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녹색의 편으로 – 『녹색 계급의 출현』을 읽고

브뤼노 라투르와 니콜라이 슐츠는 이 책에서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고 있음을 알린다. 그들 ‘녹색 계급’은 “잠재적으로 다수파”이지만 아직 마땅한 이념과 정체성이 없어 산발적으로 표출되고만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맑스의 계급 이론을 변용하여 ‘생산 조건’이 아닌 ‘생성 조건’을 기준으로 한 계급의식과 이들이 당면한 과제를 제시한다.

적록의 소년

브뤼노 라투르 , 니콜라이 슐츠 저, 『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이음, 2022년)
브뤼노 라투르 , 니콜라이 슐츠 저, 『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이음, 2022년)

이 책은 ‘그린워싱’(녹색 분칠)되었나? 이 질문을 풀어나가고 싶다. 『녹색계급의 출현』이라니, 제목은 실로 참신하다. ‘계급’이라고 하면, 적색 깃발을 든 단결한 노동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럼 적색이 녹화(綠化)된 것일까. 두 색깔의 공존을 나는 유년 시절 교육으로 경험한 바 있다. 도시에 자리한 한 대안학교에서 나는 매점에서 ‘협동조합’의 ‘국내산’ ‘유기농’ 과자를 먹으며 자랐다. ‘생태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그곳에서는 빨강도 도드라지는 색이었다. ‘왼쪽 날개’(左翼)를 자칭하는 선생님에게 국정 교과서에는 없는 ‘빨간’ 역사를 배웠다.

거기서 나는 생태주의를 주로 ‘문제’로 접했던 것 같다. 핵발전소로 인해 소중한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물론, 인간의 끝없는 욕심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가 생기는 ‘밀양 송전탑’ 문제 등등···. 교육 과정으로는 잠깐 고생하고 밤새 노는 농촌봉사활동이 있었고 농사 수업이 한 학기 동안 있었다. 책 대신 흙, 지식 대신 씨앗을 만지는 (지금 생각하면 가장 특별하고 또 내가 선호하는 생태주의에 걸맞는) 경험이었다. 특별하게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동아리를 운영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별명은 ‘나무’ 또는 ‘초록’이었다.

적색의 녹칠일까

생태주의하면 ‘초록’이라니 너무 일차원적이지 않나? 일차원적이라 직관적이고 그래서 별명으로 붙은 것이겠지만. 우리가 ‘생태주의’를 떠올릴 때에도 그것은 곧잘 ‘녹색’으로 연결된다. ‘녹색당’, ‘그린피스’ 등등. 이 책의 원제도 ‘새로운 생태 계급에 대한 메모’를 뜻하는데, 옮긴이가 영어 판본을 바탕으로 ‘녹색 계급’으로 바꾸었다.1 이러한 상징에 대한 문제제기를 어느 칼럼에서 읽은 적이 있다. 기억하기로 요지는 생태주의가 대변하고자 하는 생물들과 생명의 원리를 고작 식물의 한 때깔로 고착하는 게 맞느냐는 문제제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도 세상의 트렌드를 타고 ‘녹색 분칠’되었다고 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사소한 꼬투리잡기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답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계급’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녹색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느냐는 것 그리고 이 책에서 제시된 ‘녹색 계급’은 충분히 녹색인지를 묻는 것이다. 나의 견해로 전자는 현 시점에서 적당한 사회정치적 기획이라는 것이고 후자는 충분히 녹색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받아들이는 생태주의적 시점에서는 그러하다.

 녹색계급이 필요해?

계급이 있기 위해서는 ‘분류 투쟁’이 필요하다. 특정한 사람들이 공통된 점을 기반으로 일정한 무리에 속한다는 ‘계급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녹색계급’은 적당한 기준을 가진 적절한 분류인지를 물을 수 있겠다. 이는 기존의 적색계급과 비교될 수 있다. 맑스가 제시한 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었다. 반면 라투르와 슐츠가 제기하는 새 기준은 재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이다. ‘인간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닌 ‘인간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생성 조건’의 안위를 묻는 것이다.

녹색 계급의 기준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정의가 필요하다. 이 책에서 ‘녹색 의식’을 제대로 접함으로써 뭉치고 싶고 전선에 뛰어들고 싶은 열의를 얻기를 원했으므로 아쉬운 부분이다. 신선한 기획이지만 후속 연구가 많이 필요해 보이는, 조금 설익어서 세상에 출간된 느낌이다. 다만 지금이 이러한 개념과 이론이 나올 적시라는 생각은 든다. 세계 도처에서는 이미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시민운동과 정치활동이 펼쳐지고 있고, 이 책이 그들에게 적합한 언어와 가치 등 ‘정치적인 것’을 일부라도 제공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녹색의 곁에서 편으로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사진 출처: Markus Spiske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사진 출처: Markus Spiske

이를테면 이 책은 “There is no Planet B”라는 피켓의 선전 문구를 뒷받침한다. 기후위기를 걱정하여 거리에 모이거나 지혜를 모으는 행동들은 결국 ‘거주가능성’을 위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인류세’의 시대에는 ‘홀로세’의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특성이 파괴되므로 모든 ‘지구생활자’는 생존을 위협 당한다. 기후위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그리고 한국 내 산업화와 민주화의 집권이라는 시대상황 이후의 ‘거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녹색계급은 ‘정의로운 전환’을 포함, 보편적 대의를 가진 대전환의 중심축이다.

그러나 “두 번째 지구는 없다”라고 외칠 때, 그 말은 또한 지구 자체를 걱정하는 마음을 품는다. 반면 ‘녹색 계급’은 인류의 생존에 대한 관심만 가득하다. 그래서 그것은 ‘지속가능함’을 외치지만 실상은 지속가능하지 못한 발전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라투르가 그동안 정치적 관계망을 이루는 범위를 인간에서 ‘행위자’ 존재들로 확대하고, 그것에 가이아 이론을 받아들여 지구까지 끌어들여 왔음은 뒷부분 해설에서 뒤늦게 밝혀진다. 적어도 본문은 지구와 인간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존재론’에 기초한 인간중심적인 ‘환경보호주의’에 그친다.

그리하여 다시 묻는다. 이 책은 그린워싱 되었는가? 생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믿는 ‘심층생태주의’ 입장으로서는 그렇다. ‘녹색 계급’은 충분히 녹색이지 않다. 그 이유는 녹색이 대표하고자 하는 것들의 편이 아닌 곁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녹색의 편이란, 정치생태학과 동시에 생태정치학을 펼치는 것이다. 프랑스 시인 프랑시스 퐁주가 취한 태도와 같이, 인간이 아니거나 인간을 감싼 것들을 더욱 대변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류의 거주가능성도 함께 보장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나무들은 움켜쥐었던 것들을 풀어버린다. 말들을, 하나의 급류를, 녹색 구토를 쏟아낸다. 온전한 말을 틔우고자 한다. 어쩌겠는가! 가능한 방식으로 질서가 세워지리라! 아니, 실제로 질서가 세워진다! (···)”

『계절의 순환』2 중에서

  1. 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이규현 옮김, 이음, 2022. (p.122)

  2. 프랑시스 퐁주, 최성웅 옮김, 읻다, 2019. (p.45.)

배선우

그동안 썼던 별명들은 한때의 나를 잘 설명해줬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또 다른 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격언을 실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의미를 추구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분간은 지구를 횡단하며 ‘생활철학자’라는 직함으로, 살고 싶은 길, 살아가야 할 길을 궁리하려고 합니다. 잘 살기 위해 책을 읽고, 주로 서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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