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불평등을 바탕으로 분배를 추구한 예를 만나다 – 기후 위기 속에서 『삼국사기』 「잡지」 ‘색복’ 읽기

누구에게나 차별과 불평등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분배를 선뜻 긍정한다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윤리학 입문서들 가운데에는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는 것이 있기도 하다. 한편 사람들은 대개 현실에서 불평등과 차별을 끼고 살아간다. 게다가 역사 속에는 차별과 불평등을 바탕으로 분배를 추구한 듯한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 속의 기사들이 이러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기사들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분배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본다.

복색의 개성에 관해서는 간략하게만 기록한 『삼국사기』 「잡지」 ‘색복(⾊服)’

『삼국사기』 「잡지」 ‘색복(⾊服)’은 신라・고구려・백제의 복색에 관한 기록이다. 이 가운데 고구려・백제의 복색에 관한 기록 속에는 고구려・백제의 문화의 성격과 그것이 오늘날에 끼친 영향을 추정할 수 있게 하여주는 기록들이 들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折風)을 썼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았다. …… 여자는 머리에 장식 삼아 수건을 썼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

“백제의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다. 조회의 배례와 제사 때는 그 관의 양쪽에 날개를 붙인다. 그러나 군대의 행사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

“백제는 의복제도에 있어서 남자들은 고구려와 대략 유사하고, 부녀자의 옷은 도포와 같으면서 소매가 약간 크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잡지」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잡지」

고구려 고분 벽화 속 남자들의 모자를 본 사람이라면, 혹은 20세기의 평안북도 여성들이 수건을 쓰고 찍은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위의 기록에 흥미를 느끼면서 그것을 실마리로 고구려・백제의 복색만이 가지는 개성에 더 파고 들어가 볼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이런 기록이 너무나 간략한 것을 아쉬워할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服)’에서 신라・고구려・백제의 복색이 가진 개성에 관한 기록은 위에 인용한 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이 글에는 여러 신분의 사람들이 입었던 옷의 색채와 형태에 관한 정보들이 들어있지만, 그 정보들은 그 옷들이 가졌던 개성과 연결된 것 같지는 않다.

존(尊)・비(卑) 그리고 이(夷)・화(華)가 선명한 의복제도에 주목하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服)’의 기록자들은 거기에 등장하는 옷들의 개성보다는 다른 점에 주목하였던 것 같다. 기록자들은 의복제도[의복지제(衣服之制)]라는 것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듯하다.

“신라 초기의 의복제도는 복색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다. 제23대 법흥왕(法興王) 때 처음으로 6부(六部)의 복색의 존비(尊卑)제도를 정하였는데, 그때까지는 오히려 우리의 풍속을 유지하였다. 진덕왕(眞德王) 2년(서기 648)에 김춘추(金春秋)가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당의 의식을 따르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니, 당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동시에 의대(衣帶)를 주었다. 그가 돌아와서 이를 시행하여, 우리의 풍속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문무왕(文武王) 4년(서기 664)에는 부인의 의복제도를 고치니, 이후로 우리의 의관(衣冠)이 중국과 동일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

신라 사람들에게는 옷차림에 있어서 나름의 ‘우리의 풍속[이속(夷俗)]’이 있었지만, 복색으로 귀천[존비(尊卑)]을 구분하는 제도는 없었다. 그러다가 법흥왕 때 처음으로 복색의 존비 제도가 정하여지기 시작하였고, 진덕왕 2년(서기 648)에 당 태종의 허락을 받아 ‘우리의 풍속[이(夷)]’을 중국식[화(華]으로 바꾸기 시작하였고, 문무왕 4년(서기 664)에 부인의 의복제도를 고친 후 의관(衣冠)이 중국과 동일하게 되었다는 것인 듯하다. 여기에서는 존(尊)・비(卑) 그리고 이(夷)・화(華)가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고려시대 사람인 『삼국사기』 「잡지」 ‘색복’의 기록자는 신라가 받아들인 중국의 의복제도가 자신이 살고 있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되어있었는지도 기록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천명을 받은 후에도 모든 국가 제도는 신라의 옛 것을 많이 따랐으므로, 지금 조정과 상류 남녀들의 의복도 대개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들여왔던 제도인 것 같다. 내가 세 번 중국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우리 일행의 의관이 송나라 사람과 다른 것이 없었다. 전번에 조회에 들어가다가 너무 일찍 도착하여 자신전(紫宸殿)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어떤 합문원(閤門員)이 와서 묻기를 “누가 고려의 사신입니까?”라 하기에, “내가 고려의 사신이오.”라 대답하니 그가 웃으면서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 유규(劉逵), 오식(吳拭) 등이 와서 사관에 묵고 있을 때, 연회석상에서 우리 옷차림을 한 기생을 보고 섬돌 위로 불러 올려 소매 넓은 옷과 색실 띠와 긴 치마를 가리키면서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것이 모두 중국 3대의 의복인데 지금까지 여기에서 입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 부녀자들의 예복도 당나라의 옛 제도임을 알 수 있겠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

기록자는 신라의 제도를 많이 따른 고려 조정과 상류 남녀들의 의복이 당나라에서 들어온 제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송나라 사신들이 고려 기생의 옷차림을 보고 “이것이 모두 중국 3대의 의복인데 지금까지 여기에서 입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한 것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중국에서는 하・상・주 3대의 복색을 당이 답습하였고, 신라가 이를 수용하고 고려가 이어받았는데, 고려의 복색에는 3대의 복색이 확연히 남아있어 송의 사대부도 이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송보다 고려에 3대 복색의 자취가 더 확연한 것을 기록자가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은 분위기도 읽힌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복색을 수단으로 존・비의 차(差)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그저 그때가 신분사회였기 때문일까? 위의 기록들만 가지고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기록들은 기록자들이 중국 하・상・주 3대의 복색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복색에서의 존・비의 차(差)를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데 기준이 되어준 것으로 보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차별이자 불평등인 서(序)・차(差)・별(別)을 바탕으로 정의로운 분배를 추구한 것인가?

기록자는 서기 834년에 흥덕왕이 내린 교지를 제시한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손위와 손아래의 구분이 있고, 지위에도 높고 낮음이 있어서, 법의 규정이 같지 않으며 의복도 다른 법이다. 풍속이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진기한 외래품만을 좋아한 나머지 도리어 순박한 우리의 것을 싫어하니, 예절은 곧잘 분수에 넘치는 폐단에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삼가 옛 법전에 따라 명확하게 법령을 선포하노니, 만일 일부러 이를 어기면 진실로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릴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

교지에 따르면 흥덕왕은 손위와 손아래[上下] 지위의 높고 낮음[尊卑]에 따라 법[名例]의 적용이 달라지며[不同] 옷차림도 달라진다[異]고 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이 순박한 우리의 것[土産之鄙野]을 싫어하고 사치와 호화를 일삼아 ‘달라져야 하는 것’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보았다. 흥덕왕은 옛 법전[舊章]에 따른 명확한 법령[明命]을 해답으로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옛 법전이 중국의 복식 제도라면 그것은 순박한 우리의 것과 무관하여 보인다. 흥덕왕에게 중요한 것은 위아래・높음・낮음[상하존비]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흥덕왕에게, 중국의 복식 제도가 너무나도 좋아보였다기보다는, 규제를 위한 그럴듯하면서도 강고한 기준이 필요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아래・높음・낮음[상하존비]은 서(序)와 차(差)로 대신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먼저 서(序)는 위아래・높음・낮음, 그리고 먼저・나중을 자원이나 기회를 분배하는 일과 관련시킬 때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이 작동하는 범위와 강도를 조절하는 도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차(差)는 어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별(別)은 남녀의 차이를 서(序)가 아닌 것으로 설명하면서도 그 사이에 불가피하게 정당화될 수밖에 없는 불평등이 있음을 시사할 때 사용하는 도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복색을 수단으로 존・비의 차(差)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출처 : Jongjoon Moon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복색을 수단으로 존・비의 차(差)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출처 : Jongjoon Moon

『삼국사기』 「잡지」 ‘색복’에 등장하는 법흥왕・진덕왕・김춘추・문무왕・흥덕왕 등의 권력자들과 그 기록의 기록자들은, 복색의 개성에 무관심하였다거나, 중국 3대를 기준으로 삼국과 고려의 문화를 무분별하게 재단하고 비평하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이 권력자들은 위아래・높음・낮음[상하존비]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복색의 규제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면은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에서 볼 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권력자들이 복색을 이렇게 규제하려 한 것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서(序)・차(差)・별(別)을 바탕으로 자원과 기회의 분배를 추구한 이야기를 좀 더 들여다보자

『삼국사기』 「잡지」 ‘색복’은 차별이자 불평등인 서(序)・차(差) 별(別)을 바탕으로 자원과 기회의 분배를 추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을 제외한, 글의 나머지 부분들은 각기 다른 신분의 사람들의 복색에 관한 규정을 나열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하면 앞에 인용한 부분들이 삼국시대 ‘색복’의 특성에 대한 설명으로서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특성은 『삼국사기』 「잡지」 ‘색복’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서(序)・차(差) 별(別)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삼국사기』 「잡지」 ‘색복’에 삼국시대 사람들의 욕망의 크기와 자원의 크기 그리고 기회의 특성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복색의 규제는 기회와 자원의 분배와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복색의 규제가 기회와 자원의 분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듯하다. 그리고 거기에 보이는 서(序)・차(差) 별(別)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분배를, 그런 분배를 도모하게 된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평등에 반하는 것으로 몰아붙이기만 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 엉뚱해 보일 수는 있지만, 20세기 대한민국에서 시행되었던 교복 폐지와 교복 자율화를 여기에서 떠올려 보는 것이 나름 의미가 있을 듯하다. 20세기 말 한때 대한민국에서는 교복이 전면적으로 ‘금지’된 적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로서 획일적 사고를 불러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조치가 학생들 각자가 입고 오는 사복들 사이의 차이를 통하여 사회에 깔려 있는 격차를 부각시켜 학생들의 사회의식 형성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확산되었고, 뒤이어 학교마다 교복을 자율적으로 정하는 ‘타협책’이 제기되어 장기간 실행되고 있다. 이것은 복색의 완전한 사적 결정을 자유라는 가치와 동일시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듯싶다. 지금 앞에서 타협책이라고 규정하였던 교복 자율화에 대한 격렬한 반감이나 이의 제기를 찾아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교복 자율화가 논리적으로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타협책으로 보이는 데도 그러하다.

지금 사람이 살고 있는 생태계에서 생존을 이어가기 위한 기회와 자원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은 모든 수단이 동원되는 투쟁의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 어떤 맥락과 조건에서는 완전한 평등이 소수자의 기회를 완전히 박탈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실을 보고 있자면 『삼국사기』 「잡지」 ‘색복’에 보이는 것처럼 차별이자 불평등인 서(序)・차(差)・별(別)을 바탕으로 자원과 기회의 분배를 추구한 예에서도 모종의 교훈을 얻어내야 하는 것이, 탈성장 그리고 탈성장에 부합될 수 있는 자원과 기회의 분배 방식을 요청하는 지금의 시대인 듯하다.

* 이 글에 쓰기 위하여 읽은 『삼국사기』의 판본 :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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