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 도시농업 그리고 자기배려

『천개의 고원』이라는 책 중 왜 리좀을 주제로 선택했는지 이야기한다. 롤랑 바르트와 자크 랑시에르의 저서와 연결되는 지점을 알아본다. 도시농업과 리좀과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미셸 푸코가 주장했던 자기배려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본다. 리좀과 자기배려가 함께하면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는지 살펴본다.

들어가며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쓴 『천개의 고원』에 대해 처음 들었던 날이 기억난다. 시민운동을 하면서 만난 존경하는 선배가 자신이 감명 깊게 읽었으며 이 책이 자신에게 노마드, 즉 끝없는 몽골 초원에서 천막인 게르를 치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을 꿈꾸게 만들어 주었다면서 그들을 동경하여 몽고의 넓은 고원으로 여행을 다녀왔던 이야기를 들려주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천개의 고원』은 나에게는 그 선배였으며, 몽고 초원이었고, 유목민이고 드넓은 고원을 떠돌아다니는 자유인이었다. 막연하게 이미지로만 가졌지 실제로 눈앞에 마주할 기회가 없던 차에 기회가 왔고 과감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여러 인문학 책과 나름 어렵다는 철학책을 읽었기에 그래도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했건만 책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그 뜻이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사실 이 원고 청탁을 처음 받던 그 때, 5월 2일. 나는 『천개의 고원』을 한 번은 읽었고, 또 함께 읽고 싶었던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도 한 번은 읽었기에 동시대를 살았던 두 프랑스 철학자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는 포부를 가졌다. 하지만 원고마감일인 7월 20일이 다가올수록 나는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책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수준임을 알게 되었다. 마감이 임박한 오늘, 나는 결국 나의 마지막 수단인 가느다란 끈을 따라가는 아리아드네의 심정으로(롤랑바르트. 『밝은 방』, 동문선, 2006. p94) 나의 철학적 사유를 따라가는 것으로 원고를 가늠해보려고 한다.

왜 ‘리좀’인가

앞서 말했듯 내게 『천개의 고원』은 노마디즘, 즉 유목을 상징하는 책이었다. 영화 《노마드랜드》1 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할 때도 영화 자체보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먼저 떠올리기도 했다.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으며 책에 대한 환상은 높아만 갔다. 하지만 수업을 지나가는 과정 내내 책에서 노마드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책은 내가 상징처럼 알아온 노마드 대신 리좀에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아직 후반부 수업이 남아있기에 벌써부터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노마드보다는 리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이르지만 노마드를 만날 수 없었던 나로서는 현재에는 리좀이 좀 더 친숙할 수밖에 없다.

내게 『천개의 고원』은 노마디즘, 즉 유목을 상징하는 책이었다. 사진 출처: Vince Gx
내게 『천개의 고원』은 노마디즘, 즉 유목을 상징하는 책이었다.
사진 출처: Vince Gx

여기서 고백하자면 나의 노마드를 향한 감정에는 몽고초원의 로망이라는 판타지적인 심정뿐이었다. 그래서 책 읽는 초반에 리좀이라는 단어에 스스로 배타적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리좀이라는 단어에 보다 많은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리좀 자체가 가지는 생물학적인 뉘앙스를 차치하고, DNA를 모티브 삼은 것은 아닌가 싶은 나의 생물학적 의구심도 뒤로하더라도 리좀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고 내가 추종하는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와 닮아있어 좋았다.

롤랑 바르트는 리좀과 비슷하며, 자크 랑시에르는 리좀에 꼭 달라붙어 있다.

리좀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는 리좀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언어를 빌리면 아래와 같다.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던 말하지 않던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사람들은 각자 자기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았고 빨려 들어갔고 다양화되었다.’

천개의 고원, p.11

리좀은 무아(無我)가 아니라 무위아(無爲我)임을, 분절되고 잘라져서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갔으면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니고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그 무엇임을, 나는 여기 있지만 나를 감싼 모든 것은 이미 나랑 상관없는 나임을,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천개의 고원, p.54

멈추지 말고 쉼 없이 움직이며 나아가는 그 무엇이기에 나는 ‘리좀’을 주재료로 삼기로 하였다.

롤랑 바르트와 자크 랑시에르

비슷한 책.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동문선. 2004)은 책 자체가 리좀의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내가 처음 그 책을 접했을 때만 해도 알아먹을 수도 없는 언어의 조합이었던 내용은, 읽으면 읽을수록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나에게 다가왔기에 리좀과 꼭 닮았다. 이 책은 아름다운 분절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부분부터 읽어도 혹은 읽지 않고 건너뛰어도 부분과 부분이 연결되고 아름답게 이어지는 이야기들. 결국 이야기는 어떻게 나열되느냐가 아닌 어떻게 읽혀지느냐가 아닐까.

붙어있는 책.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출판. 2008)에서는 리좀이 실증된 사례를 보여준다. 프랑스어를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책만을 읽게 하면서 학생들은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프랑스어를 배워간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감으로써, 이렇듯 리좀은 이미 실현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스승의 역할과 학생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내 여정을 다시 설계하는 커다란 나침판으로 삼았다.

도시농업과 리좀

내가 도시농업을 접하게 된 것은 불과 2년이 지나지 않았다. 집에서 식물 키우는 방법을 배우려는 단순한 이유로 찾은 도시농업센터에서 내가 배운 것은 ‘식물을 키우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기후위기’와 ‘유기농업’, 그리고 자연과 함께하는 ‘생태’를 배웠다. 그리고 세상의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과 방법으로 저마다의 생태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내가 느낀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생동감이었다. 낱알보다 작은 씨앗에서 커다란 열매를 맺는 식물을 보며 느낀 생동감은 경이로움이라는 말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내가 살아있음을 다른 개체가 움트는 것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이렇듯 도시농업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소중하다. 도시의 시민들에게 생동감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도시농업은 리좀과 닮았다. 사진 출처: Tom Jur
도시농업은 리좀과 닮았다.
사진 출처: Tom Jur

도시농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 곳곳에서 자생함으로써 리좀을 닮았다. 이웃집 베란다에서, 길 건너 아파트 정원에서, 동네의 자투리땅에서, 우리 집 옥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작물은 분절되고 접합되고 다양해지고 소통한다. 생동감은 분절되고 새로 만들어지고 멈추지 않고 다시 생성된다. 도시농업을 배우면서 유기농을 배우고, 유기농업을 배우면서 잡초에 대해 이해했다. 잡초를 이해하게 되면서 그들과 공유하는 농업을 고민하게 되었고, 공유하는 다양한 식물들은 온갖 벌레들이 연결되었다. 벌레들로 인해 다양한 동물들이 연결되며 작은 생태계를 배웠다. 그리고 작은 생태계는 또 다른 또아리를 틀며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도시농업을 전달하게 만든다. 이렇듯 도시농업은 리좀과 닮았다.

키움은 생태라는 커다란 가치를 배우는 가장 쉬운 길로 보인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야기하는 리좀은 따로 가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천하는 이에게 리좀은 자연스레 가치를 따르도록 종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을 따라가듯이 말이다.

푸코의 자기배려와 리좀 : 분명 다르지만 닮은 이야기.

미셸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사람은 스스로 변하는 힘을 가졌고 그 힘은 자기 안에 스스로 구축하는 것이지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푸코의 이런 자기배려를 리좀에 적용한다면, 리좀이 멈춰있는 존재가 아닌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하는 존재로서 설명되는 근거로 보인다. 리좀은 분절된 자기, 하지만 분절된 자기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나 새로운 자기로 태어난다. 새로운 자기를 잃지 않으려면 해방된 자기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자기배려를 통한 살아있는 자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동감이 넘치는 자기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읽은 리좀은 분절되어 새로운 자기로 연결되고 변화되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책에서 계속해서 기관, 기계 등을 쉼 없이 이야기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구조주의를 넘어 탈구조주의로 향한다. 리좀은 불변항의 구조를 넘어서기 위한 필사의 도약과도 같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구조는 그 자체로 예속과 억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조주의 너머의 사유처럼 자기를 해방시키려는 푸코의 자기배려 역시도 자기 긍정의 사유로 뻗어나간다.

푸코는 이렇듯 자기배려라는 어휘를 통해 긍정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물론 푸코도 들뢰즈, 가타리도 그들의 글 어디에서도 긍정의 이야기를 찾기는 어렵다. 그들은 공히 냉철해보이고 무감각해보이고 현상을 묵묵히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따르고 실천한다면 그 길은 긍정의 길 이외에는 보이지 않기에 긍정의 철학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만하다.

끝마치며

그동안 내가 생각한 구조주의 맹점 중 하나는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예속과 억압으로 해석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구조주의 너머의 지평을 열었다. 그들을 구조주의의 일종이라고 보았던 나의 단순한 생각은 『천개의 고원』을 읽으면서 보기 좋게 빗나가고 있다. 어찌 본다면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글에서 긍정은 점점 더 명확해진다.

푸코의 가장 큰 장점은 계보학을 통해 세상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예속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 주는 데 있다. 물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듯 직접적인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 계보학적 가르침을 통해 기존의 질서가 허위임을 밝히고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는 자아의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고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 바로 이 지점, 푸코가 보여준 자아의 힘이었다. 그들의 글은 논리정연하고 비판적이고 새로운 길을 과감하게 제시하고 있으나 그 길이 과연 세상을 긍정의 방향으로 이끌 수 있냐는 점이 의문이었다. 다양한 길은 보여주지만 그 길이 부정의 길이어도 상관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에 푸코의 자기배려를 도입하는 순간, 나는 작은 씨앗이 움트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되었다. 리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하겠지만 자기배려의 길을 갖는 순간 리좀은 긍정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들뢰즈, 가타리와 푸코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긍정의 자기이야기를 말이다.

두서없이 글을 쓰다 보니 왠지 시간에 쫓겨 글을 쓴 듯 숨 가쁘기만 하다. 내 글이 분절되어 읽히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가 리좀과 자기배려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 있게 글을 마무리하는 것은 이 글이 비록 남에게 읽히지 않을지라도 나의 사유 안에서는 끊김 없이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은 분절되고 결합되고 나를 떠나면 새로운 나로 재창조된다. 리좀이다.


  1. 구글검색에서 ‘노마드랜드’가 아닌 ‘노매드랜드’로 나오지만 노마드가 이 글에서는 어울리기에 ‘노마드랜드’라고 쓴다.

노지훈

누구나 찾아와 기댈 수 있는 공원의 작은 벤치 같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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