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직업(Post Occupation)시대 농(어)촌에서 생업(生業) 만들기

일자리(노동)가 불안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초조함과 공포는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재해석의 가능성은 없는지 찬찬히 살펴보고자 한다.

청년실업, 조기퇴직, 명예퇴직(직장을 다니다 중간에 퇴직하는 것이 어떤 명예를 주는지 모르겠습니다만)등 일자리(노동)가 불안합니다. 일(노동), 소득, 생활로 이어지는 개인들의 경제활동 고리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삶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일(노동), 소득, 생활로 이어지는 경제활동 고리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삶을 회복할 수도 있겠습니다.

‘직장을 잃을 것’이라는 조장된 노동의 미래가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하고 능동적으로 고립과 경쟁에 나서게 합니다.
사진 출처 : ar130405

때에 따라서는 ‘어떻게’보다 ‘뿌리를 찾는’ 질문이 해답을 줄 경우가 있습니다. 일과 노동이 시작될 때로 돌아가 보면 일과 (임)노동은 다릅니다. 임노동이 기업주(자본가)에게 임금을 받으려고 직업을 구해 노동력을 파는 것이라면 일은 어원 ‘이루다’에서 알 수 있듯 임금을 받기위한 활동이 아니라 하고 싶은, 할 일을 찾아 자기를 이루는 개인의 사회적 활동입니다. 아직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어냐고 묻는 것이 이런 흔적입니다. 그래서 일과 노동을 따로 떼어놓아야 합니다.

일과 (임)노동을 떼어놓고 보면 직업으로의 (임)노동과 일의 위기는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노동의 위기는 ‘오래된 미래’이고 ‘선제적 위협’입니다. 산업혁명 초기 러다이트(Luddite)운동의 발단이 된 생산기계 등장부터 시작해 오늘에서는 디지털혁명과 인공지능(AI_Artificial Intelligence)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40부터 1970년까지 극적인 성장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늘 그랬습니다. 미래가 현실화된 ‘직장을 잃을 것’이라는 조장된 불안한 노동의 미래가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하고 능동적으로 고립과 경쟁에 나서게 합니다.

자본주의 위기가 본격화된 2000년 이후 기업가는 늘 임금(노동자) 때문에 사업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생산에 따르는 원가상승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기업가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익극대화를 위해 노동을 (자동)기계화하는 것이 최대목표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을 통해 성장한 자본주의가 노동을 죽이려고 하는 꼴입니다. 그러니 노동자는 늘 불안하고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IMF, 금융위기, 4차 산업혁명(Industrial 4.0), 코로나19팬데믹, IOT(Internet of Things) 이름을 달리한 (임)노동의 위기가 인공지능으로 끝에 다다를 것 같습니다. 1928년 100년 이내로 노동시간은 하루 3시간, 일주일 15시간으로 줄어들 것이라던 케인즈의 예언은 노동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노동을 빼앗기는 종말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사실 ‘일’을 톺아보면 일의 위기는 더 오래되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나를 이루는 일에서 내가 멀어졌는지 그 시작을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일의 위기는 개인이 가진 노동력을 노동시장에서 판매하는 자본주의가 등장하고서부터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때부터 나를 이루는 일은 자기가 살던 터전을 떠나 기업가가 주는 임금(소득)을 위해 포기해야 했고 차츰 더 많은 부(富)의 욕망을 이루려는 신기루를 찾아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생산력 증대가 노동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가져오리라는 기대는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자기 실종의 말을 되뇌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사치스러운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신화 ‘시지프스’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에서 더 많이 더 빨리 노동을 팔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눈치 빠르게 주위를 살피면 노동계약을 통해 얻은 직장, 직업도 노동의 위기와 함께 그 끝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파국 속 창조라고 할까요? 일과 노동 두 위기가 겹쳐지면서 새로운 일이 자연스레 생성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창업하고 프리워커(Free Worker)란 이름으로 하고 싶은 일과 노동을 병행하는 타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 일을 다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과 노동의 위기 속 새로운 흐름을 소멸지역(자본의 효율성이 낮은 농(어)촌이라는 폄하)이라 일컬어지는 농(어)촌으로 돌려볼 수 있습니다. 어렵게 돌려놓지 않아도 농(어)촌을 향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도이촌, 자연생활, 치유, 생태적 삶의 배경으로 농(어)촌을 다시보고 있고 누구나 한번쯤 도시를 떠나 농(어)촌의 생활을 한번쯤 꿈꾸게 합니다. 그런데 생태적 생활로 회귀하려는 농(어)촌의 생활을 가로막는 높은 벽이 있습니다.

농(어)촌이 풍요로운 공동체가 된다면, 포스트직업시대의 대안으로 또 기후위기에 적응할 수 있는 문명전환의 실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 Shane Rounce

그 높은 벽이 바로 직장입니다. 청년이나 중장년의 농(어)촌 생활을 가장 어렵게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문제는 직장이 아닙니다. 문제는 생활을 위한 소득이고 폼(form)입니다. 직장이 있어야 소득이 있고 시장이 만들어내는 폼(form)이 난다는 최면에 걸린 것뿐입니다. 농(어)촌에서 생활이 가능한 소득을 얻을 수 있다면 스스로 폼(foem)나게 할 수 있다면 농(어)촌은 포스트직업시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방향의 실험이 ‘반농X’와 ‘생업’입니다. 전업농이 아니라 내(가족)가 먹을 만큼의 농사를 지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반농X’고 전업을 갖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계절에 따라 취향에 따라 즐겁게 하는 일이 ‘생업’입니다.

이미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을 창조하는 일의형태연구소가 아와지섬에서 새로운 일의 형태를 연구하고 실천해왔습니다. 섬 안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 찾기 위해 다양한 강사를 초빙하여 새로운 형태의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강좌를 열었습니다. 지역과 개인이 만나서 찾은 독창적인 일에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때 새로운 일이 창조된다는 생각입니다. ‘머물고 싶은 숙소 연구회’, ‘밭일을 생각하는 연구회’, ‘바다를 보물로 만드는 연구회’ 등 기존에 했던 일을 자신과 지역에 어울리게 재배치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청년들이 집짓기, 디자인, 요리, 행사진행 등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소득을 얻는 전업이 아닌 ‘생업’과 같은 프리워커(free worker)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또 모 지역자치단체는 ‘반농X’와 같이 연극인들에게 집과 논밭을 제공하면서 지역에서 연극 활동을 병행할 수 있게 하는 실험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농(어)촌에서 ‘반농X’와 ‘생업’으로 다양한 일의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하고 농(어)촌이 이렇게 창조된 무수히 많은 일들로 식, 의, 주,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풍요로운 공동체가 된다면 농(어)촌은 소멸지역이 아니라 오히려 포스트직업시대의 대안으로 또 기후위기에 적응할 수 있는 문명전환의 실현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농촌은 농사를 짓고 산다.’는 오래된 정체성을 해체하고 21세기에 어울리는 전일적인 삶이 가능한 새로운 농(어)촌 생활을 발명해야 합니다.

이무열

지역브랜딩 디자이너. (사)밝은마을_전환스튜디오 와월당·臥月堂 대표로 달에 누워 구름을 보는 삶을 꿈꾼다. 『지역의 발명』, 『예술로 지역활력』 책을 내고는 근대산업문명이 일으킨 기후변화와 불평등시대에 ‘지역이 답이다’라는 생각으로 지역발명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하며 곧 지역브랜딩학교 ‘윤슬’을 시작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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