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철학하기] ⑰ 21세기 조선통신사 패치 완료! – AI는 모르는 찐 여행

울산 울주군 두서면의 두광중학교는 매년 전교생이 수학여행을 떠난다. 작은 학교의 여정에 동행하며 교육의 본질을 돌아보았다.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역할을 나누어 자료를 조사하고 모둠활동을 구상했고 교사와 학부모가 사전답사를 갈 때도 몇몇은 참가했다. ‘배움의 주체가 되는 것 이상의 교육 목표가 어디에 있을까!’하는 마음을 이 여행기에 담았다.

학교와 마을이 품은 아이들

두광중 수학여행단은 2026년 9월 27일(일)부터 10월 1일(목)까지 4박 5일의 일정으로 일본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나라(奈良)를 방문했다. 여정에는 1~3학년 전교생 22명(22명 외 몇 명은 사정상 불참), 교사 5명, 여행사 3명 등 총 30명이 함께 했다. 나는 현장안전요원으로 참여하며 아이들의 배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교직원이나 학부모는 아니지만 실무에 필요한 자격을 갖추었고, 오랫동안 마을공동체 활동과 학교협동조합 활동을 이어오며 학교, 학생, 학부모와 쌓아온 신뢰가 밑바탕에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 역할이 단지 안전관리에만 머물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통제하기보다 한걸음 뒤에서 믿고 기다려주는 동행’은 학교의 교육 방향이자 내가 마을에서 아이들을 마주한 방식과 같은 결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감동과 감탄의 여정 속에서 작은 학교이기에 다다를 수 있는 배움의 깊이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만남– 길

옛날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비행기를 타면 겨우 1시간 20분 남짓이다. 그럼에도 17~18시간 걸리는 긴 뱃길을 선택한 것은 ‘두광중, 통신사 이예의 길에 서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번 수학여행을 담당한 역사 선생님이 출국 전 재차 알려주셨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 3층에서 인사를 나눈 뒤 출국수속을 마치고 ‘팬스타 크루즈 미라클호’라는 이름의 커다란 배에 올랐다. 오후 3시 출발 내일 오전 8:30 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옛날의 통신사들이 보통 15일, 날씨가 나쁘면 수개월씩 걸려 가던 길이었음을 생각하면 눈부신 기술의 발전이다.

배는 부산항을 출발해 남동쪽을 향해 가며 오후 8:20쯤엔 관문교(関門橋) 아래를 지나갔다. 일본의 혼슈(本州)의 야마구치현(山口県) 시모노세키시(下関市)와 큐슈(九州)의 후쿠오카현(福岡県) 기타큐슈시(北九州市) 모지구(門司区)를 잇는 1,068m 길이의 다리이다. 이름 그대로 일본으로 가는 관문을 통과한 느낌이다.

우리가 지나가는 바닷길은 옛 조선통신사들이 나아갔던 길과 그대로 겹친다. 통신사들은 긴 항해를 하는 동안 시모노세키(下関), 나카노세키(中関), 카미노세키(上関) 등에 정박하며 머물거나 현지 사람들과 문화교류를 했다고 한다. 지명에 上, 中, 下가 붙은 까닭은 과거 일본의 수도인 교토(京都)에 가까울수록 上, 멀어질수록 下를 붙였기 때문이다.

갑판에 나온 아이들이 밤바다와 야경을 보며 타이타닉 영화의 유명한 장면을 흉내 내며 ‘앤 다이아~’라며 노래를 불렀다. 20세기에 타이타닉 영화를 관람한 입장에서 그 노래가 아닌 것을 알지만 신이 난 아이들의 여행기분을 깨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얘들아, 타이타닉 주제가는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이야!’라고 이제야 말해 본다)

(좌)부산에서 오사카까지 운항 거리는 375마일(약 604km) / (중)관문교 / (우)타이타닉. 사진 제공 : 김진희

검은빛 바다의 이름

배 안에는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선박 운항 정보 화면이 떠있었다. 지도를 보고 있으니 ‘현해탄(玄海灘)을 건너간다’는 말이 생각났다. 일제 강점기 이후의 문학작품이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표현으로 검은 바다라는 뜻이다. 쿠로시오(黒潮) 해류 역시 검은 조류라는 뜻이니 같은 맥락이다. 옆에 서있던 아이에게 현해탄과 쿠로시오의 이름이 모두 바다의 검은 색깔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건네니 “그런 뜻이 있었어요?”하며 눈을 반짝인다.

글을 쓰며 현해탄이 정확히 어디일까 찾아보았다. 일본 큐슈의 북서쪽 앞바다를 가리키며 옛날부터 파도가 거칠고 험한 곳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유학생들과 강제징용자들의 애환이 담긴 바다이기도 하다. 그 길을 이제는 크루즈선을 타고 멀미약을 챙겨 먹으며 편안하게 지나간다. 이번 여행 동안 아이들이 묻지 않으면 설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결국 참지 못하고 아는 척을 한 셈이다. 괜히 했나 싶다가도 길게 얘기하진 않았으니 괜찮겠지 하며 혼자 웃어 넘겼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염원

기타미도(北御堂). 사진 제공 : 김진희

오사카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사찰 기타미도(북어당, 北御堂)는 조선통신사가 숙소로 머물던 곳이다. 오사카의 대동맥이라 불리는 미도스지(御堂筋)에 자리한 이곳의 입구(산문, 山門)는 문틀만 있고 문짝은 없는 ‘문 없는 문’으로 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대공습으로 전소되었다가 재건된 이곳에서는 뻥 뚫린 문으로 내부의 본당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학생들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사진에 담던 중 오른쪽 끝자락에 있는 게시판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私の願いは執着になるが私への願いは支えとなる。”

(나의 소원은 집착이 되지만 나에게로의 소원은 버팀목이 된다)

‘내 소원이든 나에게로의 소원이든 결국 내가 비는 것 아닌가? 조사 하나에 무슨 차이가 있길래 하나는 집착이 되고 하나는 버팀목이 될까’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바쁜 일정 탓에 일단 글귀가 잘 보이게 나왔는지 사진만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다시 사진 속 글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찬찬히 새겨보니 비로소 문장의 주체가 보였다. 앞의 ‘나의 소원’은 내가 가지는 욕망이라면 뒤의 ‘나에게로의 소원’은 타인이 나를 향해 보내주는 염원이다.

“내 소망은 집착이 되지만 나를 향해 비는 다른 사람의 염원은 버팀목이 된다.”

사진 속 아이들의 뒷모습을 다시 본다. 그 순간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얼른 숙소 가서 쉬고 싶다’, ‘게임하고 싶다’, ‘굿즈 사러 언제 가지?’, ‘저녁에 맛있는 걸 먹어야지’ 같은 수많은 ‘나의 바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향한 주변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님은 아이가 아프지 않고 친구들과 즐거운 추억을 쌓아오길 바랐을 것이고, 동행한 선생님들은 이 여정이 끝까지 무탈한 배움의 길이 되길 염원했을 것이다. 시선을 더 과거로 돌려보면, 수백 년 전 통신사들의 가족들 역시 한마음이었을 것이다. 길고 험난한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바라지 않았을까.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소중한 사람의 무사를 바라는 수많은 마음이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 안전하고 뜻 깊은 여행길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진다.

하루카스 300 전망대– 길 잃고 아찔, 반짝이는 야경에 아찔

“오사카 야경 관람 이벤트, 하루카스 전망대 투어 신청자, 저녁 8시 로비로 모이세요!”

김○○선생님이 준비한 밤마실 이벤트. 공식 일정이 아니어서 더욱 설레는 마음으로 모인 인원은 6명이었다. 걸어갈지 전철을 탈지, 표는 어떻게 끊고 어느 플랫폼으로 가야 할지까지 아이들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섰다.

다이코쿠쵸역(大国町駅)에서 전철을 타고 텐노지역(天王寺駅)에 내려 아베노하루카스(アベのハルカス) 빌딩을 찾아가는 길. 개찰구 앞에서 몇 번 출구를 찾아야 할지 아이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는 홀린 듯 혼자 개찰구를 먼저 빠져나오고 말았다. 앗! 아이들 뒤에서 헤매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내 임무였음을 순간 잊었던 것이다.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어떡하지?”, “전망대에서 만나요!”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구글맵을 켜고 위아래로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하다 무작정 주차 안내원에게 길을 물어 겨우 매표소에 도착했다. 안도감 뒤로 묵직한 자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 아찔했던 순간은 아이들에게는 ‘여행지에서는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생한 돌발 상황의 경험을, 나에게는 아이들 한 걸음 뒤를 지키는 무게감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헤매며 찾아가는 길 위에서 어른인 나도 배운다.

하루카스 300 전망대. 사진 제공 : 김진희

지상 300m 높이에서 내려다본 오사카의 야경은 황홀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터뜨리며 사진을 찍었다. 안내데스크에서 코난 스탬프 이벤트를 찾아낸 한 아이는 신이 나서 넓은 전망대를 한 바퀴 돌았고, 선배언니의 도움을 받아 6개의 스탬프를 모두 채웠다. 스티커 선물을 손에 쥐고 내려오며 아이는 “너무 행복해! 아!!”라며 돌고래처럼 높은 소리를 질렀다.

반짝이는 야경을 보며 부풀어 오른 아이들의 마음이 대화로 피어났다.

“일본에 살고 싶어요.”

“난 며칠 여행은 좋은데, 음식이 달고 짜서 사는 건 힘들 것 같아.”

“그럼 네가 일본에 살면 우리가 놀러 오면 되잖아!”

“우와, 그거 진짜 좋은데요!”

전철역에서의 아찔했던 헤어짐도, 360도로 펼쳐진 밤풍경 앞에서는 모두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녹아내렸다. 길은 잃어도 찾을 수 있고, 헤어져도 다시 만날 수 있다. 길을 완주한 아이는 스티커를 선물로 받고, 친구와 함께 본 풍경에 반해 낯선 이국땅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품는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길은 이처럼 예상치 못한 위기와 기쁨이 교차하며 아이와 어른 모두를 성장으로 이끄는 신비로운 통로가 된다.

두번째 만남– 사람

텐류지의 스님– 정성과 정성이 만나 감응한 순간

교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 아라시야마(嵐山)의 텐류지(천룡사, 天龍寺)에는 이예 선생의 아들인 이종실 선생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본당에 들어가 학생들이 자리에 앉자. 여러 스님들이 반야심경을 읊으신 뒤 주지스님께서 이종실 선생의 위패가 이곳에 모셔진 경위를 설명해주셨다. 교토로 오던 조선통신사들이 탄 배가 대마도 앞바다에서 조난당해 돌아가신 것을 애석하게 여겨 이곳에 위패를 모시고 지금까지 정성껏 참배를 드려왔다는 이야기였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학생들도 한명씩 향을 올리며 예를 갖추었다.

스님은 멀리까지 찾아와준 것에 감사를 전하고 바쁜 걸음을 돌리려 하셨는데, 학생들이 준비한 인사가 있으니 잠시 들어달라고 스님께 부탁드렸다. 학생 대표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한명은 일본어로 다른 한명은 한국어로 “우리는 울산 두광중 학생으로 이예 선생의 고장에서 왔으며 지금까지 이예 선생의 아들인 이종실 선생을 모셔주어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는 말씀을 드렸다.

한낮의 빛이 어슴푸레 비치는 어둑하고 고요한 본당에서 아이들의 정성스러운 인사말을 들으며 스님께서는 점점 학생들과 한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에는 의례적으로 거쳐 가는 수학여행단의 형식적인 방문으로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예 선생과 이종실 선생을 향한 마음이 서로 맞닿은 순간, 본당 안을 감돌던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그리고 스님은 아이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둘러보시며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다.

“한일 양국 간에는 역사적으로 어렵고 복잡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요즘 일본에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분들이 많이 오셔서 일본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경험해 주시는 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일본과 한국이 손을 맞잡고 서로 돕는 관계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중학생인 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앞으로 한국과 일본을 잇는 든든한 우호의 다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재일한국인 작가와의 만남– 나의 꿈이었던 사육사, 그 마음으로 책을 쓰고 있다

비가 제법 내리고 있는 교토 도시샤(동지사, 同志社) 대학 윤동주 시비 앞에서 재일한국인 작가 김황 선생님을 만났다. 20분 남짓 되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눌 이야기를 미리 인쇄해 오신 자료를 보여주며 정성껏 들려주시는 말씀에 절로 귀를 기울여 듣게 되었다. 설명이나 감상을 덧붙이기보다 선생님께서 직접 준비해 오신 종이 속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본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인가요? 아저씨 꿈은 동물원 사육사였어요.
당시 사육사는 공무원, 사립의 동물원 없었다. 외국인은 공무원이 못 되어 사육사 꿈을 포기.
아버지 위독하게! 세탁소 운영하려면 「세탁기능사 자격증」 꼭 필요. 아저씨 아직 없었다. 중등 졸업이면 아무나 수능 가능.
당신은 시험 못 칩니다! 도대체 왜? 한국학교는(외국인학교), ‘보통’학교 아님. 중등 졸업을 인정 못 함.
민족학교 간 건 심한 왕따 때문. 한국인은 한국에 돌아가! 일본에서 나가라!
장관에게 편지 보내다. “당신의 억울한 마음 잘 안다. 이건 이상하다.”
다시 꿈을, 작가가 되기 위한 15년간 계획! 35살 작가 활동 시작하고 40살 때까지 책을 내고 45살 때까지 큰 상 받아 궤도 오르고 50살 때까지 세탁소 그만두고 작가 전업. 56살 겨우 작가 전업으로^^ 21년이나 걸렸다!
47살 작가 데뷔, 90종 책을 펴냄.
사육사 못 되었으나 사육사의 마음으로 책을 쓰고 있다. 꿈은 포기 안 하면 실현된다!
김황 선생님. 사진 제공 : 김진희

김황 선생님이 써오신 글은 조금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이것이 선생님의 정체성을 나타내준다는 생각이 들어 고치지 않았다. 선생님도 “나는 일본에서 민족학교를 다니며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어 잘 못해요. 일본어도 완벽하지 않아서 둘 다 어중간해요. 근데 어중간한 사람이 할 일이 또 있어요.”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경계선 위에 서있는 사람이 비탄과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통할 통(通)’과 ‘믿을 신(信)’. 통신사는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믿음을 서로 통하게 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단이었다. 이쪽과 저쪽의 길을 믿음으로 이어주는 사람, 김황 선생님은 현대의 통신사이다.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 기억의 뿌리에서 피어나는 미래

수학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区)에 있는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 견학이었다. 소박한 공간 안에는 빛바랜 옛날 사진과 자료들이 가득했다. 자료관을 운영하시는 재일동포 선생님은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나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한국인, 일본인과 그 외 다른 외국인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자료관 선생님이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잠시 설명이 멈추었을 때, 관람객인 한 할아버지가 불쑥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라며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1945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80이 넘었습니다. 부모님이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건너오셨다가 해방 후 한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어릴 때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여기 있는 사진들을 보니 그때 모습이 드문드문 생각납니다. 내가 태어난 곳에 와보고 싶었는데, 마침 한국에서 온 학생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고 감개무량합니다.”

태어난 곳 이쿠노를 찾아온 할아버지. 사진 제공 : 김진희

학생들은 큰 박수로 할아버지에게 감사를 전했다. 자료관 선생님은 나라는 존재의 시작점을 찾고자 했고 할아버지는 80년의 세월 동안 타향에 남겨둔 자신의 시작점을 그리워하셨다. 두광중 학생들은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들려주는 이와 들어주는 이가 마주한 짧은 순간, 과거와 현재와 뒤섞이고 미래가 함께 숨 쉬고 있었다. 누군가의 삶을 가만히 들어주는 아이들의 맑은 눈빛이 그들이 품어온 오랜 기억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 같았다.

이번 여정 동안 민단(재일대한민국민단) 관계자, 재일 한국인 작가, 오사카 코리아타운의 한식당 대표, 그리고 역사자료관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만난 이들이 한목소리로 강조한 것은 ‘연대, 교류, 상생’이었다. 솔직히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어쩌면 차별받는 자신들과 연대해 달라고 호소하면서도 정작 나와 생각이 다른 동포와는 담을 쌓고 지내려는 이율배반적인 주장은 아닐까?’

그러나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전해준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다. 직접적인 상처를 입은 세대에게 그 아픔이 온전히 기억되는 한 회복은 불가능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며 아픈 기억과 거리를 두게 된 지금은 달라질 수 있다. 억지로 ‘연대’나 ‘상생’을 외치지 않아도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 하고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는 순수한 마음만으로도 얼마든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두광중 아이들의 이번 수학여행 길은 이미 그 자체로 과거의 아픔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잇는 자연스러운 교류이자 상생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선생님들

이용호 가이드 선생님(텐류지 정원). 사진 제공 : 김진희

가이드 선생님은 아이들이 듣든 안 듣든 열정을 다해 역사를 설명해 주셨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들어주는 아이가 있으면 힘이 나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고 하셨다. 또 민단에서 도시샤 대학 한국인 유학생 대표를 만났을 때, 가이드 선생님은 학생들을 대신해 현실적인 질문을 던져주셨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왔나요? 아니면 졸업하고 왔나요?” 유학생 대표는 한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인생에 대한 물음이 생겨 일본에 와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학을 준비하는 길도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나중에 도전하는 길도 있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다. 가이드 선생님 자신 역시 대기업을 다니다 퇴직 후 프리랜서 가이드가 된 분이었다. 주재원 시절 손님들을 안내하려고 공부했던 지식이 지금의 삶으로 이어진 셈이라고 하셨다. 수학여행을 마치며 헤어질 때, “이번 수학여행을 통해 국경을 넘어 여행을 다니는 경험을 했고 국경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니 꿈을 크게 가지고 계획을 세우고 꾸준히 실행하는 학생이 되길 바란다.”는 당부를 남기셨다. 며칠 동안 함께하며 정이 듬뿍 든 아이들은 아쉬운 마음에 선생님의 연락처를 물었다.

늘 뒤에서 지켜주는 선생님과 옆에 있는 친구들

나는 안전요원으로 동행했지만 학교에서 늘 아이들과 함께 해 온 선생님들의 보살핌은 남달랐다. 선생님들은 농담으로 아이들의 여행길 긴장감을 풀어주셨고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지 끊임없이 눈길과 질문으로 살피셨다. ‘누가 열이 조금 난다’, ‘누가 많이 걸어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누가 오늘은 컨디션이 좋다’며. 선생님들끼리 수시로 아이들의 상태를 공유하셨다. 아이들도 선생님들이 애쓰시는 걸 알기에 여행 내내 조심하고 절제하는 대견함을 보여주었다.

출국 전 단체사진. 사진 제공 : 김진희

잠깐의 자유시간이 주어질 때면,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한 명씩 다니지 말고 두 명 이상 같이 다니자.”하시며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가이드라인을 말씀해 주셨다.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야, 같이 가자.”고 친구를 부르며 챙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 오는 날 버스에서 내리며 의자에 남겨진 친구의 우산을 가져다주는 모습까지. 뒤에서 묵묵히 지켜주는 어른들과 옆에서 손을 잡는 친구들이 있기에 이 여정은 더욱 단단하고 따뜻해지고 있었다.

세번째 만남– 나

취향과 감각의 발견

일상을 떠나온 여행길에서는 순간의 선택이 내 취향을 일깨워준다. 모둠별 자율 프로젝트 날, 와카야마(和歌山)로 향한 여섯 명의 아이들 중 세 명은 프랑스 마을 구경을, 세 명은 온천체험을 계획했다. 온천으로 가는 길에 놀이기구가 보여 사실은 포르투갈 마을인 그곳이 유원지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예고 없이 찾아온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고 그중 온천체험을 꼭 하고 싶어 했던 한 아이는 유원지에서 일찍 나와 본래 목표였던 온천체험까지 야무지게 했다.

쿠로시오시장(온천 사진이 없다). 사진 제공 : 김진희

우리가 찾아간 곳 ‘쿠로시오(黒潮) 온천’이었다.

“쿠로시오! 우리 배타고 올 때 현해탄이랑 쿠로시오 해류 얘기했잖아. 그 쿠로시오야.”

“네? 정말이네요!”

바다 위에서 무심코 나누었던 단어를 먼 이국의 온천 이름에서 다시 마주친 신기한 우연. 와카야마의 바다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온천을 즐긴 뒤, 우리는 입간판에서 봐둔 감귤소프트아이스크림까지 챙겨 먹었다.

“진짜 맛있어요. 인공적인 맛이 하나도 안 느껴져요!”라고 감탄하는 아이의 눈빛에서 여행이 주는 감각의 기쁨이 피어났다.

사실 이 아이는 출발 전날 나에게 와서 “내일 기차타고 갈 때 일본어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라고 물었다. 며칠간 현지 사람들과 부딪히며 언어에 대한 감각과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긴 모양이었다. “아침에 커피를 마셔야 머리가 돌아가는데…”라며 은근슬쩍 조건을 붙였더니, 아이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커피 사드릴게요. 가르쳐주세요.”라고 기분 좋게 받아들이며 거래(?)가 성사되었다.

와카야마역 카페에서 아이가 방금 배운 따끈따끈한 일본어로 주문한 따끈따끈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여행하는 틈틈이 지명 읽는 법, 한자의 음독과 훈독, 장음의 리듬 같은 일본어의 감각들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아이가 사준 커피 덕분에 길 위에서 언어를 배우고 취향을 넓혀가는 생생한 순간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언어로 피어난 취향들

“오늘 뭐 했어?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 뭐 한 게 기억에 남아?”

여행기간 동안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들이다. 그 질문에 돌아온 아이들의 답은 저마다의 색깔과 취향으로 알록달록하게 빛났다.(물론 아이들은 높임말을 썼다)

“난 절에 오면 너무 좋아. 향 냄새도 좋고 분위기도 좋아.”

“애니메이션 굿즈를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걸 사고 싶어.”

야경 보러갈 사람 모이기. “오! 좋은데요.”, “난 안 가고 방에서 맛있는 거 먹으며 놀래.”

“낮에 많이 걸었으니까 가까워도 전철 타고 갈래.”

“스탬프 이벤트 하고 싶어.”

“모스버거에 왔지만 감자튀김에 콜라만 먹어도 좋아.”

“천수각 안에는 안 들어갈래. 바다 가려면 모스버거 빨리 가야돼.”

“친구들이랑 여행 왔는데 밤 10시 이후 방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건 솔직히 불만이야.”

누구는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신이 났고, 누구는 그저 해변을 가만히 걷는 것으로 충분했다. 누군가에게는 유원지의 스릴이, 누군가에게는 낯선 지명에서 찾아낸 한자 한두 글자가 여행의 기쁨이었다. 정해진 정답이나 틀에 맞추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속도로 걷고 싶은지 스스로 발견해 가는 과정. 아이들은 그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의 감각과 취향을 또렷이 다듬어 가며 여행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질문과 호기심의 발견

요즘 아이들은 질문이 드물다. 때로는 질문을 만들어 보라고 억지로 떠밀어야 할 정도다. 그렇지만 스스로 움직이고 온몸으로 체감하는 여행길 위에서는 무심했던 아이들의 입에서도 진지한 질문이 불쑥 튀어나온다. 여정 동안 아이들이 세상에 던진 질문을 모아본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따로 적지 않으려 한다. 아이들이 어떤 맥락과 풍경 속에서 이 의문을 품었을지 짚어보며, 독자 여러분 역시 ‘나라면 어떤 답을 주었을까’ 함께 고민해 보기를 권한다.

– 임진왜란이 끝났으면 전쟁이 끝난 거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조선통신사를 일본으로 불렀을까요?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리한테 좋은 편이었어요?

– 민단은 재정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나요?

– 재일한국인으로 일본에 살면서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으신가요?

– 일본으로 유학을 오고 싶은데 어떤 과정과 준비가 필요한가요?

– 자연을 소재로 글을 많이 쓰셨는데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 그림 작가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요?

역사적 사건의 이면을 묻는 날카로운 시선부터 현지 삶의 실상을 살피는 질문, 자신의 미래와 예술을 향한 진지한 물음까지. 아이들은 여행지라는 넓은 세상과 부딪치며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내는 진짜 주체로 자라나고 있었다.

여행 짐을 싸며 알게 된 것– 스스로 가벼워지는 지혜와 서로를 보살피는 마음

여정의 마지막 밤 아이들이 짐 정리하는 것을 선생님들과 분담하여 도왔다. 푸딩, 젤리, 화장품 같은 액체류를 기내 가방에 넣었다가 공항에서 빼앗기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내가 맡은 두 아이의 캐리어를 보니 짐을 싸는 것이 서툴러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얽혀 있었다. 한 아이는 캐리어에 자리가 없다며 두꺼운 점퍼를 매고 다니는 배낭에 넣어 제법 무거워 보였다. 이대로는 내일 어떻게 다닐지 걱정부터 되었다.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차곡차곡 짐을 다시 정리했다. 옷을 돌돌 말아 부피를 줄이고 두꺼운 점퍼는 팔을 접고 가로로 한번만 접어 캐리어에 넓게 펼쳐 넣으니 짐이 가득한 캐리어도 깔끔하게 닫혔다.

마침내 아이의 배낭에는 소중한 피규어 상자만 남아 가벼워졌다. 부서지면 안 되기에 항상 품고 다니고 싶다고 말한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겠다고 생각했다. 무거운 짐은 지혜롭게 줄여 스스로를 가볍게 만들고, 진짜 아끼는 소중한 가치 하나를 고이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이와 짐을 싸며 배운 삶의 기본이다.

또 다른 아이의 캐리어를 열었을 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매시 파우치마다 종류별로 이름표가 붙어 있어 부모님의 세심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데 짐을 살피다 뜻밖의 발견을 했다. 우의가 왜 두 벌이나 들어있냐는 물음에 아이는 무심하게 답했다. “비가 많이 오면 우산으로 부족하니까요. 비 맞는 친구 주려고 하나 더 가져왔어요.” 상당히 많은 여분의 마스크와 종류별로 챙겨온 상비약의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감기 걸린 친구, 상처 난 친구를 위해 아이가 챙겨온 마음들이었다. 여행지에서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아이의 깊은 속내가 닫혀 있던 캐리어가 열리며 드러났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챙기는 이토록 다정한 마음은 어디에서 샘솟아 나온 것일까?

작은 가방 안에 자신만의 추억을 채워 가는 아이, 타인을 향한 온기를 담아온 아이. 마지막 밤, 아이들이 싸고 있던 짐 속에서 본 것은 단순한 옷가지가 아니라 스스로 가벼워지는 지혜와 서로를 보살피는 마음 그 자체였다.

에필로그

작은 학교가 증명한 교육의 미래

4박 5일 동안 길 위에서 일어난 수많은 만남은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할 정도다. 학생 22명과 어른 8명, 총 30개의 여행이 겹겹이 얽히며 서로의 여정에서 배경이 되었다. 어쩌면 사람이 배경이 되고 길 자체가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아득한 길 위에서 만난 짧은 여정 동안 아이들은 나를 발견하고 감각을 확장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갔다. 타인을 이해하는 넓어진 마음으로 세상을 품어 안을 때, 결국 그 넓어진 마음의 주인인 나 자신을 온전히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한명 한명의 취향이 존중받는 여행, 정성어린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생생한 배움, 캐리어 속 짐을 함께 정돈하며 삶의 무게를 비워내는 법을 나누는 온기, 서로 다른 존재들이 정성을 다했던 모든 순간이 바로 옛 통신사들이 바다를 건너 전하고자 했던 ‘통신(通信, 마음과 믿음을 잇는 소통)’의 진정한 완성이었다. 우리는 통신사의 길을 따라가며 통신사를 만나고 통신사가 되었다. 이것은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작은 학교만의 유일무이한 가치다.

속도와 효율을 중요시하는 AI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다. 몸으로 느끼는 실물적 감각, 곁에 있는 타인을 향한 따뜻한 연대, 스스로 질문하고 길을 찾는 힘이다. 이런 능력은 차가운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생겨난다. 이번 수학여행은 작은 학교가 결코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 모색해야 할 아름다운 배움의 미래이자 본질임을 길 위에서 확인한 여정이었다.


추신1. 마을활동가가 수학여행의 여정을 함께 하는 새로운 시도를 기꺼이 열어준 두광중학교 교육공동체와 교장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아이들의 안전하고 유익한 배움을 위해 섬세하게 기획하고 진행을 도와준 히스토리디 여행사의 이신철 이사님과 현지에서 애써주신 버스 운전기사님께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오롯이 배움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추신2. 티머시 모튼, 생태적 사유, 생태철학은 내버려두고 두 번 연속 ‘생태적 글쓰기’를 쓰게 되었다. 어쩐지 모튼 선생님도 “이제 쓰는 게 좀 재미있어졌어? 어때? 매시(mesh) 속에서 노니는 기분이 제법 괜찮지!”라고 할 것 같다.

김진희

만화리 비조마을에 살며 만가지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마을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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