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⑰ 생명순환은 영원할까?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저성장을 넘어 탈성장을 바라보는 시대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찾고자 하는 이야기다.

똥의 순환과 농업

어릴 적 시골에서 살던 저는, 길에서 거름을 잔뜩 지게에 지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가던 농부들을 자주 만났지요. 당시 새마을운동이다 뭐다 해서 유독성 발암물질인 슬레트로 된 지붕을 올리던 시절이었지만, 초가집을 고수하고 똥을 비료로 삼던 고집스럽던 농부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저의 친구들 중에는 그런 완고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도시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 등을 강하게 드러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잡지에서 찾아낸 사진 몇 장을 보여주고 이런 데서 살겠다고 말하는 식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순간은 농사가 끝나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짚더미 위에서 친구들과 올라가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즐겁게 하루를 보냈던 시간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농촌은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농부의 자녀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나가고, 농촌은 도시에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종속된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졌지요. 그때 똥으로 거름을 만들었던 그 많던 농부들도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제 연구실로 함께 출근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레알텃밭학교’라는 도시텃밭 프로그램에 등록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디선가 스티로폼 상자들을 주워 모아 상자텃밭을 만들어서 연구실 앞마당에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뭔 일인가 싶어서 지켜보기만 했지요. 그런데 아내는 흙을 담고 물을 주고 씨앗을 심고 부지런히 연구실과 마당을 왔다 갔다 했지요. 상추며 토마토며 가지 등 식물들의 새싹이 상자텃밭의 흙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참 신기했지요. 그런데 아내는 저에게 비료가 필요하다면서, 페트병에 오줌을 누어서 발효시켜야 한다고 한참을 그 원리에 대해서 강의하였습니다. 저는 난처했지만 조용히 경청했고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 이후로 계속 비료생산을 독려했고, 저는 아내의 지시에 따라 오줌을 모았습니다. 그 이후 제 오줌을 먹고 울창하고 푸르딩딩하게 자란 식물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습니다. 특히 상추는 밥상마다 쌈을 싸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이면 그만큼이 또 자라있어서 놀라웠습니다.

오히려 탄소중독적인 삶과 문명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출처 : doodlartdotcom

연구실이 문래동으로 이사 오고 나서 아내는 문래도시텃밭에 부지런히 신청하였지요. 시골에서 쓰는 두엄이나 거름은 아니지만, 유기비료도 뿌리고 씨앗이며 모종을 심으니 며칠 후부터 수확을 해도 될 정도로 쑥쑥 자라있었습니다. 두 평 정도의 텃밭에서 갑자기 엄청난 양의 채소를 공급받으니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순환의 과정은 경이로웠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성장, 도시의 성장, 부의 성장의 과정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급기야 저희가 프로젝트며 책 쓰는 일로 바쁘다 보니 텃밭에 나갈 시간이 여의치 않게 되자 어머니까지 텃밭관리에 나서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도시의 농부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먹다 남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지요. 저녁 때 석양이 지는 무렵, 텃밭의 잡초를 뽑다가 허리를 쭉 펴면 붉게 타오른 태양이 참 아름답게만 느껴졌습니다. 이 모든 게 다 태양과 땅과 바람과 비의 선물들이었지요. 자연의 순환은 참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

도시에서의 자원순환은 골목이나 거리 곳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그중 도시의 폐지를 주워 모으는 노인들이 참 많습니다. 저희는 박스나 종이가 생기면 꼭 연구실 인근의 태양슈퍼 할머니에게 가져다드립니다. 할머니는 가지런히 박스를 정리정돈하고, 고맙다고 저희에게 라면 하나 끓여준다고 하시는 걸 겨우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태양슈퍼 할머니는 폐지를 모아 그 여윳돈으로 길냥이에게 밥을 해주는 일상을 보내시는 분이셨습니다. 한 번은 길냥이들이 슈퍼 앞에 모여 있길래, 자세히 보니 된장국에 김치 몇 개, 막 한 쌀밥을 비벼서 준 것을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사료를 모아서 드리기도 하지만, 폐지를 모아서 번 돈으로 길냥이 밥해주는 재미가 참 좋으신가 봅니다. 연세도 많으시고 관절도 아프지만, 폐지를 산더미처럼 싣고 가시는 슈퍼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면 길냥이들이 굶지 않겠다 싶어 참 기분이 좋아집니다.

최근 대학생들이 폐지 줍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수레를 무상으로 지급하고, 대신 수레에 광고를 노출하게 하는 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 활동가들는 우리 사회에 할머니들처럼 친환경주민이 어디에 있겠냐며, 빈민이라는 개념 대신 친환경주민이라는 개념을 쓰자고 제안하기도 했지요. 자원 재활용과 순환의 과정은 도시의 순환에서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활용품 가격이 현실화 되어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최근에 새 정부 수립 이후 빈 병 가격에 대한 현실화가 이루어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상품을 생산한 기업이 자원재생과 순환에 대해서 책임지는 제도는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어야 할 항목입니다. 분리수거의 생활화가 1세대 도시순환의 슬로건이었다면, 이제 가격이 현실화되어 분리수거가 돈이 되고 생활에 이득이 되는 2세대 도시순환으로 이행해야 할 시점입니다.

어느 날 저희집 가까이에 사시는 부모님 댁에 갔는데, 잘 정돈된 박스와 신문, 종이뭉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물어보니, 어머니도 역시 운동 삼아서 폐지를 모아 고물상에 갖다 주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함께 폐지를 바리바리 들고 고물상에 가보았습니다. 고물상에서는 바로 즉시 무게를 재고 아무런 말없이 몇 천 원의 돈을 건넸습니다. 사소한 재활용 습관이 부모님 용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 다 쓴 이면지나 신문, 박스 등이 사소한 것으로만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약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폐지를 너무 많이 모아서 어머니께서 옮기시는 데 고생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에서 나온 것 이외에는 모으지 않는데도 이렇게 많다고 말하십니다. 부모님 댁에서 나오는데 현관에 세워둔 작은 손수레 하나가 참 기특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도시에서의 순환이 우리 가정에도 이루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순환과 진보 간의 세계관의 충돌

진보, 특히 자본주의적 진보와 구별되지 않는 속류화된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있었습니다. 지구의 한계, 성장의 한계, 신체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늘 어제보다 나은 물질적 풍요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었지요. 그러나 저성장 사회가 유지되면서 이러한 생각은 오히려 낡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한성을 승인하지 않으면서 무한한 발전과 성장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장이 멈추거나 더뎌진 현재의 상황이 참 불만족스럽고 못마땅한 상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물질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였고, 유한성을 승인하며 순환과 재생을 생각하는 것이 보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진보정당이 좌파로 녹색정당이나 생태정당이 우파로 배치되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적녹연정에 대한 아이디어는 적색과 녹색의 만남을 통한 균형과 조화, 조율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특히 기술진보는 진보적 세계관에 대한 가장 큰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친구와 술을 한잔하는데, 그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전과 달라진 게 무엇일까?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 우마차를 자동차가 대신했다고 해서 과연 변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밥 먹고 사는 것에 무슨 변화가 있다고, 출근하고 일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다고, 내가 예전 삶과 유사한 현재의 삶을 뺄셈을 하다 보니, 남은 건 스마트폰 달랑 하나뿐이더라구!” 저는 기술의 한계는 삶과 생활방식을 바꾸는 표층적인 부분과는 관계하지만, 삶 자체와 그것의 내용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이를테면 기후변화의 상황을 기술을 통해서 모두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탄소중독적인 삶과 문명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또한 블랙박스처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가전제품과 같은 기계장치들은 소수의 전문가들에게만 유리한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인공지능과 로봇과 같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기계장치의 대두는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갑니다. 왜냐하면 기술과 기계장치들이 사회와 공동체의 통제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은 인간마저도 뺄셈을 하고 대신 인공지능을 채택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술진보는 모두 다 선인 것이 아니라, 적정한 기술 수준으로 제어할 필요성도 여기서 생깁니다. 즉, 과학이나 기술은 공동체와 사회의 통제권 하에 있어야겠지요. 그래야 비로소 기술문명이 인류와 공동체, 사회에 기여한다는 본래의 목적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고대 애니미즘으로의 복귀?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미 화석이 되고 폐허가 된 오래된 과거를 뒤져서 미래적 소재로 삼자고 말합니다. 그 말인즉슨 과거의 유물이 된 아케이드 건축물 속에도 미래를 구성할 꿈, 희망, 배치, 아이디어, 영감 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태마을 라다크를 연구했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라는 말도 이상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제는 시간을 총동원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여기-가까이에 삶을 배치하고, 미래세대의 권리를 현재로 끌어당기고, 오래된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등 시간의 총동원을 통해서 생명위기 시대에 대처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특히 오래된 미래라 불리는 과거의 것들 속에서 미래의 씨앗을 찾는 일은 흥미진진합니다. 그중에서도 증여와 선물을 주고받던 시절의 순환적 질서를 생각하면, 마구마구 여러 가지 상상력이 동원됩니다. 특히 사물에 영적인 힘 즉 하우(Hau)가 깃들어 있다는 마오리족 사람들의 생각은 고대 순환사회에서 보이는 사물영혼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에서는 모든 것이 순환합니다. 지구의 세 가지 순환이 질소순환, 산소순환, 탄소순환이듯이, 생태계에서는 순환에 따라 흘러가는 과정 이외에는 없다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순환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정동, 욕망의 순환도 물질-자원-에너지의 순환을 따라 함께 움직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고대 애니미즘 사회에서의 사물이 살아 움직인다는 사상, 즉 애니미즘과도 통합니다. 사물이 죽어있거나 텅 비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순환과정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의 합리적인 사상은 사물 주위와 경계에 희뿌옇게 어려 있는 탈경계적인 사랑, 정동, 돌봄, 욕망 등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지, 이도 저도 아닌 것은 필요 없다는 생각이지요. 근대이성의 영향에서는 사물은 고정되고 확실한 실체라고 생각되었고 경계도 분명해졌습니다. 그런 다음 사물은 증여와 호혜, 사랑과 돌봄 등의 흐름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등가교환에 따라 명확한 양적 척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는 사물을 경계가 확실하고 지독히 고정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순환적 세계관에 대해서 말하면, 일부 종교인들이 발끈합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인생과 의미와 영성과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불교인들은 해탈을 말하며 발끈하고, 기독교인들이 사랑을 말하며 발끈합니다. 그리고 애니미즘적 세계관, 순환의 세계관이 낡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테면 부엌에 조앙신이 살고, 오래된 물건에 도깨비가 어려 있고, 깊은 숲에 정령과 요정이 놀고 있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은 세속종교와는 지극히 다른 노선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순환사회의 애니미즘은 현존 종교와 자본주의 질서가 탈주술화, 근대화, 합리성의 사회 등을 명목으로 기를 쓰고 내쫓고자 했던 ‘신비’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내와 제가 홍성의 풀무마을로 귀촌을 하려고 집을 알아볼 때였습니다. 기후변화 이후에 식량에 대한 위기감도 그러하고, 도시에서 아득바득 살고 있는 것도 그러하고, 조용히 글 작업하면서 자연의 순환과 하나 되고 싶은 마음도 그러하여, 집이며 땅을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또한 풀무마을 공동체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자연의 순환과정과 함께 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회의와 토론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다시 들렀을 때, 충남 지역에는 엄청난 가물과 물 부족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걱정이 정말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연의 순환 중에서 물의 순환이 이상이 생겼을 때 어떤 생명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후변화는 풀무마을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환경파괴적인 자본주의에서 이만큼 떨어져서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결국 기후변화의 거대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에 저희는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 잡았지요. 우리 부부는 도시에서 최선을 다해 생태주의 사상을 정립하고 앞으로 올 생명 위기 시대에 대처하자고 말하며, 귀농귀촌을 조금 뒤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요새 고양이들을 위해 베란다에 캣글라스를 키우고 있습니다. 작은 농사지만 상자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가며 주도면밀하게 움직입니다. 이제는 상자텃밭이나 도시농부, 귀농귀촌의 꿈과 희망은 우리가 함께 하는 연구와 글쓰기 작업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처럼 생명의 순환, 생명이 태어나서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 감동하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순환이 이 성장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폭주기관차를 멈추게 할 마스터키라는 점을 여전히 해답으로 갖고 있습니다. 풍요의 시대가 끝나고 성장이 멈춰지고 더뎌지자 사람들은 성장주의를 향수와 낭만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그러한 패러다임이 끝나야 할 시점입니다.

영원성으로 진입하는 지역순환사회

1976년 일본의 사회학자 츠루미 가즈코(鶴見和子)는 당대 일본사회를 지배했던 성장주의, 근대화, 개발주의 등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낍니다. 이에 따라 ‘내발적 발전’이라는 순환사회와 대안경제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내발적 발전은 골목상권을 유심히 관찰하더라도 드러납니다. 미장원에서 만 원을 쓰면, 그 미장원주인이 철물점에 가서 만 원을 쓰고, 그 철물점 주인이 슈퍼에 가서 만원을 쓰고, 그 슈퍼주인이 목욕탕에 가서 만 원을 쓰는 등 만 원은 원가 그대로의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면서 만 원 이상의 시너지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 마트와 같은 곳에 만 원을 쓰면, 순환하던 자원과 부는 돌연 멈춰지고 지역을 빠져나와 유통대기업의 배만 불리게 됩니다. 이처럼 내발적 발전전략은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 등 지역순환경제에 기여하는 색다른 주체성을 호출합니다. 이에 따라 지역에서 순환되는 자원과 부, 로컬푸드, 지역화폐, 지역상품 등을 극대화했을 때 지역 전체가 잘 살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환의 시너지에 따라 경제성장 없이도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겠지요.

결국 오래된 과거의 것이라고 치부했던 것들이 문명의 전환기를 맞아 다시 미래의 가능성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중요한 소재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출처. andsproject

성장과 순환이 충돌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생활권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요즘 저희 집 주변 골목상권은 완벽하게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대신 화려한 디자인과 유행인 상품이 유통되는 편의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근 전통시장은 화석이 되었습니다. 규모도 축소되고 시장의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지요. 대신 가까이에 대형마트의 SSM(기업형 슈퍼마켓)이 곳곳에 들어섰습니다. 보기에는 동네가 더 현대화되고 발전된 것만 같지만, 사실은 골목상권이나 전통시장에서 일하던 동네사람들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제가 아내와 골목상권에 살려야 한다며, 동네 안경점을 들른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디자인이며 가격이며 서비스며 모두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거래처를 하나 뚫어서 약간 비싸더라도 동네에서 사야겠다고 저의 아내와 말하고 갔지만, 약간 힘이 빠져서 돌아왔습니다. 지역순환경제의 혈맥이 끊겨 있는 상황에서 골목상권의 상인들은 더 피폐해져 가고, 더 예민해져 가고, 더 신경질적으로 바뀌어 가는 상황이라는 점을 느꼈습니다.

기후변화가 본격화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생명순환, 탄소순환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공동체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특히 유기농업이 갖고 있는 중요성은 더욱 강조하지 않더라도 분명합니다. 관행농처럼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농업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기물 순환에 입각한 농업은 지속가능하며, 자연과 생명, 사물의 무한한 순환으로까지 얘기될 수 있습니다. 결국 오래된 과거의 것이라고 치부했던 것들이 문명의 전환기를 맞아 다시 미래의 가능성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중요한 소재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저희 부부의 귀농귀촌 계획은 가족회의 때마다 한 번씩 나오는 주제입니다. 귀농귀촌에 대한 끝없는 이야기와 토론, 정보공유와 써칭 등이 저와 아내의 일상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에게 더 중요한 순환은 늘 정동, 돌봄, 사랑의 순환입니다. 그 순환의 시너지 속에서 지금 생명이 자라고 울고 웃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