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의 윤리] ① 너도 말하라

김애령 선생님의 저서 『듣기의 윤리』를 읽고 쓴 서평을 앞으로 3회에 걸쳐 시리즈로 연재할 예정이다. 매회 『듣기의 윤리』 1부, 2부, 3부의 내용을 각각 정리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이번 글은 시리즈의 첫 번째로, 1부에서는 말하는 주체와 서사 정체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글은 김애령 선생님의 저서 『듣기의 윤리』1 1부를 읽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이 작업은 이전에 기고했던 「실패로부터 시작하는 자기 창안」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작업물은 이 글을 시작으로 시리즈로 발행될 예정이다. 각각은 『듣기의 윤리』 1부, 2부, 3부의 내용을 정리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말하는 주체와 서사 정체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너도 말하라

생각이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않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또는 처음부터 꺼낼 수 없는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말하기를 계속하거나 시도한다.

당신은 왜 말하는가? 또는 왜 말할 수 없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말하기를 시도하는가?

저자는 말하기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말하는 활동을 통해 인간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과 ‘인간다움’을 획득한다. ‘의미 있는’ 발화, 즉 사회적 언어로 말하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단순히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치 있는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상태”(P.27)가 된다.

그렇다면 “어떤 소리가 ‘의미를 가진 발화’로 인정받는가? 누가 그것을 의미 있는 언어로 인정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아렌트에 의하면 ‘공적 공간에 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로고스의 언어(의미 있는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공적 공간이란 너와 나의 ‘사이’를 뜻한다. 즉, 타자의 존재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아렌트가 강조하는 바는 로고스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자만이 ‘사이’, 즉 공적 공간에 행위 주체로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적 공간에 출현하기 위해서는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도 로고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P.41).

아렌트의 이러한 주장은 주체가 있기 위해 타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주체화의 과정은 공적 공간에 자신을 세우는 과정이다.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동등성과 차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과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 있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첫째이다.
나는 여성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서울에 산다.

나를 구성하는 것 중 어떤 것은 너와 공유하고 어떤 것은 너와 공유하지 않는다.

이렇게 너와 나 ‘사이’를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할 수 있다. 나의 입을 떠난 발화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고 “자기 외부의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P.38)가 된다. 주체화는 타자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로고스의 언어로는 담기지 못하는 자리가 있다.

버틀러는 아렌트가 공적 영역에서 말할 것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사적 영역의 이들을 배제했다고 지적한다. 버틀러는 “사적인 영역, 즉 정치 이전의 영역에 특정 집단을 밀어 넣지 않고서 공적 영역을 구성할 수 있을지”(P.45) 묻는다. 또한 아렌트의 사상에서 경제적 영역이 생략되거나 주변화되는 부분을 문제 삼는다. 저자 역시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어야만 인간적인 생존도 가능하다며, 그렇기에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발화되는 과정에서 각색되고 재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말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사진출처 : Kristina Flour
발화되는 과정에서 각색되고 재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말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사진출처 : Kristina Flour

한편 애초에 나의 이야기를 실증적으로 말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있다. 리쾨르는 자신의 저서 『시간과 이야기』를 통해 언어가 어떻게 경험 세계와 관계 맺는지를 다룬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서사는 그저 이야기된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해석이며, 모든 해석이 그러하듯 가치 판단을 함축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서사는 곧 자기 평가의 수행이다”(P.82).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자기 경험에 대한 해석 활동을 서사 정체성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서사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언제, 누구에게, 어떤 조건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생략, 미화, 왜곡될 수 있다. 하지만 말하기 행위를 통해 나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일관된 서사가 되고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역사가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언제나 매 순간 내 것이 아닌 관점의 매개를 필요로 한다”(P.85). 네가 있기에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너에게 비추어 봄으로써 나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니 듣기의 윤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대 말할 수 없는 것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고개 돌리면서

그대 말할 수 없는 것만 말하지

입 나만 여닫을 수 있다는 듯

그대 들을 수 없는 것

듣는 사람들로부터는 고개 돌리면서

그대 침묵 속에 들었다 생각하지

귀 나만 열어둘 수 있다는 듯

해소되지 않는 침묵과 발밑의 숫자들

여기 이기고 지는 사람은 없는데
아 이제

내가 말할게

그대 입과 귀는 그대 것이 아니었다고


가사가 알쏭달쏭하다. 책을 읽고 떠올린 노래, 이민휘의 「빌린 입」의 가사 일부이다. 입을 통해서는 ‘나’를 바깥에 내놓고, 귀를 통해서는 바깥의 ‘너’를 담는다. 입을 통해 밖으로 나간 말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발화되는 과정에서 각색되고 재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말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빌린 입」의 가사에서처럼,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들을 수 없는 것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들을 것인가’는 인간에게 말하기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1. 김애령, 『듣기의 윤리』, 봄날의 박씨, 2020.

보배

꼼지락거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인스타그램 @backbaobei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