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반, 속도의 극한

현대인의 식문화에서 햇반은 변종이다. 햇반은 하나의 브랜드명이지만, 즉석밥을 일컫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즉석밥은 속도 극한의 결과물이다. 밀키트는 최소 냄비라는 도구를 쓰고, 컵라면은 최소 물을 끓여야 한다. 하지만 즉석밥은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밥이 된다. 작은 손길도 사라진 즉석밥에는 현대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요즘 1인 가구 열에 여덟은 즉석밥을 먹는다. 즉 햇반 전성시대다.

영화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에서 플래시는 스피드포스를 갖고 있다. 그는 일반인이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냐면 잭 스나이더 감독이 “그가 움직이는 속도로 움직이면 사람들의 피부가 몸으로부터 분리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다. 영화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의 명장면 중 하나도 이 스피드포스에서 비롯되었는데, 영화 속 빌런, 스테픈울프가 마더박스를 이용해 지구를 파괴하려고 하자 플래시가 극한 속도로 시공간을 거슬러 올라서 마더박스의 작동을 막아낸다. 속도의 극한으로 시공간의 회귀 또는 삭제를 일으킨다. 나는 이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는 ‘빠름’에 대한 소유욕이 강렬하게 올라왔다.

최근 판타지 소설이나 드라마 역시 남들과 다른 시간선에서 미래를 알고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잡는 과정을 소재로 삼는다. 이는 단순 시간적 회귀가 아닌 미래를 알고 선점할 수 있는 속도에서 끌림이 생긴다. 빠름에 대한 욕망은 현대사회와 맞물려 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시공간의 삭제를 가져다줬다. 점과 점이 이어져서 선이 되고, 선이 이어져서 면이 되는 과정이 인식의 확장이라면 기술은 면을 선으로, 선을 점으로 환원시킨다. 교통수단의 발전을 예를 들어보자. 빠르게 달려야 하는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풍경이 면으로 보이지 않고 선처럼 늘어져 보인다. 하얀 설산도 늘어져 하얀 선으로 지나친다. (보인다는 인식보다 지나친다는 인식이 더 크다.) 또 비행기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설산은 작은 점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시공간 삭제를 부여한다.

빠름에 대한 욕망은 현대사회와 맞물려 있다. 사진 출처: toine G
빠름에 대한 욕망은 현대사회와 맞물려 있다.
사진 출처: toine G

속도의 철학자로 불리는 폴 비릴리오는 “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비행기나 기구)를 날게 만든다는 것은 추락의 발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의 사고체계를 ‘질주학(dromology)’이라고 정의하며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속도(벡터)를 철학적으로 접근했다. 문제는 속도의 극한이 직접적으로 인식의 부재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비행기로 8시간을 걸려 도착하는 동안 우리는 한국과 프랑스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를 알 수 없다. 인식은 한국과 프랑스에 국한된다. 또는 유튜브로 두꺼운 철학책의 요약본 영상을 보았음에도 책의 A-Z 논리를 알지 못하고 Z에만 도달한다.

인간은 시공간의 삭제로 ‘여유’가 생겼다고 기뻐하지만 사실 ‘공백’이 생겼다. 며칠 전 ‘로켓프레시를 사용하지 않는 건 성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콘텐츠를 보게 되었다. 내용의 요지는 이렇다. 손가락 몇 번 클릭으로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오후에 주문하면 새벽에 오는 배송시스템을 이용해 자기개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백이 존재한다. 그 물건이 누구의 손에 닿아 어떻게 생산되고 어떤 식으로 옮겨지는지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짧고 편한 시간이지만 줄어든 시간만큼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시간을 알 수 없다. 물건의 역사는 사라졌다.

현대인의 식문화에도 이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 햇반이다. 햇반은 속도 극한의 결과물이다. 밀키트는 최소 냄비라는 도구를 쓰고, 컵라면은 최소 물을 끓여야 한다. 하지만 햇반은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밥이 된다. 작은 손길도 사라진 햇반에는 현대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요즘 1인 가구 열에 여덟은 햇반을 먹는다. 즉 햇반 전성시대다. ‘햇’이란 순수 한글과 ‘밥 반(飯)’이라는 한자가 조합된 어색한 말이지만 이젠 누구도 ‘햇반’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즉석밥 = 햇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70%에 가까운 높은 시장 점유율과 선호도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햇반은 지속가능한 식문화 안에서 특이한 위치에서 있다. 쇠락하는 쌀 시장에서 그나마 팔리면서도, 소비되는 양 만큼의 플라스틱을 배출하기에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즉석밥 시장 점유율 1위는 CJ제일제당의 ‘햇반’으로 66.9%를 차지하고 있다. 1996년에 처음 출시된 햇반은 2001년 매출이 96억 원에서 2015년 2223억 원으로, 2020년 5600억 원에서, 2021년 6860억 원으로 급성장했다. 즉석밥 시장의 성장은 1~2인 가구의 증가와 맞물려 있다. 2000년 226만 가구였던 1인 가구가 2015년에는 518만 가구로, 2020년에는 600만 가구로 증가했다. 통계청은 2045년에는 801만 가구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다. 20년 만에 전체 가구의 15.5%(2000년)에서 31.7%(2020년)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2인 가구까지 포함한다면 2020년 기준 전체 가구 중 1~2인 가구의 비중은 60%에 육박한다. 2010년에 48%였던 비중에 비해 약 12%가 올랐다. 또 오픈서베이의 조사에 따르면 1인 가구는 간편식을 주에 평균 2.8회, 밀키트를 주에 평균 1.2회를 취식한다. 간편식 구매품목에서 20대, 30대, 40대 모두 가공밥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20대, 30대의 경우 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식사 시간이 줄어들면서 생긴 여가시간에 1~2인 가구는 무엇을 할까? 2022년 10월 4일(화) 동아일보 신문에 1인 가구 42%가 투잡을 한다고 보도했다. 그 이유로 여유·비상자금 보유(31.5), 잉여 시간(19.4), 생활비 부족(14.1)를 꼽았다. 1~2인 가구가 즉석밥을 소비하는 이유는 단순히 편해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언급했던 오픈서베이 조사에서 밝힌 간편식을 이용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순위별〉

  1. 혼자 먹기에 편해서
  2. 집에서 요리하기 귀찮고/어려워서
  3. 집에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바로 먹을 수 있어서
  4. 적은 과정으로 빠르게 먹을 수 있어서
  5. 주변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어서
  6. 외식 또는 배달이 번거로워서
  7. 가격이 저렴해서
  8. 맛이 좋아서
  9. 위생상 안전해서

1순위인 ‘혼자 먹기에 편해서’를 제외하고 2~4순위는 모두 ‘시간에 대한 피로감’과 관련이 있다. 이는 절대적 식사 시간에 대한 부담감이 아니라 상대적 시간이 주는 피로감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고려대 안산병원 연구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평균 식사 시간은 5~15분이다. 식사 준비 시간까지 생각한다면 식사를 차리고 마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넉넉히 1시간 이내일 것이다. 1인 가구인 나 역시 그 안에 식사를 마무리한다. 어쩌면 현대인은 식사를 하나의 ‘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바쁜 현대인이라는 오래된 자화상은 햇반의 성장에 오로지 담겨 있다. 삶의 에너지를 채워주는 1시간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여유가 없는 것일까.

나 또한 자취 초기에는 햇반을 애용했다. 내가 직접 구매한 적은 없지만 부모님께서 보내시는 햇반을 먹으면서 삶을 꾸려갔다. 전자레인지 3분이면 맛을 떠나서 밥이 되었고 주말에 몰아서 만들어둔 반찬을 꺼내 먹으면 식사 시간은 빠르면 20분 안에 끝이 났다. 그러나 바쁜 식사를 마무리하고 몇 시간이 지나면 ‘내가 식사를 했나’라는 왠지 모를 허기가 들었다.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햇반으로 차려진 식사는 식사가 아니야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식사 또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인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햇반으로 줄어든 시간이 단순 절약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빼앗은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폴 비릴리오는 소유된 시간의 양은 사회적 피라미드를 이룬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주어진 절대적 시간은 24시간이지만 사회적 계급이 높을수록 상대적 시간을 더 많이 소유한다. 이 구조는 상위 계급이 하위 계급의 시간을 가져옴으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식사를 차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정부를 두고, 이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운전기사를 둔다. 조금 더 대중적으로 내려온다면 걸어서 15분 거리를 자동차를 타고 5분 안에 간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자동차 덕분에 10분이라는 시간이 줄어들지만, 자연은 자동차 5분 운행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 때문에 해독하는 시간, 5분 이상의 수명이 줄어든다. 햇반도 역시 마찬가지다. 햇반은 1996년부터 2020년까지 30억 개가 팔렸다. 전 국민이 60개씩 먹은 것이다. 플라스틱 30억 개가 분해되는 시간만큼의 수명이 줄어들었다.

나는 햇반으로 줄어든 시간이 단순 절약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빼앗은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진 출처: Sylwia Bartyzel
나는 햇반으로 줄어든 시간이 단순 절약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빼앗은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진 출처: Sylwia Bartyzel

CJ제일제당은 햇반 용기의 플라스틱 배출 감소를 위해 햇반 플라스틱에 관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제당슈만’을 보면 햇반 플라스틱은 햇반 용기만 구분해서 분리해야 하고, 별도의 공정을 거쳐야 해서 그렇지 재활용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비자가 햇반 용기가 재활용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하는 이유는 분리선별장에서 추가 노동력과 비용 때문에 일반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일까? 잘못된 오해일까? 햇반 용기는 ‘Other 플라스틱’이다. 이는 두 가지 이상의 재질로 구성된 복합 플라스틱을 의미한다. 햇반 용기의 플라스틱은 95%가 재활용이 가능한 폴리프로필렌(PP, Polypropylene)로 되어 있고 5%는 내부 산소 차단층 형성을 위해 에틸렌 비닐 알코올로 되어 있다. 그 5%로 인해 일반 플라스틱 재활용 공정에서 소화할 수 없다. 문제는 이 5%를 처리할 수 있는 시설과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지자체가 많다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재활용은 불가능한 용기이다. 이는 지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생산 기업에서 감당해야 할 문제로 보인다. 지자체에서 모든 기업의 생산품에 따른 개별 처리시설을 갖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CJ제일제당도 이 문제를 인식했는지 다른 방식으로 플라스틱 배출을 줄이고 있다. 먼저 용기의 두께를 줄이는 것이다. ESG 경영을 선언하고 햇반 용기의 두께를 40% 가까이 줄였다. 두 번째는 자체회수이다. 몇몇 대형마트에 햇반 수거 공간을 만들어 소비자가 직접 배출하거나, 특정 수거 가능한 상품을 사면 온라인 수거 시스템을 통해서 회수기사가 방문하여 햇반 용기를 수거해간다. 단 모든 햇반 용기를 수거하지 않는다. CJ제일제당이 한정한 상품만 가능하다. 세 번째는 이 수거된 용기를 플라스틱 원료로 가공하여 다른 상품의 포장재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 포장재는 결국 버려질 쓰레기가 된다. 얼마만큼의 성과가 있었을까? 기사를 준비하며 CJ제일제당에 두 차례 문의했지만 해당 내용은 내부 자료라서 줄 수 없다는 답변과 동시에 기존 제공된 인터뷰나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얼마나 수거되었을까 궁금하다.

이처럼 플라스틱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참 대단하지만, 그 목적이 사회와 환경보다 즉석 밥 사업 흥행에 있기에 아쉽다. CJ제일제당의 행보는 기이하다. 2019년에는 밥솥을 가져오면 햇반 1년치로 바꿔주는 이벤트를 열었다. 밥솥을 반납하던, 하지 않던, 햇반 1년 치를 주었다. 이 캠페인의 표어는 ‘밥하지 않는 집’, ‘밥보다 더 맛있는 밥~’이었다. 집 안에 식탁을 햇반으로 점령하겠다는 야욕이 보이는 표어이다. 또 국내 농가들과 상생을 외치지만 ‘햇반 컵반 빅’ 7종에 들어가는 쌀을 국내산에서 미국산으로 바꿨다. 햇반은 국산 쌀이란 이미지를 공격적으로 홍보하던 행보와 다르게 미국산 쌀로의 교체는 은밀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소스와의 궁합이지만 원가 낮추기가 중론이다. 2022년 국정감사에서 임형찬 CJ제일제당 부사장은 “이 부분(햇반 컵반 빅 7종의 미국쌀 사용)에 대해 수입 쌀을 국산 쌀로 대체하겠다”고 답변했다. 집밥 자체를 햇반으로 대체하려는 CJ제일제당의 전략은 홍보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담배 회사의 담배 판매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페미니즘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자유의 횃불’을 기획했다. 20세기 초 미국 사회에서는 여성 흡연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이 있었다. 남성이 길거리에서 흡연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여성이 흡연하는 것에 대해선 좋지 않게 보았다. 당연히 이는 사라져야 할 성차별적 관념이다. 이 고정관념에 관심이 있었던 담배 회사는 홍보 마케팅 전문가 에드워드 버네이스에게 흡연 홍보캠페인을 의뢰했다. 그는 흡연의 자유를 여성의 자유로, 담뱃불을 자유의 횃불로 변형시켜 흡연하는 여성은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테제를 형성했다. 또 부활절에 사교계의 여성들을 고용하여 행진하며 흡연을 시켰다. 이 테제와 캠페인은 성공적이었다. 담배 회사는 급격히 성장했다. 여성들의 건강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이것이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핵심전략인 ‘동의 조작(Engineering of consent)’이다. 제품을 상황에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맞춰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CJ제일제당은 현대인의 밥상에 햇반을 더하지 않는다. 현대의 밥상에서 밥솥을 빼버린다. 이 기이한 행보를 앞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일주일에 15분이면 타존재에게 수백 배의 시간을 부과하지 않아도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사진 출처: Jocelyn Morales
일주일에 15분이면 타존재에게 수백 배의 시간을 부과하지 않아도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사진 출처: Jocelyn Morales

우리에게 햇반에 의존된 식생활이 예견된 것일까. 씁쓸하게도 우리의 삶에 갑작스러운 여유가 생겨 식사와 요리가 과거의 모습으로 회귀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지속가능한 식문화 콘텐츠를 기획하는 나의 식탁 역시 점차 간소화되고 있다. 밥과 반찬 1~2가지 때로는 국도 한 그릇.(부모님은 빈티나는 식탁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고무적인 일은 즉석밥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차리려는 시도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즉석밥은 3분이면 되지만 나에게 맞는 정량을 따지기가 어렵다. 배고프다고 더 먹을 수도 없고 배부르다고 남길 수도 없다. 하지만 냉동밥은 다르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밭솥으로 밥을 짓는다. 쌀을 씻고 불리고 밥을 짓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이다. 여기서 내가 직접 들이는 시간은 5분 정도이다. 지어진 밥을 소분 용기에 담는데 걸리는 시간도 역시 5분, 설거지 5분, 이렇게 15분이면 일주일치 냉동밥을 만들 수 있다. 한 번 언 밥은 잘 쉬지 않기에 전날 2개를 냉동실에서 꺼내 냉장실로 옮긴다. 다음날 식사 때가 되면 약간 해동된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부족하면 예비분 1개에서 조금 덜어서 더 돌리면 된다. 자기 정량만큼의 밥도 먹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더 먹을 수도 있다. 일주일에 단 15분의 시간일 뿐이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버려지면 수십 년이다. 일주일에 15분이면 타존재에게 수백 배의 시간을 부과하지 않아도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김정모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는 매거진 ‘Sustain-Eats’ 편집자.
다양한 경험과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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