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가속화와 탈성장 해법

성장 논리에 중독된 현재의 경제시스템은 기후 위기라는 커다란 장벽을 만났습니다. 이 장벽을 넘기 위한 대응 방법이 절실한 상황인데, 기존의 경제관인 탈성장과 녹색성장이 아닌 제3의 실용적인 사다리를 마련할 수는 없을까요? 이 글에서는 〈커먼즈 경제〉라는 오래된 담론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법과 결합하면 매우 설득력 있는 경제관을 제안합니다.

“현재 우리는 우리의 번영과는 별 관계없이 성장해야만 한다는 경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무조건 성장해야 한다는 도그마가 아니다.”

케이트 레이워스 (Kate Raworth) / 『도넛 경제학: 21세기 경제학자처럼 사고하는 7가지 방법』, 2017

성장 논리에 중독된 경제

집안에서 화분을 기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때때로 놀라운 경험을 하는데, 적당히 물만 줘도 식물들이 씩씩하게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잘 자라도 걱정입니다. 베란다 높이보다 더 성장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비유이지만, 주위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하는 모든 존재가 이렇습니다. 별 탈 없이 잘 자라면 좋지만, 영원히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장’이라는 단어와 가장 많이 짝을 이루는 ‘경제’는 어떨까요? 경제도 주어진 환경을 자양분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영원히 성장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정치인들과 언론은 경제 성장에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매년 혹은 매분기 발표되는 GDP 성장률은 마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과 안전, 그리고 새로운 기회를 표시하는 신호등처럼 비춰집니다. 그러나, 지난해 3% 성장한 경제 상황에서 우리의 행복도 그만큼 증가했을까요? 생태계의 모든 영역을 둘러봐도 끊임없이 성장하는 곳은 없습니다. 경제 성장과 나의 소득간의 관계도 불명확하지만, 경제 성장으로 인해 나의 가처분소득이 증가해도 계속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최상위의 부자계층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경제는 지구 생태계의 안정성을 무너뜨립니다. 베란다의 화분처럼 경제 성장도 적절한 한계가 있다는 점, 이것이 기본 규칙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중독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GDP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미국의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넷(Simon Kuznets)입니다. 목적은 경제 상황을 짚어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를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34년에 처음 제안하면서 쿠즈넷은 이 개념이 사회의 모든 가치를 대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담을 수 없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GDP의 발명가도 이 개념의 한계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쿠즈넷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들어 GDP는 한 국가의 성공을 측정하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 국가가 빈곤을 벗어나 사회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시작하는 단계라면, 이 지표는 매우 강력한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200년간 세계 경제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중간에 심각한 시련도 있었지만, 심각한 후퇴는 없었습니다. 눈부신 성장은 그러나 저렴한 노동력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지금도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과 저개발국의 어린이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임금보다 훨씬 큰 경제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 성장은 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무분별한 자원 개발과 산림 파괴, 공기 오염과 온실가스 등이 경제 성장을 위해 지구가 희생한 결과입니다. 지구의 희생만 놓고 보면, 인류가 자랑하는 경제 성장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 성장을 위한 자본은 창조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과 천연자원이 경제 자본으로 모습만 바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이 있지 않냐고 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의 모습은 과학기술은 경제 성장의 작동방식, 즉 자원 착취와 환경 오염을 원활하게 만들어준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이것 빼고 저것 빼면, 우리가 과연 성장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기후 위기가 본격화된 현재의 시기에 이런 방식의 성장은 끝을 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금과옥조처럼, 더 이상 공짜는 없습니다.

녹색 성장도 탈성장도 아닌 새로운 해법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는 스웨덴의 화학자인 스반테 아레니우스의 1896년 논문에도 실려 있었습니다. 자원 약탈적 경제 성장에 대한 경고도 비교적 오래전에 유래했습니다. 서구의 탈성장 논쟁은 1970년대 환경에서 출발했습니다. 탈성장은 자본주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의 담론으로 자리 잡고 점점 보편적인 개념으로 진화했지만, 튼튼한 뼈대를 가진 이론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탈성장이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논의되는 이유입니다. (조혜경, 〈탈성장의 이론적 기초〉,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콜로키움 64회, 2017)

그래도, 일정한 공통 인식은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장의 기술적 측면 : GDP의 지속적 확장은 숫자로만 표현 가능한 시스템 일부의 자료일 뿐입니다. 자원 약탈적 경제 구조는 시스템의 앞/뒤 부분에 필연적으로 큰 폐해를 남기게 됩니다. 마음씨 좋은 이웃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집 생활을 위해 앞집에서 쌀을 훔쳐오고 남은 쓰레기는 뒷집에 버리는 방식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하려면 상식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현재의 경제 구조가 매우 공격적인 특성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2. 생태적 관점 : 물질적인 흐름을 넘어 시스템에 자리 잡은 ‘성장 논리’에 대한 사회문화적, 미학적 비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제기는 해결방법으로 전면적인 사회개조를 요구합니다.
  3. 철학적 관점 : 탈성장을 경제적 관점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공감, 그리고 경쟁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가치관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기후 위기와 같은 자연의 경고가 누적되면서, 경제 성장에 대한 도그마도 점점 퇴색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탈성장 담론에 그만큼 힘이 실리고 있기도 한 것인데요. 전반적으로 보면 두 가지 커다란 논쟁으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최근 10여년 간 일군의 경제학자들은 지구의 미래를 중심으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한 편은 녹색 성장의 옹호론자(Green Growthers)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구 환경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경제 성장 방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탄소 배출에 대한 규제와 에너지 전환을 중심으로 한 기술 혁신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유선 통신이 무선으로 전환된 것처럼 적당한 기술만 개발된다면, 탄소 중심의 경제 구조도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경험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녹색 기술이라는 작은 사다리로는 기후 위기라는 높은 장벽을 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웨덴이나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들은 탄소 배출량을 선도적으로 감축하고 있지만, 여전히 지구 환경의 경계선을 준수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 국가들이 녹색 성장에 대한 새로운 표준을 잘 수립한다 해도 이들이 소비하는 제품들은 중국과 인도와 같은 탄소 과다 배출국에서 생산됩니다. 녹색 기술 혁신에 의한 경제 구조의 전환과 새로운 성장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제입니다.

녹색 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는 탈성장주의자(degrowthers)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봤지만, 이들은 현재처럼 수치만 성장하는 경제 구조는 재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회 심리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이산화탄소를 메탄올이나 다른 연료로 전환하는 화학적 경로를 연구중인 모습. 기후위기 시대 또한 기술 혁신을 통한 해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by Brookhaven National Laboratory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brookhavenlab/3177363358
이산화탄소를 메탄올이나 다른 연료로 전환하는 화학적 경로를 연구중인 모습. 기후위기 시대 또한 기술 혁신을 통한 해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 출처 : Brookhaven National Laboratory

코로나 바이러스의 상황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많은 국가들은 사람들의 이동을 강제로 차단했고, 이로 인해 탄소 배출량은 극적으로 감소했습니다. 한국처럼 대기 오염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이 기간 동안 맑고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사회적인 불만은 급등했습니다. 새로운 혁신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경제는 급속하게 침체되었습니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자들에 제시한 기준은 매년 7~8%만큼 탄소 배출량을 감축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감축은 극심한 경제 침체를 의미하고, 탈성장이 매우 어려운 과제라는 점을 확인시켜줍니다. 게다가, 부유한 국가들이 탈성장을 표방하며 소비를 줄인다면, 이는 저개발국의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말이 좋아 탈성장이지, 수 억 명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펼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녹색 성장도 탈성장도 아닌 제3의 길은 없을까요? 이를 위한 실용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커먼즈 경제(the Commons Economics)는 녹색 성장과 탈성장 옹호론자들의 논쟁을 생산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에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경제 성장을 중심에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경제 성장을 논의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커먼즈는 일반적으로 ‘공동으로 누리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이나 지식을 포함한 공동의 ‘유・무형 재화’에 대한 권리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지구 생태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경제 조건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 조건에 어떻게 도달하고 계속 머물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습니다. 어려운 과제이지만, 목적은 관념적인 사고 체계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커먼즈의 기원은 1225년 수정된 영구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서 출발합니다. 당시 ‘산림헌장’에서 목초지와 숲에 대한 평민들의 사용 권리를 명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커먼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1968년 생물학자 개릿 하딘은 “어민이든 농민이든 자신의 개인적인 자원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커먼즈를 소비하기 때문에 커먼즈는 지속될 수 없다.”는 내용의 유명한 〈공유지의 비극〉을 발표했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느 누구도 커먼즈의 파괴를 원하진 않지만, 결국 소유권이 불분명하고 한정된 공유자원부터 파괴된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기후 위기・생태 위기는 커먼즈를 다르게 해석하게 합니다. 사회적 경제를 포함한 비영리 영역의 경제 담론이 활발해지면서 커먼즈를 성장의 최초 희생물이 아니라 최후 방어선으로 재정립하려는 것입니다. 커먼즈 경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무한히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견이 아니라, 과학적인 사실입니다. 둘째,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더라도 경제 성장은 가능합니다. 경제 성장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경제 성장이 빈곤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은 지역도 있지만, 세계 모든 지역에서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에 대한 지표를 개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본은 오랜 기간 저성장 혹은 역성장에 시달려온 국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성장률에 얽매이는 방식보다 다른 지표를 찾고 있습니다. 뉴질랜드, 아이슬란드 그리고 스코트랜드와 같은 국가들은 사람과 지구가 동시에 행복해질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본격적으로 탐색하고 있기도 합니다.

정리해보면, 우리는 경제 성장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이를 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회가 잘 살 수 있게 하는 경제 구조를 만들고 이를 뒷받침할 시장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경제 성장의 폐해를 알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채 문제가 큽니다. 부채는 미래의 가치를 현재로 끌어온 것인데, 성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시스템은 붕괴될 것입니다. 미래의 가치를 끌어다 썼는데, 경제가 쪼그라들면 미래 세대는 엄청나게 큰 부담만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상황이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경제를 지탱해 왔던 세대 간 계약이 최근에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 환경의 파괴로 인해 미래 세대의 삶과 경제가 매우 불확실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 세대는 스스로의 행복 추구권을 지켜내야 할 입장입니다. 미래세대에게 정의롭지 못한 보다 불편한 삶의 방향이 개방되고 있습니다. 그 대안은 없을까요?

커먼즈 경제

1930년대 시카고 경제학파들이 주장한 신자유주의는 1980년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철학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논리를 극복해야 합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극단적 경쟁주의는 지난 40년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경제적 혜택을 듬뿍 안겨줬을 뿐, 대다수 사람들의 행복과 안전, 그리고 지구 환경을 개선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지구 환경은 개선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매우 악화시켰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경제적 균형점을 찾아야 합니다. 수입과 지출, 임금과 이익 등을 포함한 모든 경제적 변수들을 재조합하고, 사회적 안정성과 지구 환경의 경계를 지키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새로운 이론을 학습할 시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태로운 지구 환경을 회복시키는 경제 정책의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무엇일까요? 조금 더 시야를 좁히면, 지속가능발전 목표에 부합하는 사회적 활동을 지원하고 강화하는 경제 계획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두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시장을 조정하는 것과 장기적인 경제 운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산업이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게 해야 하며 장기적인 발전에 초점을 맞추는 경제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by pxfuel 출처 : https://www.pxfuel.com/en/free-photo-xddrs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산업이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게 해야 하며 장기적인 발전에 초점을 맞추는 경제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사진 출처 : pxfuel

첫째, 우리는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산업이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세금을 통해 수익을 환수할 수도 있고, 폐기물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여 비용을 높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지구 환경의 경계를 철저히 지키는 산업만이 살아남아야 할 것입니다. 시장의 기능을 조정하는 것만으로 이런 이들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현재 탄소 배출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는 정부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국가에서 노동과 소득에 대한 세금은 철저하게 부과합니다. 노동에 의한 소득세는 자연히 기계에 의한 자동화를 촉진시키고, 일자리를 빼앗아 갑니다. 잘못된 방향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은 결과물에 세금을 부과하고,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에는 세금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따라서, 탄소 배출과 같은 지극히 반사회적인 결과물에는 높은 세금을, 노동과 같은 필수요소에는 낮은 세금을 매기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와 공급자 모두 지구 회복을 위한 생활태도를 선호하게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일자리도 증가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볼 것은 장기적인 발전에 초점을 맞추는 경제 계획 수립입니다. 장기 계획은 시대마다 다른 의미로 인식되었습니다. 농경 시대라면, 자식을 많이 낳아 이들이 다음 세대를 풍요롭게 만들게 하는 것이 장기 계획이었습니다.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운 이집트나 마야의 문명에서는 이런 건축물을 짓는 것이 보통 2~3세대가 흘러야 하므로, 몇 세대에 걸친 장기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커먼즈 경제 시스템도 이런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은 개인이나 기업이 아닌 정부의 주도로 수립되어야 합니다.

재생 에너지 확대는 커먼즈 경제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닌데, 발전의 안정성과 효율을 위해서는 전기 공급망도 함께 발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개선된 공급망 혹은 송전시설에 의해 초고속 기차, 터널, 다리, 그리고 고속도로 등 사회 필수 시스템이 커먼즈로서 관리 운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기를 저장하는 기술이 더 발전해야 하고, 건물의 효율성이 높아져야 하며, 운송 산업에서 뿜어 나오는 탄소도 사라져야 합니다. 녹색기술 혁신이 커먼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녹색기술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는 경제 구조를 만들어 미래 세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야 하고, 필요하면 세대간 계약을 수립하여 장기적인 목표 달성의 의무를 부과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장기 계획이 수립되고 실행되어야만 자식 세대에게도 희망이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커먼즈는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회관계 혹은 인류 공동체의 삶에 핵심이 되는 가치관과 지식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내재적 커먼즈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비용도 점차 줄여나가야 합니다. 지적재산권에 대한 보장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처럼 모든 국가와 사회에 비대칭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돌봄, 먹거리, 재활용 등의 분야에서도 구체적인 관리 모델이 계속 실험되고 있습니다.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커먼즈 경제의 실천 방법이 누적되는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이 계속 실행되고 보완된다면, 기존의 경제 상식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흡수하는 실천 방안이 점점 현실화 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공공정책의 새로운 모멘텀으로 커먼즈 경제를 확대할 수 있다면 우리가 바라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전병옥

기술마케팅연구소 소장. 고분자화학(석사)과 기술경영학(박사 수료)을 전공. 삼성전자(반도체 설계)에서 근무한 후 이스트만화학과 GE Plastic(SABIC)의 시장개발 APAC 책임자를 역임. 기술의 사회적ㆍ경제적 가치와 녹색기술의 사회적 확산 방법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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