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② 살림은 사랑을 증폭시킬까?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저성장을 넘어 탈성장을 바라보는 시대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찾고자 하는 이야기다.

생명을 살리는 살림에 눈뜨다

최근 아픈 아기 길냥이 한 마리를 우리 연구실 앞에서 발견했습니다. 눈에 염증이 심각해서 앞을 보지 못하고, 영양상태가 좋지 못해 심하게 마른 데다가 심각한 변비로 인해 탈장된 상태였습니다. 아내는 황급히 고양이를 부여잡고 병원에 가서 치료했습니다. 고양이 밥을 준비하고, 방안을 정리하여 아기고양이가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저는 “이거 줘라”, “저거 닦아라” 하는 아내의 지시에 그때그때 대응하기 바빴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기 냥이는 제법 회복되었고, 저희는 모모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서 발라당을 하는 아기 냥이를 보니 언제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말끔해졌습니다. 치료받고 겨우 여유를 찾아 귀염질을 하는 아기 냥이의 모습을 보니 기뻐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지요.

아내의 살림은 정말 생명을 살리는 살림입니다. 흐트러진 것을 바로잡고,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오래된 것을 아끼며 닦고,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만들고, 병든 생명을 일으켜 세운 기적의 손입니다. 그러고 보면 생명 살림이 고귀한 마음과 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옆 가까운 곳에서 생명 살림이 이루어지니까요. 저는 아내의 수많은 살림 중 설거지와 빨래 정돈, 청소, 화장실정리, 고양이모래 정리하기 등등 일부를 할당받았지만, 살림 초짜라고 하기에도 모자랍니다. 그조차 제대로 못 해서 늘 아내에게 한 소리씩 듣곤 합니다. 아내는 부지런히 쇼핑하고, 요리하고, 세탁하고, 청소하고, 늘 쓸고 닦으며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저는 마치 슬로비디오 속 굼벵이처럼 기어 다닐 뿐이지요.

살림은 흐트러진 것을 바로잡고,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오래된 것을 아끼며 닦고,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만들고, 병든 생명을 일으켜 세웁니다. 사진출처 : Henry & Co.
살림은 흐트러진 것을 바로잡고,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오래된 것을 아끼며 닦고,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만들고, 병든 생명을 일으켜 세웁니다.
사진출처 : Henry & Co.

아직 앞을 보지 못하는 아기 냥이가 꾸물꾸물 기어 다니면서 응앙응앙 아내를 찾는 소리를 냅니다. 아내가 안아주면 아기 냥이는 긴 잠에 또 빠집니다. 무슨 꿈을 꾸는지 꼬물꼬물 댑니다. 그러면 꿈꾸는 아기 냥이를 안고 있던 아내는 또 순식간에 탈장된 곳을 소독하고, 눈에 안약을 넣고, 온 방에 싸놓은 똥을 치우고, 오줌을 닦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곳에 아기 냥이를 뉘어놓고 부드럽게 쓰다듬습니다. 한결 깨끗해지고 뽀송뽀송해진 아기 냥이를 보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아기 냥이에게 어떻게 한 거야?” 그러자 아내는 “아이니까 회복력이 빨라서 그런 거야”라고 대답했지요. 사실 제 눈에는 아내가 마법을 쓴 것만 같았습니다. 그 마법은 사랑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사랑은 바로 살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한 생명이 마치 하나의 기적처럼 살아나서 우리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이 된 생명과 우리 부부는 사진을 찍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내에게 정말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한 생명을 살려냈으니까요.

슈퍼우먼이었던 아내에게

경제(economy)의 어원은 살림(oikos) 즉 오이코스였다고 합니다. 밖에서 하는 ‘큰일’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경제’의 어원이, 집안에서 가족 한명 한명의 작은 일들을 챙기는 살림에서 나왔다니요? 도대체 왜 그럴까요? 살림과 경제 사이에 건너지 못할 긴 강이 흐르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살림을 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단지 바깥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우리 삶에서 결정적이고 중요하고 미학적인 것을 느낍니다. 저는 아내가 쓰는 가계부 어플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부지런히 써서 올리고 월말이 되면 결산이 되어서 나타납니다. 사실 아내가 직장을 다닐 때, 저는 대학원생이어서 아내에게 용돈을 받곤 했습니다. 저는 용돈의 사용처에 대해서 한 번도 아내에게 알린 적이 없었지만, 아내는 대강 윤곽을 그리고 있었나 봅니다. 어느 순간 용돈을 대폭 삭감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 저는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직장 다니는 아내로부터 용돈을 받아 후배들에게 술을 사주고, 마음껏 책도 사보고, 택시를 타고 다니기도 하고, 한량도 그런 한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위논문이 통과되자 아내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당시 직장을 다니던 아내가 경제활동과 살림을 함께 하고 있었다는 점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회의 슈퍼우먼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저는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자 소득을 만들기 위해서 프로젝트며, 강의며, 저술 활동 등을 늘렸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살림을 분담하면서 연구실을 같이 쓰고 함께 글을 썼습니다. 살림을 나눠서 하니까 할 얘기가 많아지고,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지요. 일주일이 마무리되는 주말 저녁이 되면 우리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뒤풀이하고, 살림살이와 책 쓰는 작업의 진도, 계획 등에 대해 같이 논의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며 살림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살림에 서툴기 그지없지만, 아내의 살림계획과 프로그램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살림을 통해 둘이 나눈 이야기가 많아지자 함께 쓴 글도 몇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잇달아 나왔습니다.

한번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전에 어떻게 직장을 다녔어?” 아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 자신도 어떻게 그런 일을 다 해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과거 직장을 다니던 아내가 회식 있는 날 술고래가 된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살림과 경제활동을 같이 하는 아내가 받았을 삶의 무게와 스트레스, 중압감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렇다고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난 후 그리 많이 좋아진 것 같진 않습니다. 아내는 여전히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고 하고,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바빴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어제도 아내는 자면서 잠꼬대하더군요. 직장에 가서 직원들과 만나는 듯 중얼거렸습니다. 저는 그런 아내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아내가 “부장님, 보고서 다 썼어요”라고 잠꼬대하면 “응 잘했네, 최고야”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아내는 스르르 다시 잠에 들었습니다. 아마 행복한 꿈을 꾸겠지요.

진정한 판짜는 사람

우리 부부의 작업실 〈철학공방 별난〉은 제법 몸뚱이가 커져서 각종 세미나와 강좌, 프로젝트 등을 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철학공방 별난〉은 커피 향이 진동하고, 책상 한쪽에서는 한때 길냥이었던 대심이와 달공이, 모모 세 고양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올 때면 아내는 수선스럽습니다. 차를 끓이고, 책상을 정리하고, 바닥에 먼지를 씁니다. 세미나를 하러 사람들이 오면 말끔한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사실은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아내가 봐주고 있는 셈입니다. 세미나에서는 똑똑한 사람, 날카로운 사람, 잘난 사람도 많지만, 사실상 그 세미나의 판을 깐 사람은 아내입니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아내는 잘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아내가 가장 힘들 때는 세미나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거나 상대방을 무시하려 하는 경우라고 합니다. 특히 폭력적인 대화법을 통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내는 밤새 예민해지곤 했습니다. 그런 아내의 걱정을 들을 때면, 살림을 하고 판을 짜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 판이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었지요.

살림의 마음은 바로 판 짜는 사람의 마음, 그 자리가 실제로 있게 해준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사진출처 : dungthuyvunguyen
살림의 마음은 바로 판 짜는 사람의 마음, 그 자리가 실제로 있게 해준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사진출처 : dungthuyvunguyen

공동체에서는 모든 사람이 판 까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판이 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책임회피의 영역이 되거나 해체되고 와해된 개인주의의 판이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아내의 노력처럼 서로를 보듬고 이해하고 공감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미나를 하다 보면, 자기자랑하면서 남 얘기를 안 듣는 사람, 자기중심적이어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사람, 상대방에 대해서 뻔하게 생각하는 사람 등등 별별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아내처럼 세미나 전에 청소하고, 차를 끓이고, 살림을 하면서 판을 짜려고 했던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없겠지요. 그런 점에서 살림의 마음은 바로 판 짜는 사람의 마음, 그 자리가 실제로 있게 해준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라 생각됩니다. 저 역시도 어떤 때는 그 배치와 자리의 의미 그리고 존재 이유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화려한 개념으로 잘난 척을 하거나 맥락에서 벗어난 딴소리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집에 돌아와서 그 자리의 판 깔았던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조금 침울하게 반성하지요.

공동체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판을 짜왔던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식사 준비를 같이하고 차를 같이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불어 그 자리를 함께 준비했던 사람들에 대해 감사함과 고마움을 느끼는 마음도 중요합니다. 물론 나서서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한 사람의 판에 자신이 있다는 점에 대한 깨달음과 응시도 중요합니다. 오늘 점심때도 아내가 해준 파스타와 커피를 마시면서, 아내가 우리 자리의 판 깔았던 사람이라는 점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저 역시도 설거지하고, 정리하면서, 판 짜는 사람 중 일부가 되기 위해서 미약하게나마 노력했습니다. 아내가 만든 판에서 저는 기쁨을 느끼고, 흥이 생기고, 쾌활함이 생깁니다. 저 역시도 다른 사람들이 제가 만든 판 위에서 그렇게 춤추고 노래하고 흥겨워했으면 좋겠습니다.

살림은 사랑을 증폭시킬까?

대학에서 강의 시간에 저는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지요. “사랑의 총량이 있느냐? 사랑할수록 사랑이 증폭되지 않느냐?” 그에 대해서 학생들은 대부분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반응을 했습니다. 얘기인즉슨 사랑은 무한하지 않고, 유한한 시간에 유한한 자원, 유한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말이었지요. 그러나 저는 사랑의 순간에 새로운 사랑의 능력이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사랑은 우리가 가진 무한한 역량이며, 역능이기 때문에 퍼도 퍼도 고갈되지 않는 우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저는 살림이야말로 우리의 무한한 능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의견은 지나친 낙관주의로 분류되었고, 사랑 타령으로 모든 불평등과 차별을 은폐하는 꼰대로까지 간주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비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는 살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희생이 강요되어 왔으며,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며, 살림에 대한 이야기는 낡은 시대의 유산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우주의 기운이 살림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할수록 사랑의 힘이 증폭되는 살림의 영역은 분명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안보이고 부각되지 않을 뿐이지요. 살림을 돌봄 노동, 정동 노동이라고도 부른다지요. 살림은 외면적으로 친절하게 대하면서도 내면의 감정 소모가 이루어지는 감정노동과는 다른 영역입니다. 즉, 총량이 정해진 감정의 소모가 아니라 정동의 무한한 생산입니다. 살림이라고 불리는 정동(affection)은 인류가 만들었던 오래된 과거의 비밀을 간직한 사랑의 행동양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림의 약속에 따라 오래된 미래를 설계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사회는 살림을 당연하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살림은 당연하고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서 만들어 나가야 할 주체성의 행동양식 중 하나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분리 속에서 역할과 책임을 할당하던 살림의 공식은 매우 낡았습니다. 그 대신 우리 자신의, 우리들 사이에서 만들어낼 사랑의 실천으로 살림을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사랑한다면 살림을 함께 하면서 사랑이 증폭되는 순간과 함께하고 웃고 기뻐하고 흥이 나고 사랑과 정동의 흐름이 깃드는 순간과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살림은 사랑할수록 사랑이 증폭되도록 하는 실천 양식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행동 양식이기도 합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직장에서 퇴근한 아내가 1시간 후에 귀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요리하면서 여러 양념을 사용하고, 야채를 다듬어서 예쁘게 만들기도 하고, 맛이 나지 않아 MSG의 마법에 눈물로 호소했던 순간을 말이지요. 아내가 맛있게 먹어주던 순간 저는 환희와 기쁨에 그날 저녁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더 노력해야겠는데, 오늘은 80점”이라는 점수를 매기며 저를 더 독려했지요. 그 후로 텔레비전에서 요리 프로그램이 나올 때마다 저는 제가 아내에게 요리해준다면 어떤 게 좋을까 하는 기대감과 설렘을 갖고 봅니다. 저는 살림의 비밀에 이미 눈떠있었던 셈입니다. 사랑은 사실 살림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아내와 제가 함께 하는 서로 살림, 생명 살림은 발효되어 냄새가 진동하는 누룩과도 같이 우리를 취하게 만들고 흥에 겨워 살아가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은 『저성장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 단행본에도 실렸습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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