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바틀비 혹은 상투어」 ④ 패치워크의 미국과 치료사 바틀비

이 글은 1993년 『Critique et Clinique』에 실린 질 들뢰즈(Gille Deleuze)의 「Bartleby, ou Formule」(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93. Chapitre Ⅹ, pp. 89-114.)를 번역한 것으로, 2000년에 한국어판 「바틀비, 혹은 상투어」(김현수 옮김)라는 제목으로 『비평과 진단: 문학, 삶 그리고 철학』(인간사랑, P125-163)에 실린 적이 있다. 이번에 「바틀비 혹은 상투어」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어 앞으로 총 4회에 걸쳐 연재되고 있으며, 이번이 그 마지막회이다.

미국인은 영국의 부권 기능으로부터, 그리고 옛 명성이 사라진 아버지의 아들에서, 모든 민족의 아들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사진 출처: Clker-Free-Vector-Images
미국인은 영국의 부권 기능으로부터, 그리고 옛 명성이 사라진 아버지의 아들에서, 모든 민족의 아들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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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동체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가장 큰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까? 그것은 엄밀히 말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지리적・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에 이미 그 자체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일이 아니라 집단적인 일, 어떤 인민의 일, 아니 오히려 모든 인민들의 일인 것이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환상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프로그램이다. 멜빌의 독신자 바틀비는 카프카의 독신자처럼, “그가 산책할 수 있는 장소” … 아메리카를 “발견”해야만 한다.1 미국인은 영국의 부권 기능으로부터, 그리고 옛 명성이 사라진 아버지의 아들에서, 모든 민족의 아들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미국 독립 이전부터 미국인들은 그들의 소명과 가장 잘 양립할 수 있는 국가형태인 주(州)들의 연합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명은 “낡은 국가의 비밀”을, 민족・가족・유산・아버지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퍼슨, 소로우(Thoreau), 멜빌에 의해 영감을 받은 하나의 우주, 형제들의 사회, 인간들과 재화의 연방, 아나키즘적인 개인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모비딕』에서의 선언(26장)이 바로 그렇다.2 만일 인간이 그의 동료인간의 형제라면, 그가 신임하거나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한 국가에 속하거나 소유주거나 주주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인간인 한에서만 그렇다. 그때 그는 자신의 “폭력”, “백치같음”, “악행”을 이루는 저 특징들을 이미 잃어버렸으며, 또한 그는 자신이 “민주적 존엄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빼면 어떤 양심도 갖지 않는데, 그에게 있어 모든 특수성들은 고통과 연민을 일으키는 너무나도 불명예스러운 오점들로 간주된다. 아메리카는 특수성 없는 인간, 근원적 인간의 잠재력이다. 멜빌은 이미 『레드번』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전세계가 피를 흘리지 않는다면 미국인의 피 한 방울도 흘릴 수 없다. 그는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덴마크인, 스코틀랜드인일지니. 미국인을 조롱하는 유럽인은 그의 형제를 ‘라카’3라고 부르며, 그래서 심판받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완고한 히브리인의 민족성을 가진 편협한 종족의 인간들이 아니다. 히브리인의 피는 우리들 사이에서 배타적인 혈통을 유지함으로써 그것을 고귀하게 만들려는 시도로 인해, 그 품위를 잃게 되었다. … 우리는 어떤 민족이 아니다. 심지어 어떤 세계도 아니다. 멜키세덱처럼 세계 전체가 우리의 아비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빼면, 우리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 우리는 모든 시간의 계승자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것을 전 민족들과 나눠가진다.”4

19세기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보인다. 즉 코뮤니즘적 인간의 출현, 혹은 동지들의 사회, 미래의 소비에트의 출현, 재산・가족・민족이 없는 존재는 인간 즉 ‘지고한 인간’(Homo Tantum)이라는 것 말고는 다르게 규정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는 또한 다른 수단에 의해 행해진 미국인의 상황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의 특색들은 미국인의 특색들과 종종 혼합되거나 그 특색 위에 부과된다. 볼셰비키의 러시아가 자신의 힘으로 보편적 프롤레타리아화에,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에 있는 혁명을 만들려 했던 것처럼, 아메리카는 그것의 힘으로 보편적 이주민, 세계의 망명자에 있는 혁명을 창조하려 했다. … 계급투쟁의 두 가지 형태들. 그래서 19세기 메시아주의가 두 개의 머리를 갖는다는 것은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러시아적 형태만큼이나 미국의 실용주의로 표현된다.

다양하게 기워진 무한한 패치워크. 바로 이것이 미국인 특유의 발명품이다. 사진 출처: Erik Mclean
다양하게 기워진 무한한 패치워크. 바로 이것이 미국인 특유의 발명품이다.
사진 출처: Erik Mclean

실용주의가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축약된 철학적 이론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다. 반대로 우리가 실용주의에 관해 세계를 변형하려는 시도로,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나 새로운 인간을 생각하려는 시도로 간주하면 미국 사상의 새로움이 이해된다. 서양철학은 두개골 혹은 스스로를 세계 속에서 총체성으로 실현하고 인식 주체 속에서는 소유자로 실현하는 부성적 정신이었다. 멜빌이 모욕을 담아 “형이상학적 악당”이라고 말한 것은 서양철학을 향한 것인가? 미국의 초험주의(transcendentalism)(에머슨, 소로우)와 동시대인인 멜빌은 이미 실용주의를 계속 이어 나갈 그 특색들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진행 중인 세계, 즉 군도(群島)에 대한 긍정이다. 이는 조각들이 한꺼번에 맞춰져야 전체가 되는 퍼즐보다는, 오히려 시멘트를 바르지 않은 돌들이 헐겁게 쌓아 올려진 벽에 가까운데, 그 벽에서 모든 구성요소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만 또한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도 가치를 갖는다. 고립된 관계와 표류하는 관계, 섬들과 해협들, 부동의 점들과 물결치는 선들처럼 말이다. 진리는 항상 이처럼 “들쭉날쭉한 가장자리들”을 갖기 때문이다. 두개골이 아니라 척추와 척수. 하나의 천으로 만든 옷이 아니라 잡색의 할리퀸 의상, 심지어 하얀색일 때조차도 하얀 천을 덧댄 의상, 레드번의 재킷, 흰 재킷 혹은 위대한 코스모폴리탄이 그렇듯 다양하게 기워진 무한한 패치워크. 바로 이것이 미국인 특유의 발명품이다. 스위스인들이 뻐꾸기시계를 발명했다고 얘기되는 것처럼 미국인들은 이 패치워크를 발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또한 인식 주체, 유일한 소유자를, 탐험가들의 공동체나 군도들의 형제들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인식을 믿음으로, 아니 오히려 “신뢰”로 바꿔놓는다. 다른 세상에서의 믿음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서의 신뢰로, 신에 대한 것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로 말이다. (“나는 신앙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오포산5에 올라갈 것이다. … 나는 내 길을 걸을 것이다. …”)

실용주의는 이처럼 군도와 희망의 이중적 원리이다.6 그렇다면 인간들의 공동체는 진리를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구성해야만 하는가? 진실신용이 그것이다. 그들 이전에 멜빌이 그랬던 것처럼, 실용주의는 다음 두 개의 전선에서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첫째, 인간과 인간을 싸우게 하고 치료할 수 없는 불신에 자양분을 주는 특수성들에 맞서서. 둘째, 하지만 또한 보편자전체에 맞서서 그리고 위대한 사랑과 자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영혼들의 융합에 맞서서. 하지만 특수성들이 더 이상 영혼들에 들러붙지 않는다면 영혼들에는 무엇이 남게 되는가? 영혼들을 하나의 전체로 녹아들게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인가? 남는 것은 바로 그들의 “근원성”이다. 즉 언어의 한계에 있는 리토르넬로처럼, 각각의 영혼이 생산하는 어떤 소리이다. 하지만 각각의 영혼은 자기 육체를 이끌고 열린 길(혹은 열린 바다)로 나갈 때에만, 구원을 추구하는 일 없이 자기 삶을 이끌 때만, 자신을 구현하는 항해를 어떤 특수한 목적 없이 떠날 때에만, 그리고는 영혼이 소리를 듣고 그들이 내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다른 항해자들을 만날 때에만, 이 소리를 생산한다. 바로 이것이 로렌스가 새로운 메시아주의를, 혹은 미국 문학이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를 묘사했던 방식이다. 삶의 도덕성은 구원과 자비의 유럽적 도덕성에 맞서며, 영혼은 이 삶의 도덕성 안에서 다른 어떠한 목적도 없이 모든 접촉들에 열려 있는 길을 떠남으로써만 완성된다. 말하자면 다른 영혼들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고, 몹시 권위적이거나 아니면 앓는 소리를 내는 저 영혼들을 외면하면서, 비록 순식간이긴 하지만 분해되지 않은 채 자신과 동등한 영혼들과 화성과 화음을 이루며, 그것의 유일한 성취로 자유를 지니고, 항상 자신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준비를 갖춤으로써만 완성된다는 것이다.7 멜빌과 로렌스에 따르면 형제애는 근원적인 영혼의 문제이다. 형제애는 대체로는 오로지 아버지나 신의 죽음과 함께 시작하지만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형제애는 “가장 가혹한 증오에서 열정적인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의 모든 미묘한 동감들”인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관점을, 다시 말해 『엔칸타다스』(The Encantadas)(1854)에서처럼, 파노라마 쇼트와 트래킹 쇼트를 접합시킨 군도-관점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 관점은 『베니또 쎄레노』가 보여줬듯이,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청각적인 어떤 예리한 감각지각을 필요로 하며, 또한 개념을 “지각”으로 즉 생성 중에 있는 감각지각으로 대체해야만 한다. 이 관점은 그것의 구성원들이 신용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즉 그들 자신과 세계 안에서 그리고 생성하는 가운데 믿을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독신자 바틀비는 자신의 항해에 나서야 하며 자신의 누이를 찾아야만 한다. 바틀비는 그녀와 함께 진저 넛을, 그리고 새로운 주인을 먹어치울 것이다. 바틀비는 사무실에 틀어박혀 살면서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변호사가 그에게 새로운 직업[포목상 점원일]을 제안하자, 그가 “[그 일은] 너무 틀어박혀 있어서요”8라고 답한 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새로운 항해를 할 수 없다면, 그가 머물 유일한 장소는 감옥이다. 소로우가 “자유로운 사람이 명예롭게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말했던 그 감옥에서 그는 “시민적 불복종”으로 죽음을 맞이한다.9 윌리엄 제임스와 헨리 제임스는 실제로 친형제였는데, 헨리 제임스가 쓴 『데이지 밀러』(1878)에서 새로운 미국인 처녀 데이지 밀러는 그저 약간의 신뢰만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이 변변찮은 요구조차 충족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기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둔다. 그리고 바틀비가 변호사로부터 약간의 신뢰를 얻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을 요구했겠는가? 하지만 그 대신에 변호사는 자비와 박애로, 부권 기능의 모든 가면을 쓰고 응답한다. 변호사의 유일한 핑계거리란, 바틀비가 자신의 외로운 존재를 통해 그를 끌어당기려고 위협하는 그 생성으로부터 그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문들은 이미 퍼져나가고 있었다. 실용주의의 영웅은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라, 바로 바틀비이며, 데이지 밀러이며, 피에르와 이사벨이며, 오빠와 누이인 것이다.

“아버지 없는 사회”가 지닌 위험들은 종종 지적되어왔다. 하지만 유일하게 실재적인 위험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귀환이다.10 이런 점에서, 두 개의 혁명 즉 미국혁명과 소비에트 혁명, 실용주의적 혁명과 변증법적 혁명의 실패를 분리해서 보기는 어렵다. 보편적 이주는 보편적 프롤레타리아화만큼이나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후의 소비에트의 숙청이 그랬듯, 남북전쟁은 이미 몰락의 종소리를 울렸다. 민족의 탄생, 국민국가의 복원, 그리고 괴물스러운 아버지들이 급속도로 귀환한 반면, 아버지 없는 아들들은 다시금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페이퍼(paper)[『페더럴리스트 페이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옮긴이] 이미지, 이것은 프롤레타리아만큼이나 미국인들의 운명이다. 그러나 1917년에 많은 볼셰비키들이 문 앞에서 노크하는 사악한 힘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에 앞서 멜빌과 같은 실용주의자들은 형제들의 사회가 초래할 가장무도회를 볼 수 있었다. 로렌스에 훨씬 앞서서, 멜빌과 소로우는 미국의 악을, 다시 말해 벽―부성적 권위와 추잡한 자비심―을 재건설할 새로운 시멘트를 진단한 바 있다. 그리하여 바틀비는 감옥에서 스스로를 죽게 내버려 둔 것이다.

민족의 탄생, 국민국가의 복원, 그리고 괴물스러운 아버지들이 급속도로 귀환한 반면, 아버지 없는 아들들은 다시금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사진 출처: Patrick Langwallner
민족의 탄생, 국민국가의 복원, 그리고 괴물스러운 아버지들이 급속도로 귀환한 반면, 아버지 없는 아들들은 다시금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사진 출처: Patrick Langwallner

자성을 가진[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미국 감옥을 맨 처음 설립했던 사람은 바로 위선적인 피뢰침 상인[『피뢰침-사나이』(1854)]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다. 배(船)-도시는 가장 억압적인 법을 다시 제정하고, 그래서 형제애는 망루병들이 돛대 꼭대기에 움직이지 않은 채 있을 때에만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화이트 재킷』(1850)) 위대한 독신자들의 공동체는 그저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의 회사에 다름 아니다. 이 회사는 분명 부유한 독신자가 가난하고 핼쑥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막지 않는다. 화해되지 않는 두 인물들인 괴물스러운 아버지와 고아가 된 딸들을 재구축함으로써 말이다.(『독신자들의 천국과 처녀들의 지옥』(1855)) 미국인 사기꾼은 멜빌의 작품 전체에서 등장한다. 어떤 사악한 힘이 신용을, 『엔칸타다스』의 개-인간(dog-man)이 세운 진저리나는 “보편적 국가”만큼이나 잔인한 하나의 회사로 바꿔놓는가? 자비와 박애에 대한 멜빌의 비판이 절정에 달한 『사기꾼』은 일련의 교활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패치워크가 된 옷을 입은 “위대한 코스모폴리탄”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며, 또한 다양하면서도 서로 속고 속이는 신용사기 게임을 이기기 위해, 아주 약간의 인간의 신뢰 … 만을 요청한다.

이 거짓 형제들은 사악한 아버지가 지나치게 잘 속는 미국인들에 대한 자기의 권력을 회복하려고 보낸 것인가? 그러나 이 소설[『사기꾼』]은 아주 복잡해서 우리는 그 만큼 쉽게 반대로도 말할 수 있다. 즉 사기꾼들의 이 기나긴 행렬[이론]은 진정한 형제들의 희극적 버전일 것이다. 지나치게 의심 많은 미국인들이 사기꾼들을 알아본 것처럼, 아니 오히려 이미 그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처럼 말이다. 끝부분에서 수수께끼 같은 아이를 포함하는 이러한 인물 군(群)은, 자신들의 악마 같은 기획을 감추는 박애주의자들의 사회일 수 있지만, 또한 그것은 인간 혐오자들이 더 이상 스쳐 지나가면서 인식할 수는 없는 형제들의 공동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실패의 한가운데에서조차, 미국혁명은 계속해서 자신의 파편들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수평선을 도주하는 뭔가를 항상 만들고 심지어 자신을 달로 보내기까지 하면서, 벽을 깨부수고 실험을 다시금 계속하려고 항상 노력하면서, 이 기획 속에서 형제애를 찾고 되기 속에서 자매를 찾고 자신의 말더듬이 언어 안에서 음악을 찾고 언어 자체 안에서 순수한 소리와 미지의 화음을 찾으려고 항상 노력하면서 말이다. 카프카가 “작은 민족들”에 관해 말했던 것을, 멜빌은 그 전에 이미 위대한 미국 민족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즉 그것은 모든 작은 민족들의 패치워크가 되어야만 한다. 카프카가 소수자 문학에 관해 말했던 것을 멜빌은 그 전에 이미 자신의 시대의 미국 문학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에는 저자들이 거의 없었고 사람들은 너무나 무관심해서 작가는 거장으로 인정받아 성공할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가들은 비록 자신의 실패에서조차 오히려 집단적 언표작용(enunciation)의 담지자로 남아있다. 그것은 더 이상 문학사의 일부분을 이루지 않으며, 도래할 인민의 권리 혹은 생성하는 인류의 권리를 보존한다.11 분열증적 소명. 자신의 긴장증 혹은 거식증의 상태에서조차 바틀비는 환자가 아니다. 그는 병든 미국을 위한 의사, 치료제-인간, 새로운 그리스도 혹은 우리 모두의 형제이다.

※ 마침


  1. Kafka, Diaries 1910-1913, p. 28. [한글본] 카프카, 『그대 고독의 소리를 듣는가? 1』, 37쪽.

  2. [옮긴이주] “인간 세상은 주식회사나 국가처럼 혐오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악당도 있고 바보도 있고 살인자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비열하고 빈약한 얼굴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적인 인간은 너무나 고귀하고 찬란하며, 당당하고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게 어떤 수치스러운 결점이 있다면 동료들은 가장 값비싼 옷이라도 들고 달려가서 그의 결점을 덮어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 자신 속에서 느끼는 그 때 묻지 않은 남성다움, 그것은 우리 안에 깊이 숨어 있기 때문에, 외적 특성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원래대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 여기서 내가 말하는 당당한 위엄은 왕과 예복의 위엄이 아니라 예복이 없이도 드러나는, 세상에 널려 있는 위엄이다. 여러분은 곡괭이를 휘두르거나 못을 박는 사람들의 팔뚝에 그것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에게서 끝없이 나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는 그 민주적 위엄. 오, 신이여! 위대한 절대적 신이여! 모든 민주주의의 중심이자 둘레인 신이여! 신의 편재여. 우리의 신성한 평등이여! … 인간애라는 고귀한 망토를 펼쳐서 나 같은 사람을 모두 감싸준 정의로운 ‘평등의 정신’이여. 세상의 온갖 비난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그것을 견디게 해주소서. 민중의 수호자인 위대한 신이여!” 『모비딕』, 26장, 161-162쪽.

  3. [옮긴이주] 라카(Raca)는 ‘가치 없는’, ‘어리석은’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 ‘레카’의 헬라어 음역으로, ‘속이(머리가) 빈 사람’, ‘돌대가리’, ‘헛된 사람’, ‘미련한 놈’, ‘가치한 자’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이 상대방을 경멸하거나 욕할 때 사용했던 용어로,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사소한 욕이라도 그 죄가 가볍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마 5:21-26).

  4. Herman Melville, Redburn: His Maiden Voyage, Evanston and Chicago: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and Newberry Library, 1969, p. 169.

  5. [옮긴이주] 멜빌의 단편 『마르디』(MARDI: AND A VOYAGE THITHER)(1849)에 등장하는 상상의 산으로, 한때 미시시피주 야즈강 인근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 수어족의 마을이름이었다. 『마르디』의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나는 진실로 거기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소년은 슬프게 말했다. “하지만 그곳은 내 꿈이 나에게 보여준 길에 있을 것입니다. 오 인도자여, 나는 저 높은 정상에 도달할지 어떨지에 완전히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신앙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오포산에 오를 것입니다. 오 광활한 산이시여, 나를 도우소서!”(Vol.Ⅱ, Chapter Ⅴ)

  6. 자보르스키(Jaworski)는 이 군도로서의 세계를 혹은 이러한 패치워크의 경험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주제들은 실용주의 곳곳에서, 특히 윌리엄 제임스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권총 총격으로 구멍난” 세계. 이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를 찾는 일과 분리불가능하다. 『피에르 혹은 모호함』에서 플로티누스 프린림먼(Plotinus Plinlimmon)의 신비한 소책자는 이미 절대적인 실용주의의 선언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실용주의 역사 일반에 대해서는, Gérard Deledalle, La philosophie américaine, Paris: L’Age d’Homme, 1983을 참고하라. 조지아 로이스(Josiah Royce)는 그의 “절대적 실용주의”로 인해, 그리고 개인들을 통합하는 그의 “거대한 해석 공동체”로 인해 특히 중요하다. 로이스의 작품에는 멜빌의 많은 흔적들이 있다. 투기꾼, 보험금수령자, 보험업자라는 그의 이상한 삼인조는 어떤 점에서는, 편집증자, 우울증자, 예언자로 이루어진 멜빌의 삼인조로부터 유래한 것처럼 보이며, 혹은 심지어 삼인조의 희극적 버전을 미리 형상화한 『사기꾼』의 등장인물들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7. 이에 대해서는 D. H. Lawrence, “Whitman”, in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New York: Viking, 1953를 참고하라. 이 책은 또한 멜빌에 관한 두 편의 유명한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로렌스는 멜빌과 휘트먼이 그들이 비난했던 바로 그것에 굴복했다는 이유로 그들 모두를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렌스는 미국 문학은 그들에게 나아갈 길을 정해준 이 두 사람에게 고마워해야한다고 말한다. [한글본]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미국 고전문학 연구』, 김정아 옮김, 아카넷, 2018.

  8. [한글본] 멜빌, 『필경사 바틀비-미국』, 93쪽.

  9. [영역자주] Henry David Thoreau, Walden and Civil Disobedience, ed. Owen Thomas, New York: Norton, 1966, p. 233. “누군가를 부당하게 감옥에 집어넣는 정부 아래에서는 정의로운 사람이 머물 유일한 장소 역시 감옥이다.” [한글본]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정회성 옮김, 민음사, 2021.

  10. 이에 대해서는 Alexander Mitscherlich, Society without the Father: A Contribution to Social Psychology, trans. Eric Musbacher, New York: J. Aronson, 1974를 참고하라. 이 글은 역사의 운동들에 무관심하며, 부성적인 영국 헌법의 승인에 호소하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쓰여졌다.

  11. 미국문학에 대한 멜빌의 글에 대해서는 “Hawthorne and His Mosses”, in The Portable Melville, ed. Jay Leyda, New York: Viking, 1952, pp. 411-414를 참고하라. 이 글은 “작은 사람들의 문학”에 대한 카프카의 글에 필적할 만하다. in The Diaries of Franz Kafka: 1910-1913, entry for December 25, 1911, p. 210 이하. [한글본] 카프카, 『그대 고독의 소리를 듣는가? 2』, 182-190쪽.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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