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빛나리

나의 모양 그대로 살아가는 것에 집중한다면, 서로의 모양과 나의 모양 그대로에 집중한다면,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배제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인간이 가진 가능성과 잠재력을 믿기에 모두가 잘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 거라는 작은 믿음으로, 나는 나스럽다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질문해보려 한다.

“인간의 가능성과 잠재력이 기후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출할 것인가?”

왠지 모르게 ‘있어 보이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질문만큼 어렵지 않다. 그냥 나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인간이 저질러놓은 기후 위기에서 한 발자국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는 곧 조화로움에 대해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 사람이 동일성을 추구하고 있는 지금의 이 세계는 과연 조화로운가? 누군가를 배제하고, 미워하고, 혐오하고, 무시하고, 차별하는 일들이 가득한 세상이지 않은가? 인간 중심적인 세상에서 비인간 동물들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착취당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살아가야만 하며,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뚜렷해 배제되는 존재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세상에는 불안들이 가득하다. 수많은 불안 중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하는 불안함이 유독 눈에 띈다. 흔히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동일성을 추구해야 하고, 그 동일성에서 벗어나면 불안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 불안함이 나를 포함한 주변을 살피지 못하게 만들고 나의 고유함을 잊게 만드는 것 같다. 내가 나를, 내가 너를, 내가 우리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은 지금의 기후 위기의 상황과도 닮아있다.

흔히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동일성을 추구해야 하고, 그 동일성에서 벗어나면 불안함을 느끼게 만든다. 사진 출처 : Carson Arias

어른들은 나에게 항상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의 일부분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왜 나의 일부를 버리면서까지 타인의 삶과 비슷해져야만 하는 걸까? 그래서인지 요즘 나는 나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내 시간의 대부분을 쓰고 있다.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문득 나스럽다는 것이 뭘까, 어떻게 하면 나스럽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모양 그대로 살아가는 것에 집중한다면, 서로의 모양과 나의 모양 그대로에 집중한다면,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배제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인간이 가진 가능성과 잠재력을 믿기에 모두가 잘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 거라는 작은 믿음으로, 나는 나스럽다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질문해보려 한다.

죤지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께서 나를 ‘우리 죤지’라고 불러주시곤 했다. 그러자 곧장 친구들도 나를 죤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를 애정있는 목소리로 죤지라고 불러주는 게 참 좋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죤지인 게 참 좋다. 지금은 간디 어린이학교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아이들에게 죤지쌤이라고 불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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