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움 특집] ① 미래를 주술화하기 – 「딥 에콜로지」를 읽고

제13회 생태적지혜연구소 콜로키움에서 『딥 에콜로지』(원더박스, 2022) 전반부(1~6장)에 대한 발제문으로 발표된 글이다. 오늘날 생태위기는 “심층”의 근본적 개혁을 필요로 한다. 질주하는 기차를 탈선시키려 하는 심층생태학의 사고를 재주술화라고 부르는 저자의 주장에 귀기울여 보자.

빌 드발・조지 세션스, 『딥 에콜로지』(원더박스, 2022)
빌 드발・조지 세션스, 『딥 에콜로지』(원더박스, 2022)

빌 드발과 조지 세션스가 쓴 『딥 에콜로지』는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심층생태학 번역서다. 두 명의 저자는 오늘날의 생태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개혁 이상의 것이, 다시 말해 우리 시대를 위한 새로운 생태학적 철학의 정립과 이를 통한 생태학적 의식의 함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심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 단어는 또한 기존의 생태학 혹은 운동이 어떤 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1장에서 우선 기존의 환경 및 생태주의 운동을 검토한다. 그중 두드러지는 비판의 대상은 “개량적 환경보호주의”다. 기존의 자연자원 정책을 개선하기 위한 개입을 뜻하는 이 운동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환경단체의 활동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저자들의 비판은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저자들은 환경보호주의가 의미 있고 소중한 작업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매우 전문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고, 경제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제에 근본적인 도전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라 이 운동은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대상의 언어로 주장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가령 한국의 경우 환경단체들이 지난 4대강 사업을 비판할 때 주요한 논거로 삼았던 것 중 하나는 경제성 분석이었다. 4대강 사업은 경제성이 없으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 말고도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근거로 받아들여지리라 여겼다. 그러니까 그러한 언어를 사용해야 사람들에게 환경 단체도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러니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아니라고 이해될 것이고, 자신들의 주장도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어떤 현실적인 전술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만큼 이 사회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경제’와 그것의 ‘발전’에 매몰되어 있는가를 드러낸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경제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그 대상이 경제의 발전에 기여할 때에만 그것을 승인한다. 그러니까 환경을 ‘보호’하자는 주장 역시 어떤 식으로든 경제의 발전에 기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주장은 한낱 “감상주의적, 비이성적 혹은 비현실적인”1, 공상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현실적인 전술을 아주 버릴 수는 없다 해도 그것에만 매몰되는 것은 분명 문제다. 현재 4대강 사업의 결과 초록색으로 변해버린 낙동강은 누가 보아도 생명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고 혹은 경제에 해를 끼친다고 입증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초록색 강이 문제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실 더 이상의 과학적 분석 같은 것은 필요 없을 만큼 누가 보아도 문제가 명백한 그 강을 두고, 강물의 성분이 인체에 해를 끼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엇갈린 주장만 지난하게 오고 가고 있다.

그렇다면 심층생태학은 그러한 개량적 환경보호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개량적 환경보호주의가 ‘현실적인 전술’에 치중한다면 심층생태학의 본질은 “인간의 삶과 사회와 자연에 대해 좀 더 면밀한 질문을 계속 던지는 데 있다.”(P.123) 따라서 그것은 환경문제에 대한 “협소하고 단편적이고 표피적으로 접근하는 차원을 넘어, 포괄적인 종교적 철학적 세계관”을 지향한다. 이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을 나누는 경계란 것은 사실상 존재한지 않는다”(P.126)는 깨달음이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조금 더 덧붙이면 심층생태학은 “개인, 공동체, 그리고 자연 전체 간에 새로운 균형과 조화를 발달시키기 위한 방안”(P.29)으로서, 역자서문에서 잘 정리하듯 “인간-동물-비생물 생태계 전체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성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사상”(P.7)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 인간과 비인간 생명을, 심지어는 모든 사물을 아우르는 의미에서의 — 우리가 연결된 존재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바꾸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저자들은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을 재주술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를 ‘다시 주술화’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저자들이 언급하듯 막스 베버는 ‘세계의 탈주술화’가 ‘도구적 합리성’의 등장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자연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그에 따라 인간의 필요를 위해 이용가능한 것으로, 다시 말해 자원의 덩어리로 이해하는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나’와 ‘자연’은 분리된다. 저자들은 이러한 현대의 지배적인 세계관을 비판하는 3장에서 사회학자 윌리엄 캐튼과 라일리 던랩을 인용하면서 그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사람은 지구상의 다른 모든 생명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들에 대해 통치권을 갖는다.
  2. 사람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다. 자신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으며,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면 어떠한 것이든 배울 수 있다.
  3. 세계는 광대해서 인간에게 무한한 기회를 제공한다.
  4. 인류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이다. 어떠한 문제든 해답이 있기에 진보는 중단될 필요가 없다.(P.89)

물론 심층생태학은 이를 인간중심주의로 이해하며 비판한다. 심층생태학의 관점에서 서구 세계관의 “진보”란 “명백한 퇴보”다(P.98). 이러한 지배적인 세계관에 대응하는 심층생태학의 기본 원리는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1.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행복과 번영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 가치들은 인간의 목적을 위한 비인간 세계의 유용성과는 무관하다.
  2. 인간에게는 생명체의 풍성함과 다양성을 축소시킬 권리가 없다. 다만, 인간 자신의 생명 유지와 관련된 필요를 충족하려는 경우는 제외한다.
  3. 현재 인간은 비인간 세계를 과도하게 간섭하고 있으며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4. 따라서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P.132)

이렇게 진보의 세계관으로 질주하는 기차를 탈선시키려 하는 심층생태학의 사고는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커먼즈(commons)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세계를 재주술화하기: 페미니즘과 커먼즈의 정치』(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라는 ― 제목마저 비슷한 ― 책에서 베버의 탈주술화를 조금 더 정치적인 의미로, 즉 “자본주의적 발달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매일매일 좀 더 의심스러워지는 세계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2 그러므로 그에게 재주술화란, 자본주의가 분할한 것들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의 기계화 그리고 심지어 로봇화는 수천 년에 걸친 인간 노동이 생산할 수 있는 최선인가? 우리는 동물과 물과 식물과 산을 비롯한 타인과 우리의 관계의 공통화(commoning)를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재구축하는 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것은 커먼즈의 담론과 정치가 오늘날 우리에게 여는 지평이다. 그것은 과거로의 불가능한 회귀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이 지구에서 우리의 운명을 집합적으로 결정할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세계를 재주술화하기라고 부르는 것이다.3

여기서 재주술화가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자신을 ‘다시 주술화’하는 것은 심층생태학에 깊은 영향을 끼친 비주류 전통, 예를 들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에서 “오래된 지혜”를 빌리긴 하지만 그것으로 돌아가는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빠지기 쉬운 어떤 유혹은 생태적 영성으로 무장하여 소규모 공동체로 숨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주류 사회에서 물러난들 지구적인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폐쇄적인 활동은 사회적으로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니 재주술화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일이어야 하며, 현재 우리를 분리하는 조건을 재구성하여 ―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 연결된 우리가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회적 삶의 표준이 된 도시에서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어떻게 그 일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진보의 세계관으로 질주하는 기차를 탈선시키려 하는 심층생태학의 사고는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커먼즈(commons)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진은 2013년 스칸디나비아 퍼머컬쳐 페스티벌 전경이다. 사진출처 : Øyvind Holmstad
진보의 세계관으로 질주하는 기차를 탈선시키려 하는 심층생태학의 사고는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커먼즈(commons)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진은 2013년 스칸디나비아 퍼머컬쳐 페스티벌 전경이다.
사진출처 : Øyvind Holmstad

우리는 “비주류 전통과 직접 행동”을 다루는 2장을 참고할 수 있다. 저자는 생태적 의식을 개발하는 데 가장 적절한 유형의 공동체를 비주류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분권·비위계적·민주적인 그 전통의 핵심은 바로 자율적인 공동체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동체를 어떤 이상적인 자연 속 집단에 한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 책이 제안하는 직접 행동 — 입법 개혁, 연대, 시위, 여성운동, 기독교 전통 안에서의 활동 등 — 은 그 자체로 사회에 대한 개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도시 안에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이 제안하는 내용들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즉 생태적 의식의 함양과 상호 연결과 직접 행동은 차례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뒤섞여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우리는 움직이면서 서로 연결되고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그 각각의 일들은 하나의 과정이 품고 있는 여러 모습들이다. 책에서 인용된 릴케는 그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당장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마십시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궁금한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살아 보십시오.”(P.35)

이 책이 줄 수 있는 오해를 좀 더 생각해 보자. 저자는 6장에서 심층생태학적 사고에 영향을 끼친 다양한 사상을 소개한다. 자연주의와 전원주의 전통, 신비주의 전통, 신물리학, 기독교 전통(특히 프란치스코의 사상), 페미니즘, 원주민 전통, 하이데거, 동양의 영적 전통 등이 그 사례들이다. 그런데 탈주술화된 세계에 익숙한 우리는 이 심층생태학적 사고의 원천들을 접하면서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쉽다. 우리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심층생태학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영성적이고 종교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저자의 논의가 과학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인, 때로는 낭만적인 주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생태 의식의 함양에 대한 강조는 구조화된 위기를 개인적인 수양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심층생태학은 마치 이 전 지구적인 위기를 우리 모두가 마음을 고쳐먹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상이나 명상을 대개 세상과 세상의 문제로부터 회피하거나 아무 대응 없이 앉아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삶에는 매우 적극적인 면이 있는데, 그를 통해 자신을 보다 잘 알게 되고 하나의 인격체로 통합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인간이 성숙해지고 자유를 얻는 핵심은, 우리가 수동적이며 반성적 사고 없이 조건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에서 우리 주변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는 쪽으로 전환할 수 있게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P.150)

개선되고 발전되고 문명화되는 길이 아닌, ‘야생지의 보전’의 개념을 생각해 본다. 야생지의 보전이란 계급적 역량의 보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pexels
개선되고 발전되고 문명화되는 길이 아닌, ‘야생지의 보전’의 개념을 생각해 본다. 야생지의 보전이란 계급적 역량의 보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pexels

그러니까 심층생태학의 주장은 혼자 기도하며 구원받는 서사를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데, 위에서 언급하듯이 “우리 주변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기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조는 세계에 대한 정동적 전환과 연결된다. 저자들은 돌로레스 라샤펠의 사상을 심층생태학의 원천으로 소개하면서 그가 “산성비와 산림 파괴에 대한 ‘정보’들은 사람들을 대지와 다시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작업을 했다고 전해 준다. 이는 정보의 바다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확인된다. 신승철이 지적하듯 최근 쏟아지는 위기에 대한 뉴스들은 우리를 각성시킨다기보다 우울감에 빠뜨린다. 그는 그것이 그 뉴스를 ‘정보’로만 받아들인 결과로 이해하면서, 우리가 정동의 관계망에 들어서야 재난과 위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넘어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5 이처럼 심층생태학은 과거에 대한 낭만적 견해의 부활이나 내면으로의 후퇴가 아니라, 정동이 순환하는 관계망을 짜는 것, 그것을 통해 기존의 질서에 개입하고 새로운 삶형태를 구성하는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과 관련이 깊다.

이렇게 우리는 심층생태학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의구심은 남을 수 있다. 그것은 근대 과학의 세계관을 비판하지만, 오늘날의 위기를 체계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계급적 관점이 삭제된 비정치적인 담론은 아닐까?

이러한 물음과 관련하여 야생지에 관한 내용을 살피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저자는 폴섬을 인용하며 게리 스나이더의 주요 업적이 야생지의 재발견과 재긍정에 있다고 언급한다.

스나이더의 주요 업적은 야생지의 재발견과 재긍정이며 동시에 터너가 프런티어6를 닫는 것을 명확히 거부한 것이다. 스나이더는 닫힌 프런티어를 다시 열어 동쪽 방향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는 미국의 역사적 방향을 뒤집어 야생성을 문명 속에서 다시 자라나게 하여 우리 안에 내재한 여러 층위의 에너지들을 끄집어 내려고 했다.(P.154)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미국은 서부로 향하는 프런티어를 따라 확장되며 구축되었다. 「미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미」(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를 썼던 터너는 프런티어를 “야만과 문명의 접점”으로 이해하는데, 여기서 발전되고 문명화된 ‘우리’는 자연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야만의 ‘그들’과 구별된다. 그렇다면 프런티어를 다시 동부로 밀고 나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젠트리피케이션 연구로 잘 알려진 지리학자 닐 스미스의 책, 『도시의 새로운 프런티어』는 미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미를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본래 서부의 황야에 적용되던 프런티어의 이미지는 서부가 말끔히 ‘문명화’ 된 이후, 20세기 후반기에는 미국 동부 도시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즉 미국의 (교외가 아닌) 도심은 ‘도시의 황야’로, 그러니까 “질병과 무질서, 범죄와 부패, 마약과 위험의 온상”으로 이해되었다.7 도심은 ‘개선’되고 ‘발전’되고 ‘문명화’되어야 했다. 이때 낙관주의와 확장, 진보, 문명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프런티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시의 황야’에 대한 정복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프런티어 담론은 18~19세기 서부에서든, 20세기 말 도심지역에서든 정복 과정을 합리화하는 기능을 한다.”8 이 과정에서 도심에 거주하는 도시 노동계급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 사회적 존재라기보다는 물리적 환경의 일부로 인식된다.”9

그러므로 우리는 스나이더가 프런티어를 다시 동쪽으로 확장시킨다고 할 때 그 의미를 계급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야생지는 물론 다양한 생물종의 보전과 유지에 필수적인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는 야생지를 1950-60년대 도시 이론가들이 공포를 느꼈던 도시의 야생지, 즉 도시 다중의 활력이 흘러넘치는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생지의 보전이란 다양한 생명의 보전이면서 계급적 역량의 보전이기도 하다. 우리는 물론 그 두 가지 보전이 잘 연결된다는 것을 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확장된 의미의 야생지를 통해 계급 관점에서 심층생태학을 이해할 수 있다.


  1. 빌 드발·조지 세션스, 『딥 에콜로지』, 김영준·민정희·박미숙·함엄석 옮김, 원더박스, 2022, 21쪽. 이후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숫자만 표기.

  2.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CA: PM Press, 2019).

  3. Ibid.

  4. 해리 클리버는 그러한 운동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자급자족하는 코뮨을 만들기 위한 사회 전반으로부터의 낭만적인 철수는 철수하는 이들과 더 광범위한 투쟁을 분리할 뿐 아니라, 노동계급이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과거에 발명하고 발전시킨 무수한 것들의 포기를 수반한다. 그 과정은 국가 전체가 세계 시장에서 철수하여 자립하자는 일부 종속이론 초기 지지자들의 제안을 소규모에서 실행하는 것과 유사하다. 두 기획 모두 참여한 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일을 안길 뿐이다.”(Harry Cleaver, Rupturing the Dialectic: The Struggle against Work, Money, and Financialization (Chico, CA: AK Press, 2017), p.289).

  5. 신승철, 『정동의 재발견: 가타리의 정동이론과 사회적 경제』, 모시는사람들, 2022.

  6. 책에는 “경계”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프런티어”로 옮긴다. 맥락상 프런티어(frontier)를 옮긴 말로 보이는데, 이후 논의를 위해 이 글에서는 음역하여 옮긴다.

  7. 닐 스미스, 『새로운 프런티어: 젠트리피케이션과 도시강탈』, 김동완·김은혜·김현철·황성원 옮김, 동녘, 2019, 6쪽.

  8. 같은 책, 8쪽.

  9. 같은 책, 7-8쪽.

권범철

도시 연구자라고 쓰곤 하지만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사실 주업은 육아고 다른 건 다 부업이다. 주양육자가 되면서 사회 활동과 멀어져 거의 집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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