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 ④

2020년, Covid-19 팬데믹 기간 동안 일상의 풍경은 변해갔다. 그해 4월, 치매 증상이 심해진 할머니가 아버지와 같은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엄마와 아들이 마주 보고 있는 병실에 각각 입원해 있는 현실. 같은 공간이라 할 만큼 가까이 있지만 그 둘은 자기 힘으로 서로를 보러 갈 수 없었다. 유난히 힘없이 누워있던 할머니를 면회하고 돌아오던 길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할머니의 부고(訃告)였다.

Ⅴ. 돌봄과 노동의 위기 (1)

계약기간 3년의 마지막 해 2020년, Covid-19 팬데믹이 닥쳐왔다. 때마침 아버지는 「산재보험 보상·재활 서비스」 절차 상 치료 및 요양 기간이 종결되었다고 판단, 장해등급심사를 받게 되었다. ‘장해등급심사’란 더이상 치료와 요양을 해도 뚜렷하게 나아지지 않을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통상 재해 발생 2년 뒤), 그럼에도 신체 등에 장해가 남은 경우 해당 장해의 등급을 결정하기 위한 심사를 말한다. 아버지는 한 차례 요양기간을 연장하여 거의 4년이 지난 뒤에야 장해등급심사를 받게 되었다. 해당 등급에 따라 장해급여가 달라지므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Covid-19 팬데믹이 닥쳐오기 전, 휠체어에 탄 아버지와 병원 근처 공원을 산책하곤 했다. ⓒ전형민
Covid-19 팬데믹이 닥쳐오기 전, 휠체어에 탄 아버지와 병원 근처 공원을 산책하곤 했다. ⓒ전형민

아버지의 상태 및 장해는 신체(신경·정신계, 호흡계, 골격계 등)에 여러 형태로 매우 뚜렷하게 남아있는데 근로복지공단에서는 과연 어떻게 심의하고 결정할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장해등급은 1급부터 14급까지 있고 1급에 가까울수록 심각한 장해를 뜻한다. 심사일이 다가오기 전 여러 방면으로 학습과 상담, 병원 진단을 통해 아버지의 장해등급을 합리적 근거로 예상하고 추측해 보았다. 2급은 족히 나와야 하는 상태였다. 혹여 그 이하의 장해등급을 받게 되면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에 이르게 되기에 심사일이 다가올수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급기야 아버지는 흡인성 폐렴을 앓고 있었다. 심사일은 다가오고, Covid-19가 한참 확산되고 있는 때에 흡인성 폐렴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 밖으로 나가 장해등급심사 장소로 가는 건 여러모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공단에 전화해 이런 사정을 알리고 달리 방법이 없느냐 물었지만 결국 돌아온 답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

심사 당일, 사설 구급차를 불러 아버지를 모시고 심사 장소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한 다른 재해자들과 함께 아버지와 나는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우리 순서가 다가와 자문의사들이 모여 있는 격실로 들어갔다. 의사들은 대체로 무표정하고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사전에 보낸 아버지의 뇌 사진(MRI)과 진료기록지 등을 보더니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데 답을 하기가 무섭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더니 채 5분도 안 돼 끝났다며 나가도 된다 한다.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격실 밖으로 그렇게 “밀려져” 나왔다.

어떤 고압적인 분위기에 위축된 것도 있었고,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찜찜함과 당사자인 아버지 당신의 ‘말’은 삭제돼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과 무력감도 느꼈던 것 같다. 약 3개월 뒤 장해등급심사 결과가 나왔다. 3급이었다. “① 사지근력정도는 우측 상하지 G3, 좌측 상지 G3, 하지 G4로 전반적인 사지근력 저하가 있어 휠체어로 이동(독립보행 불가)하고, ② 배뇨·배변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나 스스로 식사가 가능하여 수시간병이 필요한 정도에 미치지는 못하며, ③ 우울감, 인지기능 저하, 퇴행성격변화가 관찰되나 치매, 정의의 장해, 환각망상 다발 등으로 수시로 다른 사람의 감시가 필요한 정도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자문의 소견”에 따른 결과라 한다.

황당했고 당황했고 부당하다 생각했다. 불과 5분도 안 되는 심사로 아버지의 장해 정도를 판단하는 과정도 그랬고 그 결과 역시 수시 간병이 필요한 아버지의 상태 및 장해를 반영하지 못했다. 이의제기를 위해 ‘심사청구’라는 제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전에 아버지의 요양기간 연장을 위해 공인노무사와 상담하고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고「산업재해보상보험법」등을 공부하며 직접 심사청구서를 작성해 이의제기해 본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시도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포기했다. 이번엔 군포에서 김포를 오가며 또 아버지를 모시고 대학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고 증빙자료와 심사청구서까지 작성할 만큼 시간이 넉넉지 않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Covid-19는 여전히 유행 중이어서 조심스럽기도 했고. 결국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 공인노무사를 선임해 심사청구를 준비하기로 했다. 약 3개월 동안 심사청구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공인노무사를 ‘을’로 두고 나 또는 아버지가 ‘갑’이 되어 계약서를 작성하지만 실무는 대부분 해당 노무사 소속 법인의 손해사정사가 한다. 즉 노무사는 거의 이름만 빌려주는 셈. 물론 심사청구 후 장해등급 재심사 당일에 공인노무사가 등장하긴 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장해등급은 3급에서 2급이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상태 및 장해와는 별개로, 손해사정사의 실무와 공인노무사의 이름과 아버지의 상태를 진단하고 검사결과지를 작성해 준 대학 병원 전문의들 이름 덕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권력과 자본의 힘인가. 이렇듯 장해등급심사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와는 별개로 심사 결과만 놓고 보자면 아버지와 내 입장에선 다행이었고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값을 치렀다. 노무사 수임료 2천 3백만 원. 아버지 통장엔 그만한 돈이 없었고 결국 내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부족한 금액을 채워 지불했다. 지금도 갚는 중이다.

동생과 함께 임대아파트에서 지내던 할머니와 반려견 꽁지. ⓒ전형민
동생과 함께 임대아파트에서 지내던 할머니와 반려견 꽁지. ⓒ전형민

심사청구를 준비하던 3개월 동안 일상의 풍경은 변해갔다. 동생과 함께 김포의 임대아파트에서 지내던 할머니는 2020년 4월에 아버지와 같은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치매 증상이 심해져서이기도 했지만, 한번은 동생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넘어져 있는 상태로 혼자 못 일어나고 있더란다. 요양보호사가 주간에 할머니를 돌보긴 했지만 요양보호사와 동생 모두 없는 시간에 할머니를 혼자 뒀다간 그런 일이 또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결국 김포에 사는 고모는 할머니를 아버지와 같은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병실 바로 건너편 병실로 입원했다. 엄마와 아들이 같은 요양병원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병실에 각각 입원해 있는 현실. 같은 공간이라 할 만큼 가까이 있지만 그러나 그 둘은 자기 힘으로 서로를 보러 갈 수 없었다.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게다가 Covid-19에 취약한 노인과 환자들이 모여 있는 요양병원에선 그것마저 조심스럽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이 다 돼가던 2020년 5월 9일, 그러니까 어버이날을 맞아 아버지와 할머니를 뵈러 갔다. 체온을 재고 손을 소독하고 일회용 비닐가운과 위생장갑을 착용하고선 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아버지를 만 몇 마디 주고받고는 건너편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거의 의식이 없었고 힘도 없어 보였다. 무슨 말을 걸 수 있을까? 보기조차 어려운데. 그렇게 불편한 혹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는 돌아왔다. “할머니, 저 왔어요. 형민이 왔어요. 알아보시겠어요?” 이 한 마디라도 건네 볼 걸.

김포에서 군포로 돌아오는 길,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김포에 사는 고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낯설지 않은 ‘쎄한’ 느낌. 2016년 5월 4일 퇴근 직전 ‘아버지’란 이름으로 걸려온 전화처럼. 울먹이는 고모는 할머니의 부고(訃告)를 전했다. 돌아가셨단다. 불편하고 불안했던 마음은 불길함이었던 걸까. 졸지에 나는 아직 숨은 붙어있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본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 후로도 아쉬움과 후회는 길게 남았다.

납골당에 안치된 할머니의 유골함을 바라보는 아버지. ⓒ전형민
납골당에 안치된 할머니의 유골함을 바라보는 아버지. ⓒ전형민

길게 남은 아쉬움과 후회가 또 있다. 할머니의 부고(訃告)를 아버지에게 바로 전하지 못한 것. 당장 장례 절차 준비로 경황이 없던 탓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당신의 어머니 부고(訃告)에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서, 어떨지 모르겠어서. 다만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할머니의 바로 건너편,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자 아들로서 임종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떠나기 전 손이라도 잡아주며 당신의 엄마에게 온기라도 전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당신의 어머니 부고(訃告)를 바로 전해들을 권리를 의도치 않게 박탈한 것은 아닐까 싶어 역시 후회로 남는다. 장례가 끝나고 며칠 뒤에야 아버지를 보러 간 병원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어렵사리 꺼냈다. 아버지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흐느끼지도 울먹이지도 않고 다만 눈물만. 마음껏 아파하지도 슬퍼하지도 애도하지도 못한 아버지에게 나는 아들로서 돌봄자로서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었을까.

동그랑

'시인'이 되고 싶어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가까스로 졸업했지만 '시인-되기'는 여전히 요원하고 문단에 등단한 적 역시 없다. 대학 졸업 후 개신교 선교단체 간사로 3년 간 일하다 2016년, 목수로 일하던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상시 간병과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 되자 하던 일을 관두고 격주 주말과 명절 연휴 때마다 병원에 들어가 그를 돌보게 된다(최근 3년간은 Covid-19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한 인연으로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일상을 지원하는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사무국장으로 1년, 이후 대안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모여 만든 청년협동조합으로 이직해 커뮤니티 매니저로 3년을 일했다. 2021년, 기술을 배워봐야겠다 싶어 한옥목수 일을 배우고 실제 문화재 복원 및 보수 현장에서 초보 한옥목수로 일을 하다 열악한 근무여건(근로기준법 미준수,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결국 그만두게 된다. 짧게라도 배운 기술과 일 경험이 아쉬워 비록 목수는 아니지만 2022년엔 수원 화성행궁 복원 현장에서 인턴 공무로 6개월 간 일했다. 2023년 현재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활동가로, 프리랜서 작가 및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 필명 ‘동그랑’은 강화도에 딸린, 동검도에 딸린, 무인도 동그랑섬에서 따왔다. 말하자면 섬 안의 섬 안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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