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의 정치학] ① 제3지대가 아니라 회색지대를 구축하자

회색지대의 정치학은 한국의 진보·좌파 진영에 의해 제기되어 온 두 가지 헤게모니 프로젝트(hegemony project)가 시민사회의 다양한 민주적 요구를 대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두 프로젝트에 의해 가려진 회색지대의 영역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회색지대(gray zone)는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모호한 영역으로 여겨진다. 이 영역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은 기회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오늘날 가장 필요한 정치는 회색지대를 넓히는 정치라고 말할 것이다. 회색지대의 정치학은 한국의 진보·좌파 진영에 의해 제기되어 온 두 가지 헤게모니 프로젝트(hegemony project)가 시민사회의 다양한 민주적 요구를 대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헤게모니 프로젝트란 사회를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으로 나누고, 피지배 세력을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고자 하는 정치적 기획을 말한다.

한국의 진보·좌파 진영에 의해 제기되어 온 두 가지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시민사회의 다양한 민주적 요구를 대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사진출처 : picryl

한국 정치사에서 두 헤게모니 프로젝트는 지속해서 경합해 왔다. 하나는 보수 독재세력에 대항하여 민주시민을 대표하고자 하는 헤게모니 프로젝트이다. 다른 하나는 거대 양당과 시민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여 노동자·민중을 대표하고자 하는 헤게모니 프로젝트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전자를 ‘민주적’ 프로젝트로, 후자를 ‘대항적’ 프로젝트로 부르도록 하겠다. 현재 두 프로젝트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민주적 요구를 대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실패란 이런저런 이유로 프로젝트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실패는 적절한 조정에 의해 만회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실패는 사회를 독재정권과 민주시민, 기득권 세력과 노동자·민중으로 분할하고자 하는 시도가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뜻한다.

회색지대의 정치학은 두 프로젝트에 의해 가려진 회색지대의 영역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누군가는 이를 소위 ‘제3지대’ 정치와 동일시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제3지대 정치는 적대성의 차원이 제거된 채 사회문제를 합리적 토론과 숙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에 의존하는 반(反)정치적인 프로젝트이다. 회색지대의 정치학은 여전히 사회를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으로 나누는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제3지대와는 전혀 다른 전략을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제3지대가 아니라 회색지대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색지대의 사상가 라클라우

회색지대의 정치학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정치(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국내에 포스트마르크스주의, 급진 민주주의, 좌파 포퓰리즘 사상가로 알려진 라클라우는 ‘회색지대의 사상가’로 불릴 만하다.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한 탈(脫)마르크스주의 사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포퓰리즘 사상으로 여겨져 왔다. 이는 그의 사상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중 어느 쪽으로도 쉽게 설명될 수 있는 모호한 회색지대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라클라우의 정치적·지적 삶 또한 회색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는 고도로 추상적이고 난해한 논의를 전개하는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일평생을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사회운동과 정당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던 실천가였다. 그는 칼 슈미트(Carl Schmidt)를 따라 정치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서유럽의 좌파 정당들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사회가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 나뉜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 즉 생산관계와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회주의 정치란 다양하게 파편화된 주체들을 통일된 노동자 계급으로 구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라클라우가 보기에 이는 실재로서의 사회를 직접적이고 투명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본질주의적 철학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식의 인식론은 쉽게 독단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일찍이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모든 존재에 일차적이고 구성적인 담론적 차원을 넘어서 담론 독립적인 실재에 도달하려는 근대 철학의 야심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준 바 있다. 그는 이 담론적 차원을 언어 게임(language game)이라고 불렀다. 라클라우는 이런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사회세계의 진리를 포착하려는 과학이 아닌 특정한 언어게임 하에서 사회를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 양분화된 것으로 상징화하는 담론적 실천 혹은 헤게모니 프로젝트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당시 서유럽에서 역사적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에서 라클라우는 그의 지적 동반자인 무페(Chantal Mouffe)와 함께 ‘사회(society)’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오직 불가능한 대상을 구축하려는 노력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비판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주장이나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상대주의적 주장이 아니다. 이들은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을 수용하면서 사회란 불가능한 대상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인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정치 공간에서는 언제나 사회를 상징화하려는 복수의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특정 언어게임을 초월한 관찰자로서 이 프로젝트들 사이에서 무엇이 더 우월한지를 가려낼 수 없지만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각 프로젝트가 어떻게 경합해 왔으며, 어떤 한계에 봉착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 라클라우는 사회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서 자신의 시대에서 이런 작업을 수행했다.

회색지대의 정치학은 라클라우 사상에 입각한 윤리적·정치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는 보통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 또는 좌파 포퓰리즘(left populism) 전략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두 전략은 1980년대와 2010년대 서유럽의 정세 속에서 라클라우와 무페가 나름대로 제시한 전략일 뿐이다. 2024년 한국에서 이들의 프로젝트가 적용될 수 있는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회색지대의 정치학의 윤리적 차원은 모든 의미와 정체성의 불안정성과 적대적 차원에 의해 어떠한 헤게모니 프로젝트도 불가능한 대상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으로서만 존재하며,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정치적 차원은 다소 잠정적인데, 회색지대의 정치학은 하나의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구상하기보다는 그러한 프로젝트를 구상할 수 있게 하는 영역, 즉 회색지대를 넓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이 어떤 헤게모니 프로젝트로 연결될지는 앞으로의 상황에 열려 있다.

두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동시적 탈구

그렇다면 이제는 다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로 되돌아갈 차례이다. 앞서 역사적으로 진보·좌파 진영의 두 가지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제시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한정된 지면에서 이 프로젝트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경합해 왔는지를 서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는 두 프로젝트가 현재 어떤 이유에서 한계에 봉착했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라클라우는 다소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던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위기에 처하고 다양한 대안적 프로젝트가 활성화되는 계기를 관절이 엇나가는 순간에 비유하여 탈구(disloc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탈구적 계기는 새로운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활성화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기존의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현시대 진보·좌파 진영의 최대 과제는 윤석열 정권을 몰아내고 검사독재를 종식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바로 전 정권이 연인원 1,000만 명을 넘긴 촛불집회에 의해 세워진 ‘촛불 정부’였다는 사실은 금세 잊힌 듯하다. 알다시피 문재인 정부의 급속한 몰락을 초래했던 것은 이른바 ‘조국 사태’에 의해서였다. 문제는 한 개인의 도덕적 일탈과 위법·불법 여부, 또는 검찰의 과잉수사 여부에 그치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져 온 자녀 입시 비리, 부정한 재산 축적, 권력형 성범죄, 권력 남용 등의 문제는 민주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의 헤게모니적 정당성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고위공직자의 도덕성 문제로 끝나기 어려울 만큼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탈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양당 체제가 공고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양당조차도 지리멸렬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이는 수많은 회색지대를 양산하고 있다. 사진출처 : Pudmaker in wikipedia

이 탈구적 계기는 민주적 프로젝트를 봉합하려는 즉각적인 시도로 이어졌다. 서초동에서 ‘조국 수호’를 외치는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광화문에서 ‘조국 파면’을 외치는 촛불과의 대비를 이루면서 프로젝트의 균열을 상상적으로 봉합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 봉합이 상상적인 이유는 좌절된 민주적 요구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좌절된 민주적 요구들은 서초동과 광화문이 아닌 회색지대에 존재했다. 그러나 이 갈 곳 없는 박탈감들을 대표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주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왜 그랬을까.

민주적 프로젝트의 탈구는 대항적 프로젝트의 재활성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 이유가 진보정당 세력이 민주세력의 눈치를 보거나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민주세력과 완전히 결별한 선명하고 독자적인 노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세력과의 연합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 세력의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 연합 여부 그 자체에 집중된다는 사실에 있다. 진보정당 세력의 정치적 참여를 확대할 것으로 여겨졌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이런 경향을 강화하면서 위성정당 참여 여부가 정치적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되게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이는 연합정치에서의 진보정당 세력의 협상력을 약화할 뿐만 아니라 대항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재활성화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헤게모니 프로젝트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대항적 프로젝트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유는 민주적 프로젝트와 경합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양당정치에 실망하고 제도정치에서 소외된 민주적 요구들을 대표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비록 지속적인 분열로 내홍을 겪어 왔더라도 진보정당이라는 이름 아래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적 프로젝트의 탈구적 계기는 곧 대항적 프로젝트의 재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진보정당의 주요 정치인들과 일군의 활동가, 비판적 지식인들은 놀랍게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고, 회색지대의 좌절된 민주적 요구들을 대표하지 못했다. 그 이후는 익히 아는 이야기들이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을 거치며 윤석열 대통령이 근소한 표 차로 당선되었고, 2024년 현재 조국은 신당을 창당하고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다.

현재 상황은 두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경합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 탈구의 상황으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을 포함한 모든 정치세력이 파멸적으로 분열하고 있다. 양당체제가 공고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양당조차도 지리멸렬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는 수많은 회색지대를 양산하고 있다. 여전히 윤석열 정권을 향한 투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민주세력의 지배적 서사와는 불화하는 사람들,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연합정치에 대한 다양한 상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정당정치에 실망하고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 정치적 판단을 잠시 보류한 채 긴 호흡으로 이 과정을 복기하고자 하는 사람들. 이제는 민주적 프로젝트와 대항적 프로젝트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 사람들을 위한 회색지대의 정치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3지대가 아니라 회색지대를 구축하자

한편으로 한국 정치사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두 프로젝트와 다른 제3의 프로젝트가 반복적으로 존재해왔다. 최근 다시금 대두되고 있는 제3지대 정치가 그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기존의 적대적 정치와는 다른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치를 표방한다는 것이다. 안철수의 ‘새정치’는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안철수는 2010년대 초반 ‘안철수 현상’이라고 불릴 만큼 열렬한 시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국민의당을 창당하고 2016년 총선에서 원내 3당의 지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안철수의 ‘새정치’는 꾸준히 양당의 적대적 정치와 낡은 이념정치와는 다른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치를 표방해 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이 기득권에 대항하여 어떤 사회세력과 민주적 요구를 대표할 것인지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정치지형에 따라 새정치의 내용은 매번 달라졌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제3지대 정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적대성이 제거된 합리적 토론과 숙의의 정치는 시민사회의 민주적 요구와는 무관한 정치 엘리트들 사이의 야합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3지대를 위시한 반(反)정치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기존 헤게모니 프로젝트들의 동시적 탈구라는 계기를 새로운 헤게모니 프로젝트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획이다.

따라서 구축해야 하는 것은 제3지대가 아니라 회색지대이다. 앞으로 나는 주어진 지면을 우리 사회의 각 부문에서의 회색지대의 영역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데 활용하고자 한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 글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문제를 진단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의 글들은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이자, 같이 그 시간을 만들어 가자는 제안이 될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웹진 <생태적 지혜>는 혐오와 배제를 제외한 보다 다양한 관점을 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본지에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 정책의 내용을 언급하는 글이 실린다면, 그것은 본지가 제시하고자 하는 다양성의 일부일 뿐이며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전체 조합원들의 합의에 의한 단일한 정치적 노선은 있을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현우식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사상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다.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한국에서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 재생산되는 관행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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