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자리매김되어야 할 듯한 홍익인간과 재세이화 – 기후 위기 속에서 『삼국유사』 「기이」 ‘서왈’・‘단군조선’ 읽어보기

언제부터인가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꽤 많은 한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 대한민국의 교육 이념으로 자리잡았으며, 미래 사회에서도 지향할만한 가치로 남아있을 듯하다. 그러나, 기후 환경 위기를 거치면서, 이 가치들은 그 위기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듯도 하다.

합리적 이해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재를 믿는 태도

일연(一然 : 1206~1289)이 편찬했고 지금은 한국의 주요 고전이 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기이(紀異)」라는 제목의 소단원이 있는데, 일연은 그 단원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무릇 옛날 성인들이 바야흐로 예(禮)와 악(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仁)과 의(義)로 교화를 펼치고자 할 때면, 괴이한 일과 완력, 어지러운 일과 귀신[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하지만 제왕이 일어날 때는, 제왕이 되라는 하늘의 명을 받고 예언서를 받게 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일반 사람과는 다른 일이 있는 법이다. 이렇게 된 연후에야 큰 변화를 타고 군왕의 지위를 장악하여 제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 그러한 즉 삼국의 시조가 모두 다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에서 나온 것을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이것이 기이편을 모든 편의 첫머리로 삼는 까닭이며, 그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다.”1

이 글에서 일연은, 예악인의(禮樂仁義)를 뿌리와 줄기로 하는 국가를 지향하는 정치가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일연은, 제왕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일반 사람과는 다른 일이 있는 법이라고 단정하였다. 제왕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제왕이 되는 자는, 제왕이 되라는 하늘의 명을 받고 예언서를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일연은 주장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연은, 중국 역대 제왕인 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소호씨(小昊氏)·설(契)·기(弃)·요(堯)·패공(沛公)의 등장과 관련된 이상(異常)한[extraordinary] 이야기들을 열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일연은 삼국의 시조가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 결코 괴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종교인들은 합리적 설명과 이해가 불가능한 것 이를테면 궁극적 실재의 존재를 믿는 것을 종교생활의 중요한 조건으로 한다고 본다면, 일연이 중국 역대 제왕과 삼국 시조의 등장과 관련된 이상한 이야기들을 쉽게 무시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만한 일일 것이다. 중국 역대 제왕과 삼국 시조들의 이야기를 대하는 종교인 일연의 이러한 태도 덕분에, 고조선과 삼국의 건국과 관련된 이상한 이야기들은 기이(紀異)라는 이름 아래 묶여서 『삼국유사』에 실려, 오늘날에까지 전하여 지게 되었다.

이성적이기에 일방향적인 환웅

『삼국유사』 「기이」에 첫번째로 실린 실린 이상한 이야기의 제목은 ‘고조선(古朝鮮)’이다. 일연은 이 제목에 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는 설명을 붙어놓았다. 이 이야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별로 안 이상한 이야기 ‘위만조선(衛滿朝鮮)’과 이 이야기를 구별시켜주기 위한 설명 같았다.

‘고조선’에서 일연은, 『위서(魏書)』, 『고기(古記)』,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배구전(裵矩傳)’을 인용하여, 고조선 시조의 등장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옛날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종종 하늘 아래 세상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그래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내려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太伯山)[태백산은 즉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이 분을 바로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한다. 환웅천왕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2

제석천(帝釋天)의 이름을 빌어 환인(桓因)을 설명한 것을 보면서, 일연은, 이른바 원형을 복원하기보다는,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가 요청하는 바에 따르면서, 불교인인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여, 고조선 시조의 등장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서고금의 건국 신화들 속에는 질투하는 신, 힘 자랑하는 영웅들이 산재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욕망은 희귀한 것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동서고금의 건국 신화들 속에는 질투하는 신, 힘 자랑하는 영웅들이 산재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욕망은 희귀한 것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일연이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환인[제석/하느님]에게 여러 아들[서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환웅은 하늘이 아닌 인간 세상에서라도 지배자가 되어 보길 원하였다. 그러한 욕망을 아버지인 환인이 허락하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弘益人間] 할만한 곳을 찾아 권하여 주자, 환웅은 아버지가 권하여 준 장소인 태백산(太伯山)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이름지었다. 이때 환웅은 무리 3천 명과 동행하였으며, 풍백[風伯 : 바람을 맡은 어른], 우사[雨師 : 비를 맡은 어른], 운사[雲師 : 구름을 맡은 어른]을 거느리고, 곡식[농사]·생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在世理化].

이것은, 고조선이 서기 전, 환웅이 세상에 내려와 욕망을 실현해 나가는 이상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환웅이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따른 가치들은 이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성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 가치들이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이다. 홍익인간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 라고 풀어 설명할 수 있다. 재세이화는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 이치에 입각하고 교화를 베푼다’ 라고 풀어 설명할 수 있다.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그것만 쳐다보고 있으면, ‘이 험한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밋밋한 가치들일 뿐일 것이다. 그렇지만, 동서고금의 건국 신화들과 비교하여 보면, 환웅의 욕망 실현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와 함께 하는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단연 돋보이는 가치들일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동서고금의 건국 신화들 속에는 질투하는 신, 힘 자랑하는 영웅들이 산재한다. 그런 신화들 사이에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욕망은 희귀한 것이다.

돋보이게 이성적이기는 하지만,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분명히 일방향적이기도 하다. 먼저, 환웅과 그의 조력자들이 선의(善意)를 가졌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정치는 속성상 일방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본질은 ‘보통 사람’과 다른 신분의 지배자였던 것이다.

독립 혹은 연대와 마찰할 수밖에 없는 홍익인간과 재세이화

‘소확행’ 불리는 생활방식과 같이 독립성이 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양될 때 해소될런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Markus Spiske
‘소확행’ 불리는 생활방식과 같이 독립성이 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양될 때 해소될런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Markus Spiske

그리고, 지금도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가장 앞서있는 가치인 듯하지만, 그 가치들은 일단 정치체가 확고하게 자리잡는 것을 전제로 추구될 수 있는 가치라고 볼 때, 개체의 독립성이 중시되는 사회에 부합되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개체의 독립성 만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존재한다는 현실인식에 따라 떠오른 연대라는 가치 또한, 그 연대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자발성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구되기 어려운 가치라고 볼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발성보다는 권력자의 의지에 더 강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가치인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연대라는 가치와의 마찰을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일연이 재구성한 고조선 시조의 등장 이야기는 고려시대가 지나가면서 그 수명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大倧敎)의 장학생으로 1920년대에 독일의 예나대학교에 유학하였던 철학자 안호상(安浩相 : 1902~1999) 박사가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의 교육 이념인 양 여겨지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서, 정치는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치에 입각하고 교화를 베풀고자 하는 정치가 행하여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로 남아있다. 그런 상태에 더하여, 사람들에게는 독립과 연대라는 가치의 체화가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여기에서의 강한 요구 가운데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기후 환경 위기가 사람들에게 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기는, 실제로는 주체적이지 못한 삶 달리 말하자면 타자의 삶을 부러워하고 모방하여 과소비로 귀결되지만 ‘소확행’으로 미화되는 생활 방식으로 인하여 초래된 면이 있으면서도, 타자를 의식하지 않고 생활방식을 바꿀 수 있는 독립성이 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양될 때 해소될런지도 모른다, 이 위기는, 모두의 삶이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더 커지고 빨라져 왔으면서도, 가급적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연대할 때 약화의 속도도 빨라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지금 여기에서도 지향하여 볼 만한 가치들인 듯하지만, 기후 환경 위기라고하는 새로운 현실 속으로 발을 들인지 오래인 만큼, 독립이나 연대 같은, 지금 여기의 위기 때문에 중요해진 가치들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 같다.

【인용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일연, 신태영)


  1. 일연, 『삼국유사』 「기이」‘서왈’

  2. 일연, 『삼국유사』 「기이」‘고조선’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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