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정동 해방 혹은 다른 기쁨의 배치 – 극단 ‘지금 아카이브’의 2020-2022 코미디캠프 감상기를 겸해

이 세계가 안정되고 균형적으로 보일수록 거기에는 무언가, 누군가를 보이지 않게 은폐하는 구조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마이너 필링스, 마이너리티 정동, 정동적 소외 등은 그것을 느끼는 이의 탓이 아니다.

한 사회의 정동 구조와 마이너 필링스

2020년 영어로 출간되어 2021년 한국어로 번역된 『마이너필링스』(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2021)라는 책이 있다. 최근 자기서사, 에스노그래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주목받은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미국 내 아시아계 여성으로 살아온 저자가, 스스로의 생애를 돌아보며 힘들었던 감정(‘마이너필링스’의 저자가 말하는 ‘감정’이 지니는 ‘유동성’ ‘다른 힘으로의 이행’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 단락부터는 ‘정동’이라고 바꿔 적는다.)들의 진원지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책이다. 책의 제목이자 저자가 말하는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는 일상에서의 인종적 체험이 쌓이고 스스로가 인식하는 현실이 의심받고 무시당하면서 생기는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그렇기에 안 좋게 여겨져 온 “인종화된 감정”을 의미한다.

마이너 필링스는, 우선은 미국 내 아시아계 여성의 복잡한 위치성에 기반하는 정동적 상태에 대한 명명이다. 
사진 출처: Riccardo Mion
마이너 필링스는, 우선은 미국 내 아시아계 여성의 복잡한 위치성에 기반하는 정동적 상태에 대한 명명이다.
사진 출처: Riccardo Mion

저자는 예를 들어 어떤 인종 차별적 모욕을 경험하고도 그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면 그것은 너의 망상일 뿐이라는 식의 말을 듣곤 했고, 그때 스스로에게 생기는 부정적 느낌(자학, 우울, 짜증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괴로웠던 것 같다. 즉, 보고 들은 것 모두 확실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폄하되거나 부정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스스로가 자기 감각을 의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의 초래되는 피해망상, 수치심, 짜증, 우울 등이 마이너 필링스라는 말에 함축된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한 사회의 구조가 개인을 향해 가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의 결과다. 또한 주변적 존재들이 종종 경험하는 정동적 소외의 이유일 것이다.

즉, 마이너 필링스는 우선은 미국 내 아시아계 여성의 복잡한 위치성에 기반하는 정동적 상태에 대한 명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어떤 사회의 주류/비주류의 구조와 그 정동적 위계를 가시화하는 명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 어떤 장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측은 기존 장의 자원을 상대적으로 많이 누리고 있는 위치일 때가 많다. 위치는 존재뿐 아니라 정동을 분할한다. 정동은 개인적이면서 늘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즉 어떤 집단 안에서 끊임없이 눈치를 보거나 분위기를 헤아리려고 애쓰는 것은, 어떤 위계 속 위치에서 비롯되는 정동적 불안함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잠시 강조해두지만, 이것은 정체성보다는 어떤 위치들에 따라 유동하는 정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어떤 존재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질에 대한 명명이라면, 위치성은 그 존재들이 거하는 장소와 교착하는 특질을 함축한다.)

실제 우리는 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정동에 동참하기 어렵거나 소외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슬퍼하거나 즐거워할 때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며 안절부절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도 사소하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길 때가 많다. 타인에 의해 개인적인 기질 탓이라고 일축될 때도 많다. 특히 불안, 두려움, 우울, 짜증 등은 병리적인 것으로서 사회적 교정, 치료의 대상일 때도 많다. 그러니 그러한 정동은 꽁꽁 숨겨야 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정동은 결정되어 있거나 본질적인 무엇이라기보다 늘 어떤 역사의 지층이나 그 사회가 구조화된 것이다. 이 점을 지금 기쁨의 신체적 표현인 ‘웃음’의 사례를 통해 생각해볼까 한다.

기쁨의 정동과 웃음의 공동체

웃음은 신체와 정동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용이다. 단순화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가령, 무서울 때 소름이 끼치듯 즐거울 때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신체와 감정은 직접적으로 연동되어 있다. 신체의 움직임은 종종 기습적이다. 웃음은 불수의근(不隨意筋)의 작용이어서 잘 통제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그것은 공간에 눈에 띄는 파동을 가져온다. 그 파동이 시·청각, 촉각적으로 다른 신체에 가닿고 그 신체에 변이를 가져온다. 웃음이라는 신체적 반응은 쉽게 서로를 전염시키고 정동시킨다. ‘나는 이쯤에서 웃어보겠어’ 혹은 ‘이제 그만 웃어야지’ 같은 생각이나 의지는 웃는 몸 앞에서 종종 무력하다.

20세기 말 이래로 정동과 신체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찰하게 만든 스피노자의 관점에서의 웃음도 생각해본다. 잘 알려져 있듯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정동(affectus)의 세 가지 구성요소로서 욕망, 기쁨, 슬픔을 언급했고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 즉 힘을 증대시키는 정동을 기쁨의 정동이라고 했다. 또한 스피노자의 해석자 질 들뢰즈는 강렬도(intensité) 개념을 도입하여 슬픔과 기쁨이 정반대의 상태나 표상이 아니라는 점을 탁월하게 설명했다. 강렬도의 정도에 따라 우리는 늘 다른 문턱(threshould)들을 넘는다. 슬픔, 기쁨 등은 본래부터 상반되고 다르게 구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이행하고 있는 흐름 속에서 유동하는 신체의 변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생각할 때, 존재에 내재된 자기 보존의 본능, 즉 코나투스(conatus)라 일컫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즉, 세상 만물은 스스로를 보존시키는 것을 선으로 간주하고 자기 보존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악으로 간주한다. 몸은 의지와 무관하게 케이크와 독 중에서 무엇이 생명의 보존과 지속에 유리한지 선택할 줄 안다. 독을 선택하는 것은 몸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 힘의 감소를 향한 조작이다. 원리적으로 살아있음(생명)이란 곧 계속 스스로를 지속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자기 보존의 욕구는 결코 개체적인 것에 한하지 않는다. 잠시 스피노자의 말을 적어본다. “양태들의 고유한 역량은,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코나투스를 보존하려는 노력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즉,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실존하게 되며, 이러한 양태들 간의 무한한 인과관계로부터 자신의 존재 역량이 결정된다. 양태들은 자신의 고유한 역량의 정도에 상응하는 외연적 관계를 갖지 않고서는 결코 실존하지 못한다.”(B. 스피노자, 『에티카』, 3부)

그에 따르면 존재는 근본적으로 외부원인을 지니고 기본적으로 합성에 의해 그 힘은 증대되고 기쁨은 커진다. 좋은 것과 더 많이 연결될수록 힘은 증대하고 기쁨은 커진다. 반복하지만 슬픔과 기쁨은 정반대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평면, 내재성의 장 위에서 벡터를 달리하는 유동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동인가의 문제란 곧 무엇과 연결, 배치되는가의 문제이다.

이러한 코나투스는 앞서 내내 언급했듯 늘 신체를 수반한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에 물질적인 지지가 있기 때문이고,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곧 몸이다. 이때 이 존재하는 신체에 대한 관념이 정신이라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존재자에게 가장 기본적인 그 신체를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적 움직임으로의 코나투스가 작동한다. 이때 정신의 본질은 우선 현실에 존재하는 신체의 관념으로부터 구성되므로 정신은 우리의 신체가 긍정하는 것, 신체의 능력을 증대하고 촉진하는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그렇기에 사랑이란 외부 원인의 관념을 수반한 기쁨이다. 단적으로 웃음이 바로 이 기쁨의 신체적 표현인 것이다.

또한 웃음이 외부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기 때문에 이 코나투스는 단순한 자기보존을 넘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의 관념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측면을 갖는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계속됨이 표상될 때, 사람은 기쁨을 느낀다’고 보았다. 사랑하는 것은 정신을 기쁘게 자극하기 때문이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행복하고 기쁨에 차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되고 기쁨의 상태를 누린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이의 기쁨이 증대되기를 바라고 애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합성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신의 본성을 나누어 갖는 것이고, 거기에서 이른바 사랑의 공동체가 생긴다. 스피노자적 의미의 사랑이란 근대의 정체성주의적 사랑, 즉 나의 속성과 비슷한 것을 이미 많이 나누어 가진 것에 대한 사랑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웃음에서 소외된다는 것

웃음의 연료는 종종 마이너한 존재와 상황들, 또는 누군가의 불행이나 고통일 때도 많았다. 사진 출처: Call Me Fred
웃음의 연료는 종종 마이너한 존재와 상황들, 또는 누군가의 불행이나 고통일 때도 많았다.
사진 출처: Call Me Fred

한편 웃음은 그 사회적 배치의 양상을 신체 수준에서 환기시키는 산물이기도 하다. 좀 전까지 웃음은 공동체의 결속감을 도모하고 확인시킨다고 이야기했다. 텔레비전을 보며 우리는 종종 같은 장면에서 웃고 운다. 인간이므로 똑같이 느껴서가 아니라, 어떤 정동의 회로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웃음의 연료는 종종 마이너한 존재와 상황들, 또는 누군가의 불행이나 고통일 때도 많았다. 예컨대 특정 인종 분장을 하고 야만인 흉내를 내면서 만들던 웃음, 이른바 바보 캐릭터들로 만들던 웃음, 상대를 자기보다 못한 존재를 격하시키면서 만드는 웃음, 누군가를 전형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만드는 웃음 등등. TV 프로그램의 대중적 웃음 콘텐츠는 지금도 이런 함정에 자주 빠진다. 지금은 폐지된 유명 개그 프로그램들은 물론이고, 최근 SNL코리아 프로그램을 둘러싼 비판의 사례를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물론 언젠가부터 그런 차별적 웃음은 지양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제까지 내가 웃어온 것들은 많은 경우 이 세계의 구조와 역학을 고스란히 반영할 때가 많았다. 멋모르게 함께 웃던 웃음들이 실은 이 세계의 어떤 폭력의 구조에 무감하게 공모되는 행위일 때도 많았던 것이다. 실제 웃음 이론 자체가 어떤 우월감의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되었다고도 이야기된다. 가령 타인의 부족함 앞에서 스스로의 우월감에 기반하여 초래되는 웃음을 처음 주목한 것은 근대의 정치이론가 홉스였다. 그는 대상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웃음에 대해 엄격했고, 이 측면은 웃음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할 때 주로 원용되곤 한다. (토마스 홉스, 「1부 인간에 대하여」, 『리바이어던1권』, 진석용 옮김, 나남출판, 2008.)

물론 모든 웃음을 홉스 식의 엄격성에 근거해서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웃음이 아닌 웃음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웃음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할 리 없고, 보편적 웃음이 존재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내내 말했듯, 웃음은 공동체성을 확인시키는 지표의 하나이지만 웃음의 진원지가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로 전달될 리 없다.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과 웃을 수 없는 사람이 공존한다. 웃음은 일상적인 것이지만 거기에는 우리 신체가 놓인 장소와의 뿌리 깊은 관계성이 숨겨져 있다. 웃음의 발생에는 표현하는 측의 웃음의 파악 방법이 있고, 수용자의 기호가 감추어져 있다. 거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정치, 사회, 시대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렇기에 한 시기 웃음을 자아낸 것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더 이상 웃음을 자아내지 못하고 낡은 것이 되기도 하다. 웃음은 늘 그 사회와 문화와 구성원의 신체적 배치 관계를 함축한다. 강조하건대 웃음이란 신체적으로는 기쁨의 정동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인 동시에, 한 사회 공동체의 차원에서는 그 신체가 놓인 장소가 구조화된 행동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대중매체를 매개로 향유해 온 웃음의 상당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같은 셈법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가령 인종, 성별, 지역 등의 정체성을 소재로 하던 흔한 웃음이 누구의 웃음이었는지 질문한다면 그것은 한 사회의 인권, 젠더, 생태 감수성 등의 수준과 거의 나란히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즉, 웃음이나 기쁨이나 공동체 자체가 선은 아니다. 결국은 ‘어떤’ 웃음, 기쁨의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가 핵심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을 다시 생각한다면 웃음은 인간 존재의 완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의 만족과 기쁨의 신체적 표현이었다. 또한 웃음은 자신의 고양된 기쁨을 타자와 연쇄적으로 주고받는 공동체의 구성 원리다. 타인의 불행이나 다름을 연료로 삼는 방식의 웃음은 어쩌면 진짜 기쁨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들의 쇠락과 소멸을 향해 가는 줄 모르고 질주하는 신체의 착각이다. 타인의 불행 앞에서의 기쁨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늘 찰나적이고 그것은 스스로를 안으로부터 갉아먹는다. 스피노자의 슬픔이나 기쁨의 정동을 힘의 증감, 소멸과 살림의 역량으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22 〈코미디캠프〉1의 사례① : 마이너리티 정동 해방의 사례와 신강수, 배선희의 무대

2022 〈코미디캠프〉 포스터.
사진 출처 : 지금아카이브의 코미디캠프 홈페이지
2022 〈코미디캠프〉 포스터.
사진 출처 : 지금아카이브의 코미디캠프 홈페이지

마이너리티 정동, 기쁨에서 소외된 이의 감정, 웃음 등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에 대해 더 적고 싶다. 개인적으로 2020-2022년 3년간 한 극단의 코미디 무대를 매년 챙겨본 참이었다. ‘지금 아카이브’라는 이름의 극단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2019년 여름 초입이었다. 윤이형 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 〈결투〉를 감상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코로나 상황이 시작했고 다들 조심스럽게 만남을 미루는 일들이 이어졌다. 당시 공연예술계에 몰아닥친 한파는 나에게도 강하게 체감되었다. 그러던 2020년 여름, 극단 ‘지금 아카이브’에서 소극장 무대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시 무대를 찾았다. 공공장소 인원제한이 엄격했던 때라 다들 조심스럽게 접선하는 기분으로 모인 어느 저녁, 신촌의 주택가 골목이 기억난다.

〈코미디캠프〉의 무대는 그때까지의 웃음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4명의 배우가 1인 무대를 통해 각자의 주제를 가지고 진행했는데, 매 해 주제와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젠더, 성별, 장애, 지역, 세대, 질병 등의 첨예한 제재를 다수의 재미에 호소하지 않는 방식으로 웃음의 회로를 만들어갔다. 가시화되지 않아온 마이너리티의 정동적 소외를 주제 혹은 웃음의 방법으로 활용했다. 잠시 2022년 〈코미디캠프〉의 4명 배우의 무대를 통해 마이너 필링스 혹은 마이너리티 정동 해방을 함께 경험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우선 저신장 당사자 배우 신강수 무대의 상징성을 짚어두고 싶다. 그의 무대는 스스로의 장애를 주제화하고 자신의 삶 그대로를 자신의 코미디 소재이자 내용으로 연기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는 자신의 코미디 연기가 종종 진지한 강연 같은 무게감으로 전달되거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때마다 좌절하게 된다며 농담을 한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판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신체적 특별함에 대해 한쪽에서는 놀리고, 한쪽에서는 극복하라는 메시지를 건네 왔다는 이중구속적 상황과 그 곤경을 명확히 전달한다. 그리고 그의 이른바 장애는 “나답게 살자”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 ‘나답게’라는 말은 실제 그의 코미디 전략에도 직접 활용된다.

발화자의 위치에 따라 혹은 장의 맥락에 따라 말은 늘 다른 상황을 만든다. 말은 결코 투명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말은 늘 특정 배치 속에 놓여 그 의미를 발한다. 배우 신강수는 스스로 서 있는 맥락에서 말들을 이리저리 구부러뜨리며 재배치했다. 단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은 말들이 그의 몸과 그의 위치를 경유하면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의미들로 바뀌고 다른 효과와 힘을 가졌다. 그는 2022년 내내 불거진 정치인들의 장애 혐오를 비판한다. 그런데 정색하며 저격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차갑게 풍자하면서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정색할 에너지조차 아까운 것으로 만든다. 그는, 어떤 르상티망에 기대지 않고 자신을 향했던 시선에게 오히려 자신들의 말이 반사되도록 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해방과 그 정동을 관객과 공유한다.

한편, 앞서 적은 마이너 필링스 즉, 예컨대 여성의 우울, 망상, 불안, 분노, 섭식장애 등도 연극의 제재가 되었다. 배우 배선희는, 개인적이거나 병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온 내밀한 감정들 및 그 신체반응이라고 여겨져 온 것을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주제화한 우울, 망상, 불안, 분노, 섭식장애 등은 “그동안 외면해왔던 여성으로서의 상처들”에서 기인한 21세기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의 증상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 혐오(misogyny)의 구조가 히스테리라는 병명을 만들었듯, 오늘날 여전히 상존하는 그러한 구조는 다양한 병리적 명칭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녀의 무대는, 그 병명과 낙인으로 인한 수치심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관객은 단지 관조자가 아니라, 그녀의 연기에 수행적으로 이입할 수 있었다.

실제 감정, 정동은 늘 마주침의 산물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특권적이고 배타적 소유물이 아니다. 배선희가 “날아가는 여자로서 대지와 바다로부터 멀리 벗어났다!”고 외칠 때 그 강렬함은 관객에게도 단번에 전이되었다. 마법의 주술같이, 마이너한 감정들은 그것의 진원지와 함께 단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러 감정의 억눌림과 해방을 몸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연기는 수치심, 자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해방시키는지 보여주었다. 또한 그것은 슬픔의 정동을 어떻게 방향을 틀어 기쁨의 정동으로 이행시킬지 엿보게 하는 것이었다.

2022 〈코미디캠프〉의 사례② : 질서에서 이탈하는 말들과 안담, 김은한의 무대

한편, 이러한 무대-관객의 얽힘과 수행성 자체를 밀어붙인 것이 배우 안담의 무대였다. 그녀의 무대는 시선 권력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표방했다. 그녀는 이 세상의 모순된 것들을 재치있고 현란하게 스토리텔링했다. 페미니즘, 퀴어, 동물 등의 마이너리티 제재를 과감하게 넘나들었다. 과장되었으나 심드렁한 만담으로 현실의 역학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산만하고 과장되어 도통 하나의 주제를 찾기 어렵게 펼쳐지지만 그 너머에 늘 첨예한 시의성 있는 주제가 놓여있음에 관객은 감탄했다. 관객은 그녀가 만든 역할극의 수행자가 되면서 이야기 흐름에 자연스럽게 승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주 그 방향을 비틀고, 관객이 기대하는 이야기 회로를 갑자기 거슬렀다. 관객은 자주 허를 찔렸다.

물론, 이러한 무목적을 가장한 일종의 합목적적 웃음 전략은 반드시 마이너리티의 웃음 전략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착시를 통하지 않으면서 마이너리티의 삶·일상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분명 기존의 익숙한 웃음의 회로와 달랐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 목적, 성과, 효율 등이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문화예술이 처해있는 소수성도 건강한 웃음의 제재가 될 수 있었다. 배우 김은한의 무대가 바로 그 점에 주력했는데, 그는 부조리극이라는 오래된 형식을 웃음 콘텐츠로 재활성화하고, 오늘날 비주류 문화예술 상황을 구출해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들을 실존주의나 현대인의 비극성 같은 평가로부터 이탈시킨 대표적 인물이 철학자 질 들뢰즈다. 그는 어느 책의 각주에서, 카프카의 『심판』이 낭독되는 자리에서 폭소가 터져 나온 에피소드를 기록해두었다. 들뢰즈는 카프카의 문학에서 트릭스터의 가능성을 발견한 셈이기도 하다. 이 트릭스터의 원리야말로 기쁨의 정동과 활력 쪽에 닿아 있을 것이다. 배우 김은한의 무대들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트릭스터의 원리 혹은 시(詩)와 코미디의 접속이었다.

그의 코미디는 단일한 목적을 향한 이야기에 강박하지 않는 듯 보이고, 목적에 강박하지 않으므로 인과성이나 개연성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는 이야기의 우발성이나 무질서를 진열했다. 자유연상 혹은 의식의 흐름 같은 이야기가 자주 발화되었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 시간성과 인과성을 통해 성립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질서에서 이탈한 말들이 거침없이 활공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우발성과 무질서를 감지하는 순간 관객은 무방비하게 웃었다. 그의 무대에서 말이란 도구, 용도, 목적, 효율, 생산성 같은 의미의 계열로부터 해방되었다. 말들의 낯선 배치와 활용을 시청각적으로 재구성할 때 그의 무대는 어쩌면 혼자 놀기의 일종처럼 보였다. 혼자 노는 것에는 목적도 승패도 필요 없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어쩌면 논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인간의 여가와 휴식, 그리고 예술, 문화라는 것의 본래적 의미에 닿아 있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작가나 연기자는 이른바 ‘사라지는 매개자’ 혹은 ‘영매’ 등과 같이 정체성 없는 존재로서 또는 백색 지대의 중립자로서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런데 이런 측면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릴 것 같다. 특히 연극 무대에서처럼 직접 자기 몸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는 상황에서는 그 몸에 내재하는 정체성 혹은 그것의 기운과 누적된 정동을 결코 배역과 분리시킬 수 없다. 거기에는 목소리, 말투, 눈짓, 표정, 몸짓 등에 누적된 정동과 그 아비투스가 함께 전달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은 단지 픽션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통적으로 당사자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거기에 관객은 연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많은 마이너리티 정동들의 연결을 꿈꾸며

2010년대 중반 이후 전세계적으로 공히 다양한 당사자의 존재와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과거 담론이나 이론 혹은 활자 속에 존재하던 마이너리티가 스스로를 가시화했다. 그 과정에서 혹자는 소란스러움이나 무질서를 우려하며 다시 어떤 안정된 구조나 위계를 욕망하고 때로는 백래시에 동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계가 안정되고 균형적으로 보일수록 거기에는 무언가, 누군가를 보이지 않게 은폐하는 구조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안정감과 편안함이 느껴질수록 실은 그 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누리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도 높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가부장적 위계가 견고한 사회일수록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동화되려고 애쓰는 경향을 ‘해석노동’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어쩌면 일상 속 해석노동 역시 일종의 마이너 필링스, 혹은 마이너리티 정동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 글이 내내 강조했듯, 위치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정동적 차이와 위계 혹은, 한 사회의 구조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나아가 이것은,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작은 관계와 모임들 속에서도 함께 견주어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어떤 모임에 신참자로 들어가게 될 때 스스로 조심스러워하며 그 분위기를 살피는 일은 정도의 차이가 있거나 의식하지 못할 뿐 누구나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분위기에 익숙해질수록 스스로 신참자였을 때의 긴장이나 부담감은 망각해가곤 한다. 관계와 공동체에 익숙해지는 위치로 스며들면서 자연스럽게 그러해진다. 그런데 한편 그럴수록 필요한 것은 어쩌면 나의 편안함에 대한 질문이다. 나의 편안함과 익숙함은 가령 발언권을 더 가질 수 있게 하고 영향력을 더 행사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나의 편안함에 안주할 때 그렇지 못한 이들의 존재를 함께 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질문은 늘 이어져야 한다. 스스로의 사회적, 존재론적 위치에 대한 질문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어떻게 상상할지의 과제에 우리 모두를 연루시키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마이너 필링스, 마이너리티 정동, 정동적 소외 등은 그것을 느끼는 이의 탓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흔히 오해되듯 르상티망의 방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서 강조했듯, 다른 힘으로 변용되고 이행해갈 소지를 이미 그 안에 품고 있다. 소소하고 잘 눈에 띄지 않더라도 다른 정동의 메커니즘을 만들면서 이곳저곳에서 트릭스터들처럼 기습하고 출몰하고 깜짝 놀래키고 다시 숨고 다른 곳에 다시 나타난다. 이것이 전통적 공론장과는 다른, 온라인이나 독립출판이나 소극장 같은 작은 장소들을 매개로 하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떠올려 본다.

주류의 정동에 동참할 수 없다고 하여 어떤 위치에서의 스스로의 불편함, 불안함을 부적절하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 벡터를 달리하여 이곳저곳에서 도주선을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 현장들을 발견하고 서로 이어가면서 우리는 다른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시절, 서울의 어느 미로 같은 골목과 주택가의 건물 등에서 관객, 배우, 나 모두 경험한 것은 이 어렴풋한 연결의 든든함이었다. 최근 한 기업 광고 문구로 횡령된 ‘연결은 힘이 세다’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재전유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1. 젊은 연극인 3인이 만든 ‘지금 아카이브’는 김진아 연출로 2020-2022년 〈코미디캠프〉라는 제목의 공연들을 매해 무대에 올렸다. 첫회 공연 ‘틈’(2020.7.2.-11, 신촌극장)을 비롯하여, 2회 공연 ‘어린 시절’(2021.4.7.-12, 스튜디오SK소극장), 3회 공연 ‘파워 게임’(2022.8.18.-28, 펀타스틱씨어터) 등이 무대에 올랐는데, 이 글에서는 3회 공연 ‘파워 게임’을 다루었다.

김미정

문학을 경유해서 글을 쓸 때가 많습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