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한 자연, 퀴어한 생태윤리

생태윤리에서 말하는 ‘자연으로부터의 배움’은 생물학적 본성을 앞세우는 이성애중심의 기존 규범을 강화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자연’은 늘 영구불변의 고정성을 전제한다. 반면에 들뢰즈의 자연은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차이를 생성하며, 여기서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상호중첩된다. 해러웨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이한 친족’ 형성의 윤리를 제시한다.

생태윤리의 핵심적 가르침 중 하나는 ‘자연으로부터 배우자’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생태윤리가 자연을 자신의 모델로 삼을 때 그 속에는 여성운동이나 퀴어운동이 전복시키고자 했던 규범적 가치가 반복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경계하면서 본 글에서는 생태윤리의 문헌에서 보이는 이성애중심주의에 대해 점검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으로 또는 고정되어 있는 실체로 상정되는 ‘자연’ 개념을 거부함과 동시에, 역동적이자 협력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자연’ 개념을 들뢰즈・가타리와 도나 해러웨이의 목소리를 통해 구상해보고자 한다.

‘자연의 가르침’과 이성애중심주의

일본의 저명한 생태철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1922-2012년)는 에코에티카: 기술사회의 새로운 윤리학에서 유교와 기독교와 같은 종래의 종교적 윤리가 고도의 기술사회에서 그 세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시대진단을 내린 바 있다. 한편으로 「창세기」에서 제시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기독교적 윤리관은 전 지구적 인구과잉이 문제가 되는 오늘날 사회에는 적절한 삶의 윤리가 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남녀가 해야 할 일을 천성적으로 구분하는 유교적 윤리관은 오늘날의 노동의 자동기계화나 정동화와 더불어 성별에 따른 노동분업이 점점 약화되는 상황과는 맞지 않게 된 것이다. 이마미치는 이러한 윤리적 공백과 맞물려 통신 매체의 발달로 한 인간이 관계 맺는 개체들의 범위가 넓어지고, 인간 행위의 파급효과가 자연물 곳곳에 미치므로 자연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을 지는 윤리인 ‘에코에티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에코에티카’인가? 그는 그것을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윤리”1로 요약한다. 자연으로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것일까? 그가 제시하는 자연으로부터의 배워야 할 주요한 삶의 태도는 ‘기다림’이다. 가령 기술사회 속에서 인간은 엄청난 속도로 결과물이 산출되길 바라지만 꾀꼬리는 봄이 오지 않는 한 울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기다림’은 인간의 윤리에 적용될 때에는 ‘이성(異性)에 대한 기다림’으로 나타난다.

한데 기계가 아닌 자연으로서의 인간(기계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즉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자연의 인간은 경우가 다릅니다. 그 생식의 힘으로서 ‘성’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이 기능을 수행하고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개인은 절대적으로 상대를 기다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 자기와 다른 성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남녀의 협력은 비단 아이를 낳는 일만 아니라 여러 다른 면에서의 창조에도 필요합니다. 다른 개체를 기다려야 하는 성, 그것이 인간입니다.2

이처럼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자연 속에서 발견한 ‘기다림’이라는 가치를 교묘하게 이성애를 향한 은유의 토대로 변경한다. 그 결과 그가 구상하는 에코에티카는 퀴어적 삶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퀴어적 삶이란 오히려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거나 역행하는 반자연적인 것으로 위치지어지게 된다.

자연을 인간이 보고 따라야 할 ‘기준’으로 제시할 때 그러한 자연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상정되기 마련이다. 
사진 출처: Guilherme Stecanella
자연을 인간이 보고 따라야 할 ‘기준’으로 제시할 때 그러한 자연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상정되기 마련이다.
사진 출처: Guilherme Stecanella

이마미치 도모노부가 자연으로부터 이끌어낸 이성애중심성은 생태철학 및 생태주의 운동이 ‘자연’으로 사유 및 실천의 중심을 이동시키고자 할 때 저지를 수 있는 흔한 오류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발견한 사실(뻐꾸기의 기다림—이것을 기다림이라고 규정하는 인간주의적 관점은 차치하고서라도—)이 우리가 따라야 할 규범(이성애와 그것의 기다림)의 전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바로 그러한 오류가 자연을 구성하는 특정한 존재들(및 살아있는 생명종)을 배제하고 소외시킬 근거로 기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으로 반생태주의적인 것이 아닐까? 가령 꿀벌을 배제한 자연, 새를 소외시킨 자연, 숲을 생략한 자연 개념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기나 한 것일까? 문제는 그처럼 자연을 인간이 보고 따라야 할 ‘기준’으로 제시할 때 그러한 자연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상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야지만 자연은 기준으로서 적합했었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렇게 설정된 자연 속에서 인간이 발견된 가치는 어쩌면 인간 사회에서 가장 고정적이기를 희망하는 관습이 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이성애적 규범이 ‘자연의 가르침’이라는 초월적 외피를 쓰고 새로운 윤리인 양 재등장했던 것이다.

오귀스탱 베르크의 ‘자연’에 대한 비판

또 다른 생태철학자 오귀스탱 베르크는 일본의 사례를 들어 ‘자연’이라는 이름 아래 생태학적 자연보호와 민족 고유성의 보존이 혼동되는 일이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근대성 아래 파괴되는 두 축으로 자연과 민족이 상정되고, 이때의 ‘자연’에 종종 혼용되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오귀스탱 베르크는 ‘자연’이 민족의 기준으로 삼아지는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국가 혹은 민족의 내부에서 근대성이나 서구와의 단순한 대립을 넘어서게 만드는 내재적 기준[은] 저절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 그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이때 생태학적 의미의 자연은 동시에 ‘한 존재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의미의 자연이다. 이 두 가지 의미[생태학적 의미의 자연과 유사성으로서의 자연]는 인공적인 것과 대립한다는 공통점을 지니는 한편 서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3

자신의 민족이나 국가가 자연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보면서, 그것을 정체성으로 삼는 방식은 인접한 국가인 한국이나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이 한결같이 자기 민족의 정체성의 특징으로 내세우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들이 가장 자연을 심오하게 이해하는 민족이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기들의 정원이야말로 자연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중국의 정원이 자기들의 것에 비해서 지나치게 인공적이라고 보며, 한국인들 역시 일본의 정원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재미있지 않은가!4

요컨대 과학기술문명이나 근대성에 대한 비판에는 ‘자연’이 그 기준으로 등장하곤 하는데, 앞서 살펴보았듯 그것은 이성애중심성(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주장)이기도 하고, 민족의 정체성(오귀스탱 베르크의 비판)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앞서 두 기준을 비판하는 관점에서도 ‘자연’에 대한 동일한 형식의 이데올로기가 활용된다는 점인데, 가령 그것은 자연으로서의 ‘모성적 이데올로기’로 나타난다. 이 세 경우에 공통적인 것은 자연이 인간 사회에 대한 기준이자 척도로 제시된다는 것, 따라서 인간 앞에 미리 놓인 것, 불변하며 지속적인 것으로 상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파악해야 할 자연의 본모습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와 도나 해러웨이의 자연 개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차이 생성의 자연

들뢰즈・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연은 되기의 과정인 동시에 역사와 함께 비가역적으로 변화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들뢰즈는 영구적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존재와 대립하는 자연을 ‘대지’라고 일컫는다. 한다. 대지는 혼돈과 굴곡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의 자연에 대한 사유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들뢰즈・가타리는 스피노자로부터 모든 것을 아우르는 힘이 있는 자연 개념을 이어받고 베르그송으로부터 언제나 운동 중에 있는 무한하며 중심 없는 우주 개념을 이어받아 모든 사물과 살아있는 존재를 서로 연결하는 아쌍블라주(assemblage)로서의 자연 개념을 끌어낸다. 이 자연 안에서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구분은 사라진다.

모든 체계는 저마다 어두운 전조를 포함하고 있고, 인접해 있는 계열들은 이 전조를 통해 비로소 소통하게 된다. 사진 출처: Max Saeling
모든 체계는 저마다 어두운 전조를 포함하고 있고, 인접해 있는 계열들은 이 전조를 통해 비로소 소통하게 된다. 사진 출처: Max Saeling

“인위적인 것은 완전히 자연의 일부를 형성한다.”5 이처럼 자연은 생성하고 연결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인위적인 것과 뒤섞이지만 하나의 통일체로 나아가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의 자연 안에서는 파괴적 힘을 가진 차이들이 있기에, 낭만주의자들이 꿈꾸는 것처럼 그리고 오늘날의 몇몇 생태사상가들이 그 꿈을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은 단순히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자연은 화합‧돌봄‧치유를 보장하는 자연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처럼 들뢰즈・가타리에게서 모든 통합과 화합을 이룰 수 없게 하는 차이에 대한 차이는 ‘어두운 전조’로 표현된다.

소통을 보장하는 이 작인, 이 힘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번개는 서로 차이나는 강도들 사이에서 번쩍인다. 하지만 그 이전에 어떤 어두운 전조가 선행해야 한다. 이 전조는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지만, 마치 음각처럼 패여 있으면서 번개의 길을 전도된 방향에서 미리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체계는 저마다 어두운 전조를 포함하고 있고, 인접해 있는 계열들은 이 전조를 통해 비로소 소통하게 된다.6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차이들이 서로 이질적인 것들 간의 소통을, 따라서 이질적인 것들 간의 아쌍블라주를 가능하게 한다. 들뢰즈의 자연 개념을 퀴어적 비평을 통해 해석하려는 시도들 속에서는 ‘어두운 전조’로 표현되는 이러한 들뢰즈의 차이로서의 차이, 순수 차이 개념을 ‘자연의 퀴어적 부정성’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7 즉 자연 안에는 자연이 결코 동일성이나 질서를 향해 나아가지 않게 하면서 새로운 생성, 연합, 되기로 이끄는 힘으로서의 차이가 존재하며, 그것은 자연에 내재하는 퀴어적 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의 ‘자연문화’와 종을 넘어선 기이한 친족 맺기

들뢰즈・가타리의 자연 개념은 자연을 퀴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지만, 그러한 자연으로부터 어떤 윤리를 도출해내지는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자연은 인간이 원하는 ‘선’에는 무관심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태위기가 가시화된 현재와 같이 인간의 새로운 윤리가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사유를 좀 더 진전시킬 필요가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자연을 기준으로 삼아 무엇을 배울 수도 없으며, 자연이 우리와 다른 사물 및 생명을 통합시켜주기를 기대해서도 안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과제란 무엇인가?

해러웨이는 자연과 문화가 서로 구별될 수 없다는 들뢰즈・가타리의 생각을 보다 구체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자연문화’(natureculture)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가 ‘쑬루세’[‘지하세’나 ‘대지세’로 번역될 수 있는 해러웨이의 독창적 용어]라고 진단하는 현재의 지질학적 조건에서는 자연과 문화뿐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혼종성과 공생성의 얽힘의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고 있다. 그런데 해러웨이가 보기에 이러한 사태에 걸맞지 않게 현대의 인간중심적인 윤리학은 여전히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론적 지위의 격차를 그 바탕에 깔고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역량을 스스로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쁘게는 지구의 파괴를 가속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해러웨이의 저작들에는 이러한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론적 구도를 역전시키고 대등하게 만들고자 하는 과정들이 담겨있다. 그녀의 「사이보그 선언」에서는 기계(도구)와 인간의 지위가 역전된다. 전통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인간과 도구는 능동과 수동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도구는 인간의 의도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되고, 그 목적을 이루고 나면 쓸모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도구/사물/기계가 인간을 규정하며, ‘사이보그’로 표현되듯이 인간의 신체와 기계의 결합 또한 가능하다.

반려종 선언: 개와 사람, 그리고 중요한 타자성』에서는 개와 인간의 관계가 탐구된다. 여기서 개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고,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가 예절을 갖춰 존중해야 하는 타자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는 개뿐만 아니라 비둘기 역시 직업을 가질 수 있다. 해러웨이는 비둘기에게 GPS 등이 들어있는 작은 배낭을 매달아 대기질을 측정하는 〈피존블로그〉의 실험을 비둘기에게 직업과 책무를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에 의하면 비둘기에게 직업과 책무를 부여하는 것을 동물학대로 간주하는 동물권자들은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의 사유 및 윤리학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그녀가 제시하는 윤리적 과제란 “반려종[동반종]들의 세계짓기(worlding)에서 함께 되기(becoming-with)”이다. 즉 비인간들을 적극적으로 세계를 함께 만드는 참여자이자 동반자로 구성원이자 동료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개뿐만 아니라 비둘기 역시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사진 출처: Tapish
개뿐만 아니라 비둘기 역시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사진 출처: Tapish

이러한 관계맺기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비인간을 넘은 친족구성으로 향하게 한다. 혈통 중심의 친족은 이성애와 정상성의 규범을 요구한다. 여기서 인간의 책무는 번식으로 귀결되고, 이성애가 아닌 사랑은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인간이 책임져야 할 대상이 인간으로만 한정되는 인간중심주의적・이성애중심적 윤리학은 이러한 친족 중심의 사고체계에 의해 지탱된다. 이에 맞서 해러웨이는 기이한 친족(oddkin)의 구성을 우리의 과제로 삼는다. 이성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종들과 불안정하고 일시적이더라도 뜨거운 연합을 맺는 것이 해러웨이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윤리인 것이다. 즉 오늘날 자연에 응답하는 윤리란 퀴어한 자연 속에서 퀴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친족 이야기들에는 어떠한 순수함도 없으며, 그에 관해 해명할 책임(accountability)은 광범위하고 영구적으로 미결상태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서 작동하는 세계짓기 안에서의 책임(responsibility) 그리고 세계짓기를 위한 책임은 감염적인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의 배양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응답-능력은 다종 회복이라는 유행병이 아직 점화되지 않은 과정 및 실천을, 심지어 평범한 시간과 장소들에서 땅을 번영시키는 과정 및 실천을, 전염시키기 위해서 종을 가로질러 의미와 물질을 실어 나른다. … 이것을 ‘경멸되는 장소들에 거주하는 것’이라고 부르자. 이것을 빠르게 변이하는 희망의 바이러스라 부르자. 아니 ‘트러블과 함께하기’에 헌신하는 느린 변화라 부르자.8


  1. 이마미치 도모노부, 『에코에티카: 기술사회의 새로운 윤리학』, 정명환 옮김, 기파랑, 2013, 211쪽.

  2. 위의 책, 213쪽.

  3. 오귀스탱 베르크, 󰡔대지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 김주영 옮김, 미다스북스, 2001, 55쪽.

  4. 위의 책, 59쪽.

  5.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2, 184쪽.

  6.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268쪽. 강조는 추가된 것.

  7. Swarbrick, S. (2019). “Nature’s Queer Negativity: Between Barad and Deleuze”. Postmodern Culture, 29(2). 참조

  8.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1, 114쪽.

오귤희

연구공간L 연구원, 생태적지혜연구소 조합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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