현재 지구는 아예 지탱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며, 지속이 현재 산업의 지속이냐는 의문이며, 왜 발전을 선진국 모델로 향하게 하느냐 등 비판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적어도 미래세대의 권리를 명시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전략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의 설전이 있은 이후 10년이 지났는데, 이제는 개헌 논의나 민주주의 논의에서 미래세대의 권리가 누락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 지속가능한 발전이 그렇게 유행이었던 시절에 동조하고 고무되고 찬양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정작 민주주의 개념에조차도 미래세대의 권리를 넣는 것을 주저하는 상황이니까요. 적어도 지속가능성을 받아들였던 사람이라면 미래세대의 권리에 대해서 긍정하는 반응을 보여야 합당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자체로 정말로 사회와 공동체가 발전했다고 비로소 말할 수 있겠지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프랑스어 문법에는 미래진행형이라는 시제가 있습니다. 과거진행형과 현재진행형은 그런대로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인데, 미래진행형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입니다. 미래진행형은 지속되는 미래, 지속가능한 미래라고 재번역할 수 있는 문법입니다. 저희는 아직까지 과거와 현재만이 지속되지, 미래가 지속된다는 개념이 생소합니다. 그러나 삶 속에는 미래가 들어와 있습니다. 지금 흥청망청 쓰다 보면 미래는 지속불가능하게 됩니다. 지금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마음껏 쓰면 미래는 지속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프랑스 철학자 알뛰세르의 문구는 현재에도 과거에도 없는 미래적 시간의 지평, 지속가능한 미래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임에는 분명합니다.

미래세대의 권리는 현존 문명의 대답이 아니라 문제제기입니다.
사진 출처 : StockSnap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도식에 의해서 파악하다 보면 과거를 사는 사람이 있고, 현재를 사는 사람이 있고, 미래를 사는 사람이 있다고 분류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너무 빨리 책을 내 버린 철학자, 미래를 미리 보여준 철학자가 바로 스피노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상 요즘 들어도 하나도 낡은 것이 아닌 생각을 스피노자는 피력합니다. 욕망, 사랑, 신체 변용, 무의식 등 스피노자에게 미래적인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진정한 문제는 너무 빨리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미래진행형이라는 개념에 가까운 철학과 마주할 때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행복한 상상, 다가올 미래의 도래, 미래세대의 목소리들 등이 저에게 속닥거리는 느낌이 드니까요.

한 아이가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에서는 한 아이의 탄생이 얼마나 인류에게는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협에서 10년째 진행해 온 인문학세미나에 거의 매번 엄마를 따라오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채 돌도 지나지 않아 포대기 속에서 울던 아이는 어느새 자라서 세미나 자리를 뛰어다니며 이제는 학교에 다닌다며 뽐내기를 합니다. 한 아이가 있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 라고 벌써부터 얘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아이는 우리의 협동조합의 인문학세미나 자리에서 종횡무진하며 미래의 현존에 대해서 말하는 존재였습니다.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은 아이가 울고 웃고 뛰고 춤추고 비비고 부수고 하는 모든 행동이 우리가 공부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미래의 시간이 도래해 있었고, 그것이 한 아이로 현현했습니다. 아이가 커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지혜는 성숙되어 갔고, 우리의 관계는 발효되어 갔습니다. 아이는 무언가를 말하려는지 자꾸 칭얼대고 소리를 지르고 만지려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미래가 우리 안에 이미 도래해 있다는 메시지였지요. 그 아이는 세미나의 특이점이었습니다. 세상의 진실은 아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특이점이었고, 미래를 제거한 현재가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알려주는 특이점이었고, 논증과 추론 능력을 가진 엘리트가 아닌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특이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이는 시간의 윤곽선 위로 미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그리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저희들은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손에 펜을 쥐어주어도 그 미래적인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자꾸 할 말이 있다고 미래로부터 전달되는 메시지를 말하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가 갖는 반복과 아이가 갖는 흐름의 강렬도에 감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자꾸 웅얼거리고 우리의 세미나 자리의 강렬도와 온도와 밀도에 감응하고, 리듬과 화음에 감응하여 웅얼거림과 무언의 춤사위와 기묘한 동작을 보이는 아이가 사실상 세미나의 시작과 끝, 전제와 결론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미나가 몇 년째 지속되자 아이는 이제 드디어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듣고 싶은 그런 말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기대했던 그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아이라는 미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모두 대답을 갖지 않는 문제제기처럼 비밀로 간직되었습니다.

미래세대의 권리는 현존 문명의 대답이 아니라 문제제기입니다. 2세부터 6세까지의 아동을 관찰해보면 그들로부터 얼마나 색다른 질문을 던지는지 금방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은 삶과 생활과 세계를 뻔하게 보지 않고,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때 갖는 색다른 미래적 잠재성과 깊이, 심연과의 접속입니다. 또한 아이들의 시간, 미래진행형적인 시간, 지속가능성의 시간은 현존 문명이 갖고 있는 선형적인 시간관에 대해서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했던 지속가능한 발전 전략은 바로 미래의 시간인 아이라는 특이점과 접속하지 않는 채 전개되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말하는 공염불이나 주문, 슬로건처럼 속류화되었지요. 우리는 도처에 있는 미래, 아이들의 시간의 윤곽선을 지도처럼 그려냄으로써 지속가능성에 대한 색다른 구도를 그려내야 할 시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 영원히 아이인 시간이 앞으로 도래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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