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에 대해 말할 ‘때’

기후위기의 현실은 강력하다. 문명을 삼킬지도 모른다는 과학적 예측이 불안을 키운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전하는 것으로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없다. 기후위기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말해야 한다.

처음으로 ‘지구온난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준 후배는 “얼음이 녹아 북극곰들이 헤엄을 치다치다 익사한대요”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는 말처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사건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는데, 그 생경한 이미지가 재밌고 우스꽝스럽게 다가왔다. 90년대는 여전히 4계절이 뚜렷했고 에어컨 없는 집도 살 만했다. 만일 그때 누군가 기후변화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들이대며 ‘너도 위기라는데 동의하란 말이다’라고 위협했다면 우리는 더 이른 시점에 기후문제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개인적으로 기후 문제를 삶의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드리는 데까지는 10년도 넘게 걸렸다.

북극곰 이야기를 처음 들은 이후, 다양한 기후변화 정보를 접했는데도 불구하고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실감 나지 않았다. 20세기에 펼쳐진 압도적인 규모의 전쟁이나 신자유주의, 중국의 성장과 같이 거대 서사는 ‘인류사’가 그 중심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설마 지구과학이 나머지 사회체제를 뒤흔드는 변화의 중심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지구 자체가 서사의 전면에 등장하다니.

그렇다면 개인사에서 ‘대체 언제 기후 위기를 진지하게 사유했었나?’를 되물어 보았다. 그때는 2018년 말이었다. 2018년 가을에 인천 송도에서 IPCC 총회가 있었고 1.5℃ 목표치나 1℃ 상승, 400ppm 같은 데이터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땐 그레타 툰베리도 유명해지기 전이었고 조천호 선생님도 모를 때였다. 한마디로 신뢰가 가는 스타강사는 그때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2018년 송도 IPCC 10월 총회에 맞춰 녹색평론 163호(2018년 11-12월)은 「기후 위기와 농적 삶」을 타이틀로 편집했지만, 김종철 선생님의 메시지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고 텃밭을 일구자는 간결한 메시지였다. 특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식량주권, 농민 유토피아와 같이 기존의 녹색평론이 꾸준히 주장하던 바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환경 문제의 바이블로 생각했던 녹색평론도 궁금증을 제대로 채워주지 못하는 가운데, 노동운동가 출신의 변호사이신 이치선 님의 글 「기후변화의 최전선」을 정독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글은 담담하게 북극에서 벌어지는 빙하의 해빙 상황과 티핑포인트를 다루고 있었는데, 2~3차례 정독해도 ‘과학적 종말론’과 다르지 않았다. 글이 다루는 정보는 크게 2가지였다. 첫 번째는 1980년 대비 2012년 빙하의 면적은 50%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바다 표면에서 관찰되는 면적이 아니라 수면 아래 총 부피 기준으로 20%도 남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30년간 북극 빙하의 80%가 녹아 버렸고 빙하가 없는 여름은 2065년으로 예상되었지만 2025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는 티핑포인트 이후에 벌어질 양성 피드백의 규모였다. 시베리아 앞바다 여름철 수온은 7℃ 정도였으나 2015년 현재 17℃로 상승했으며 이는 영구동토층의 메탄은 물론 대륙붕에 저장된 탄소를 충분히 방출할 수준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동시베리아 대륙붕의 탄소 저장량은 1,400기가톤으로 추정되는데, 산업혁명 이후 인간에 의해 배출된 전체 탄소량 470기가톤과 비교하면 양의 되먹임에 따라 그 일부만 유출되더라도 그 영향력은 상당할 것이라고 했다. 녹색평론에서 읽은 이 글은 기후 비관론에 빠질 충분한 정보였다. 북시베리아 툰트라에서 벌써 관찰되는 지름 80m에 달하는 크레이터들은 메탄이 빠져나간 흔적들이며 이는 티핑포인트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증거들이 아닐 수 없었다.

기후 위기는 이미 공포

기후 위기 대응에 있어서 핵발전소를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핵의 잠재적인 위험성 때문이다. 사진출처 : Qubes Pictures
기후 위기 대응에 있어서 핵발전소를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핵의 잠재적인 위험성 때문이다.
사진출처 : Qubes Pictures

녹색평론의 「기후변화의 최전선」을 읽은 이후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많은 독서를 하게 되었다. 기후변화는 이미 1990년대부터 빌 매키븐, 제임스 핸슨, 제임스 러브록 등 다양한 기후과학자들에 의해 그 위기가 폭로되었고 그저 관심이 없고 배우지 못해 몰랐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 호컨의 『플랜 드로우 다운』을 읽을 때 탄소는 에어컨과 냉장고의 냉매로부터 자동차, 발전, 건축, 축산업, 농업, 가공, 수송, 의류 등 인간의 모든 활동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숨만 쉬어도 탄소가 배출되니 말이다. 그 책의 목표인 해결책을 읽고 있으면 과연 이 해법은 실현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때부터 기후 위기는 대응이 매우 어려우며, 따라서 인류는 위험 앞에 방치된 상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데이터들을 접할 때, 그 내용이 끔찍할수록 귀담아들어 주었다. 나는 과학적으로 안전성 평가가 불분명한 상황이라면 극단적 결과를 전제해야 리스크 관리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기후 위기 대응에 있어서 핵발전소를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핵의 잠재적인 위험성 때문이다.

후쿠시마에서 벌어진 수소폭발로 인한 핵 유출 사건은 핵발전소 운영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중 가장 재앙적이고 극단적인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 가동 중인 24기의 발전소는 안전하게 전기를 생산할 수도 있지만 내일 당장 폭발할지도 모른다. 극단적 사건의 개연성. 바로 이 확률이 곧 탈핵의 근거가 된다.(평상시에도 방사능 유출은 매일같이 일어난다. ‘기준치 이하’일 뿐) 과학적으로 불확실한 경우 극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최악의 결과’는 정책 결정의 우선순위를 정해왔고 재앙에 대한 사유는 실제로 일어날 재앙을 미리 예방하고 준비하기 위한 정책 결정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후 위기의 재앙적 정보를 유통하는 것이 정말 사람들을 움직여 정책 방향을 뒤바꿀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Pete Linforth
기후 위기의 재앙적 정보를 유통하는 것이 정말 사람들을 움직여 정책 방향을 뒤바꿀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Pete Linforth

1983년 칼 세이건 그룹이 제기한 가설인 ‘핵겨울’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이다. 핵전쟁 이후 대기에 방출된 에어로졸로 인해 전 지구적인 냉각이 발생하며 그 결과 농업 파탄을 비롯한 생태적 재앙이 벌어진다고 예측했다. 이 이론은 핵의 위험을 강조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강하여 핵 억제의 선한 동기가 있다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비판받는다. 하지만 ‘핵겨울’이라는 아이디어는 대중이 핵무기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도록 자극했고 정부가 실제로 핵군축을 하게 만들었다. 최악의 경우를 말하기, 재앙을 사유하는 것은 행동을 강요할 수 있다. 기후 상승이 초래할 극단적 시나리오에 대해 알게 되면 1.5℃를 지키기 위한 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동의하게 되며 이는 곧 정책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이다.

기후변화 대응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비관론에 깊게 공감했고 전술적 종말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후 위기의 재앙적 정보를 유통하는 것이 정말 사람들을 움직여 정책 방향을 뒤바꿀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지금/당장 결단을 내리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위기의 극단적 상황을 말하는 행위’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아무것도 대응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최악이 기준이 되어야

할리우드 영화는 수많은 반자본주의 주제를 상업적으로 활용하여 성공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을 찾고 보면 악한 기업인 경우가 많다. 부패한 정치인과 결탁한 기업이 도시를 망치거나 기술을 악용하는 영화는 수도 없이 많다. 《오징어 게임》이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한 드라마임은 자명해 보인다. 지젝의 지적처럼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작품은 어쩌면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기는커녕 실제로 강화한다고 말한다. 영화 《월-E》가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지구 행성의 생태적 위기를 다루고 있으며 이는 소비 자본주의가 지구를 약탈한 결과로써 언뜻 반자본주의적 태도로 해석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보수적인 관객들로부터 비난받기도 했다. 마크 피셔는 주류 영화 제작사가 반자본주의를 공공연하게 상연하는 것은 대중들이 양심의 가책 없이 소비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스펙터클을 즐긴다. 영화 속에서 잠시 정의는 실현되고 우리는 다시 자본주의를 살아간다. 바타이유의 에로티즘 개념과 같이 금기는 더 강렬한 욕망을 만든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한다. 지젝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이러한 부인 구조에 의존한다. 화폐 자체가 아무런 내재적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징표일 뿐이라고 분석하면서 동시에 화폐의 신성한 힘에 빠져든다. 이러한 분열적 행동은 정확히 앞서 말한 그 부인에 의존한다. 즉, 머릿속에서 화폐를 거부하는 거리두기를 통해 화폐는 그 내재적 무의식 속에 금기를 머금게 된다. 에로틱을 유지하기 위해 금기가 필요하며 그 금기는 자본주의의 음화(陰畵)로서의 반자본주의다.

탄소 사회는 탈탄소 서사를 삼킬 것

기후변화나 생태적 위험에 대한 미디어의 태도는 광고나 마케팅의 활용 수준에 머무는 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넷플릭스에는 상당히 많은 생태 고발 다큐멘터리가 올라와 있다. 기후 위기, 플라스틱, 동물멸종, 해양오염, 빈부격차, 제3세계 빈곤 문제 등등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 단체가 다루는 대부분의 영역에 해당하는 미디어 컨텐츠가 제공된다. 넷플릭스가 그와 같은 컨텐츠를 제작하고 올려두는 것은 그 수요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각국의 대중들은 각자의 TV 앞에 앉아 생태 환경의 실상을 보며 개탄하고 걱정하고 다짐도 해 보며 개별적인 상념 속에서 지구라는 하나의 행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생태 문제가 이토록 공공연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환경에 대한 이와 같은 심리적 처리 방식은 낯선 게 아니다.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고 말하고 생태계가 곧 한계 상황에 내몰릴 것이라고 말한다. 인정하고 그렇다고 답한다. 《월-E》에서 뚱뚱한 인간들은 단지 비난과 풍자의 캐릭터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제공한다. 그들은 일론 머스크와 같은 마초 기업가처럼 지구 생태계는 위험하지만 결국 살아남을 것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에 제공한다. 지구가 위험하니 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드시 우주정거장이나 화성 이주 계획을 오버랩한다. 지구 자원의 고갈은 일시적인 결함일 뿐이지만 ‘혹시 지구가 회복 불가능하더라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텃밭을 가꾼다고 말해야

자극적인 기후재앙에 대한 병렬적 정보 나열은 결국 탄소 소비를 줄이지 행동 변화를 낳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반자본주의적 금기가 필요하듯 기후 위기에 대한 종말론적인 언급은 탄소 체제에 아무런 흠집을 내지도 못한다. 종말이라는 스펙터클은 백악기 대멸종과 같은 이미지와 중복되며 더욱더 비현실적이 되고 만다. 공간적으로 제3세계의 일로 치부되거나 시간적으로 너무 과거이거나 너무 미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생태운동가가 기후 위기가 곧 문명의 붕괴로 이어진다고 말하면, 그것은 과학적인 주장이지만 선전선동의 추상성으로 인하여 아무런 행동의 변화를 낳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탄소 문명에 대한 ‘비판’은 어떠한 해결책과도 접속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기후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태양광과 풍력에 대한 이야기, 귀농에 대한 이야기,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 기후 행동에 대한 이야기로 대체 되어야 한다. 전술적 종말론의 태도가 아니라 전술적인 미시적 혁명의 태도를 가지고 지금, 여기에서 도래할 시간 속에서 살아가야 할 문화를 앞당길 수 있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기후 위기의 공포를 말하더라도 그 마지막은 그래서 나는 어떻게 변했고 나는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 말해야 한다.

고 김종철 선생님께서 『캉디드』의 작가 볼테르의 권유를 인용하면서 은유적 텃밭이 아닌 각기 나름대로 진짜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다시 떠올린다. “우리의 텃밭을 가꾸자”는 18세기 여러 세상을 유랑하면서 기아, 질병, 약탈 등 여러 가지 불행을 겪은 후 캉디드가 내린 결론으로 전해진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주장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문학적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밭을 가꾸자는 슬로건이다. 기후 위기에 대해 말할 때, 그 후렴은 항상 그/래/서 나는 텃밭에서 직접 반찬거리를 만들었다고 말하기 위해 애쓰기로 하였다.

두더지

쌍둥이를 낳아 공동육아를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 하여 나를 상징할 수 있는 동물을 찾다가, 나는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살고 있는 사람 같아 두더지라고 정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