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됨의 연장선을 따라가다 – 『말, 살, 흙』을 읽고

윤석, 솔빈, 호찬은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 한 팀으로 만났다. 〈몸의 사회학〉 수업에서 신유물론, 횡단신체성, 생태/비인간을 주제로 글을 쓰고 모두와 함께 읽었다. 셋의 글은 노마의 “앓음-앎-아름다움”, 솔빈의 “반드시 주위를 둘러본다”, 호찬의 “마땅한 죽음은 존재하는가?”로 이어진다. 스테이시 앨러이모의 『말, 살, 흙』을 마중물 삼아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풀어낸 결과물을 이곳에서도 나눈다.

1. [말 : 신유물론] “앓음-앎-아름다움” – 노마

① 앓음

모든 것의 시작은 어떤 아픔인 것 같다. 앓고 나서야 알게 된다. 혹은 앓지 않으려고 알게 된다. 그렇다면 앓고 알고 난 다음은 무엇일까. 학교에 다시 돌아온 내내 몸과 마음을 휘감았던 물음이다.

스테이시 앨러이모 저 『말, 살, 흙 -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그린비, 2018)
스테이시 앨러이모 저 『말, 살, 흙 –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그린비, 2018)

시작은 언제나 비극이었다. 알다시피 우리가 사는 사회는 너무 아팠다. 그 속에서 저마다의 시작이 있을 것이다. 엄마도, 세월호도, 지옥 같던 학벌사회도, 매일 죽는 노동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 많은 장면들이 스쳐가지만 나는 기후가 가장 아팠다. 시작은 어릴 적 한 해를 살아 고향 같이 느껴지던 인도의 동북부 지역이 중위도 지역의 극단적 기후 리스크로 인해 수몰된 장면이었다.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세계가 붕괴하고 있었다. 그 과정 속에 나도 너도 우리도 있다는 이 실재하는 이야기는 내가 알던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사회과학은 기후위기를 예측하지도 해석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했다. 무책임하고 무능하다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그 길로 학교를 떠났다. 사회가 자연 속에 묻어 들어가 있다는 명료한 사실을 부정하고서,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존재(예컨대 비인간-동물, 사물, 말할 수 없는 것)를 인정하지 않고서 이론을 제작해 유포한 것은 범죄에 가깝다 생각한다. 단언컨대 주류로 불렸던 신-고전파 경제학은 죄목이 뚜렷하고, -재해석할 여지가 있음에도- 근대적 이분법을 전제한 고전 사회학과, 언어적 유희와 도단에 빠졌던 포스트모더니즘 바탕의 현대 사회학도 이런 문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사회과학이 실제로 실존하는 죽음에 무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과학부 안에 있는 이 죽음의 전통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한국의 드높은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이 가장 높은- 자살률이라는 거시적 배경과, 개인의 심리와 환경이라는 미시적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생명을 떠나보낸다. 이것은 공교육의 문법에 반하여 나온 대안학교나, 넓은 의미의 시민사회가 갖는 공통적인 현상이고, 여성학과와 같이 다른 대학의 사회 관련 학부에서도 자주 보이는 일이다. 이 모든 접점이 교차한 우리 대학에서 특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건 죽음의 맥락과 문화가 그 사회를 드러낸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드러내는 우리 사회의 모양은 무엇일까.

사회과학은 마치 메스와 같이 예리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은 우리가 처한 사회의 ‘보이지 않는’ 착취 및 억압적 구조에 대해서 예리한 눈으로 살피게 한다. 그러나 그 다음은? 흔히들 사회과학을 영화 《아가씨》에 나오던 대사와 같이,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로 비유한다. 천마야차가 날뛰는 사회에서 수많은 비극을 마주하고 망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사회과학은 사회를 망가뜨리는 착취의 역사와 폭력의 순환고리를 드러내지만, 저 멀리 있는 ‘이상사회’ 말고 내가 너와 우리와 잘 살아가는 삶의 모양새에는 왜 그토록 무력한가. 세상을 부수고 해부하는데 왜 살리지는 못하는가. 살리는 사회과학에 대한 갈망에 한이 맺혔다.

(활동적)실천과 (영적)지혜가 결여된 -혹은 배제한- 사회과학 따위에 더 줄 애정은 없다는 심산과 여타 죽음이 어려워서 떠난 3년의 시간 동안 기후활동가로 살았다. 죽음을 막으려는 운동들 속에서 몸을 접했다. 몇 달에 한 번씩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확인하는데 이 숫자 속에 몸이, 표정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기후위기의 이야기는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은 어떤 얼굴들의 이야기다. 나는 베트남에 지어지는 석탄발전소 붕앙-2를 사업이 아니라 생태학살(Ecocide)이라 정명하며 이를 막기 위한 활동에 전력해왔다.1 시작은 한 경제지가 쓴 말이었다. “정치권 일각과 환경단체 등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한전이 계획대로 투자를 결정하면서 국내 석탄화력발전 업계도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한숨을 돌리는 이들 사이로, 이 결정으로 인해 누구는 숨이 가빠 올 것이고 누구는 목숨이 끊어질 것이다. 석탄발전소가 지어지는 마을에는 사람이 산다. 그곳의 사람들은 석탄발전소 옆의 삶은 지옥이라고 말하고, 8개월 산 아이가 숨이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내 숨도 덩달아 편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친구 하나는 단식을 선언했다.

작년 5월, P4G(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 서울 정상회의가 열리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서 “우리를 죽이지 않는 석탄은 없다”는 슬로건을 걸고 국내외 석탄발전소를 막기 위한 기후단식 농성을 펼쳤다. 사람의 몸이 날이 갈수록 비쩍비쩍 마르고 죽음을 향해 하루씩 걸어가는 장면들을 옆에서 보고 돌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석탄발전소로 숨이 끊어진 주민, 그것을 막으려고 곡기를 끊은 활동가, 그 곁에서 번-아웃되는 곁들, 죽어가는 이 과정을 지나오면서 다시 묻게 되었다. 기후와 마음, 그 마음 사이에 있는 몸은 어떤 존재인가. 비극 곁에서 실제로 생명을 소진하는 내 몸, 그 활동가의 몸은 무엇인가. 왜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죽여야 하는가.

② 앎

이미 사회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학문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해두어야 할 것 같다. 퀴어생태학, 젠더인류학 등 신학문의 출현과 더불어 -사회과학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생태학(Ecology), 여성학, 평화학의 다학제적, 탈-근대적 문제의식은 분명 다르다.2 스테이시 엘러이모의 『말, 살, 흙』은 이러한 담론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원제는 “Bodily Natures: Science, Environment, and the Material Self”로 ‘몸된 자연’이 직역이지만 역자는 ‘말, 살, 흙’으로의 번역을 통해 인간의 말 또는 문화가 우리의 몸,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자연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는지를 말하고자 했다. 책의 앞머리에 쓰여진 “이 책을 지구촌 곳곳의 환경운동가들에게 바친다.”는 문장은 저자의 감각을 드러내는 한 지점이다.

몸에 대한 고전 사회과학의 이론들은 유효한 면이 있음에도 지금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어 보인다. 수업을 들으면서 여러 질문이 일었다. 몸은 사회적으로만 구성되는가? 자연/자연주의는 (우생학적으로) 억압적 존재이기만 한가. 무엇보다 담론의 이분법적 지형 -자연주의 VS 사회구성주의- 을 넘어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몸을 배제했던 협소한 이분법의 철학 기조에 대해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사실’을 지적한 사회구성주의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물질성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물질이며 이 사실을 간과한 채 몸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앨러이모는 페미니즘 이론이 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지나치게 강조하여 성의 자연적·물질적 면을 무시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페미니즘 이론은 신체성과 무심성, 수동성으로 비하된 자연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했다. 인간의 특정 그룹과 비인간 생명체에게 모욕과 침묵을 강요하기 위해 조성되어 왔던 자연/문화, 몸/마음, 대상/주체, 자원/행위능력 등의 젠더화된 이원론을 타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중략) 페미니즘은 오히려 물질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생물학적 결정론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앨러이모, 2018 : 26p)” 페미니즘의 이 문제의식에서 신유물론의 한 흐름이 시작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앨러이모는 신유물론적 페미니즘의 대표적 학자 중 하나로 평해진다.

2000년대 초부터 서구의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 걸쳐 출현한, 이러한 학문적 경향성을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이라고 불린다. 신유물론이 근대적 이원론에 기초를 둔 기존의 사회과학 전통에 제기하는 근본적 도전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관계적 물질성(relational materiality): 물질세계와 그 내용은 고정되거나 안정된 실체가 아니며, 관계적이고 불균등하며 항상 유동적이다. 둘째, 일원론적 존재론(monistic ontology) : ‘자연’과 ‘문화’는 서로 분리된 영역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고 물질성이 지닌 한 연속선상의 부분으로 취급해야 한다. 셋째, 비인간 행위성(nonhuman agency): ‘행위성(agency)’의 능력, 즉 사회 세계를 생산하는 행위들은 인간 행위자를 넘어서 비인간과 무생물에까지 확장된다(김환석, 2018).3

신유물론은 어렵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까닭에 ’번역’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4 나에게 신유물론은 도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 서문에 등장하는 “죽어가는 지구에 대한 사랑과 분노로 쓴다”는 말로 축약된다. 죽어가는 지구에 사랑과 분노가 공존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누가 신유물론을 요청하고 발화하고 해석하는지 맥락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몇몇 동물권, 기후 활동가들에게 도나 해러웨이의 책은, 과장하면 성경과 같은 사랑을 받는 것 같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기후우울5 등 여러 이유로 약을 달고 산다는 점을 감안하면, 죽어가는 지구에 사랑과 분노가 공존한다는 말은 의미가 남다르지 않을까.

“우리는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 사는 오염된 존재들이다.” 사진출처 : Engin_Akyurt
“우리는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 사는 오염된 존재들이다.” 사진출처 : Engin_Akyurt

기후·생태위기를 알게 되면 대개 반응이 두 가지다. 멸종을 앞둔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집단적으로 무시하거나, 그 사실을 존재론적 불안으로 받아들여 기후우울에 기반한 허무주의로 쉽게 이어지는 경우다. 우리의 기존 세계관 혹은 멘탈리티는 ‘죽어가는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역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신유물론은 이 역설을 수용하는 것 같다. 해러웨이는 기후생태 위기에 대해서 근거 없는 기술만능주의 낙관론자와 희망이 없다는 허무주의자 양자를 -후자에는 공감을 표하지만- 비판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트러블들의 정도와 심각성을 인정하는 것과, 추상적인 미래주의와 그 숭고한 절망의 정서와 무관심의 정치학에 굴복하는 것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다(해러웨이, 2021: 16p).” “기후위기를 막아내자”가 아니라 같이 살자는, 트러블과 함께하자는 제안이다.

“우리는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 사는 오염된 존재들이다.”라는 해러웨이의 역설적인 말은 신유물론과 돌봄을 잇는 실뜨기로 이어진다. 우리는 ‘건강’하지 않고 ‘이상적일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면에서 “친척을 만들자는 해러웨이의 제안은 사라져 가는 종들에 대한 적극적인 돌봄을 요청하는 제안이다. 친척이 된다는 것은 반드시 문제가 되는 관계 속으로 진입하는 일, 다시 말해 트러블과 함께하는 일이다(정연보, 2022).” 에코페미니즘에 기반해 돌봄(Care) 운동을 하는 이들이 ‘건강권’을 넘어 잘 아프고 잘 상처받고 동시에 잘 치유될 ‘질병권’을 이야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회적 경제의 뿌리를 이루는 시민 경제학을 말하는 이들이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의 원리로 경제를 재조직하자”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처와 갈등을 다시 사유하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상처는 안 받는 것이, 갈등은 없는 것이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이것은 공기와 물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데 상처받지 않을 수가 있는가? 세 명 이상이 모인 공동체에서 갈등이 없을 수가 있을까. 우리는 이 역설의 시대에 갈등과 상처가, 사랑과 분노가 공존한다는 것을 함께 받아들이고 싶다.

③ 아름다움

수업을 들으면서 잊어 두었던 여러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안 아팠다면 거짓말이지만 마주하는 것은 치유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한다. 조모임 과정에서 우리는 실제로 비극을 여러 번 마주했다. 왜 우리는 도중에 이토록 많은 죽음을 마주해야 했을까. 앞으로도 평생을 가져갈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아플 때 나는 한국철학자 함석헌의 “앎은 앓음”이라는 말, 생태여성신학자 현경의 “앎음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생각하곤 한다. 앓음-앎-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비극을 통해 전환을 일구는 살림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유효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2. [살: 횡단신체성] “반드시 주위를 둘러본다” – 솔빈

주위를 둘러본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몸과 얼굴을 기억한다. 광활한 바다로 걸어간다. 뭍에서 뜯어온 쑥을 바위에 문지른다. 녹색 빛의 자연즙을 물안경에 바른다. 그것은 곧 나의 새로운 눈이 될 것이다. 허릿춤에 연철6을 찬다. 그것은 곧 나의 새로운 중력이 될 것이다. 어깨엔 테왁7을 두른다. 그것은 곧 나의 새로운 위장 주머니이자 산소 주머니가 될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숨을 깊이 고른다. 결심이 서는 순간. 나를 내던진다. 합-. 공기를 머금는다. 온몸을 말아 잠영한 뒤 바다를 누빈다. 여기 바닷님이 내어주신 일용할 양식이 보인다. 호맹이8를 쳐들고 경작한다. 저기 커다란 전복이 보이지만 숨이 멎을 듯 배가 헐떡이는 순간, 욕심을 버리고 빠르게 위로 헤엄친다. 고개를 내밀어 테왁에 기대곤 휘-. 휘-.9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해녀가 물질10하는 행위는 이승에서 ‘죽어-가고’, 저승에서 ‘살아-나는’ 삶의 연장선이자 죽음의 시작점이다.

해녀의 삶을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난 후, 시시때때로 고민에 잠겼다. 그들의 몸은 분명 단순히 ‘몸’이지만은 않았다. 처음엔 사회구성주의적인 관점에서부터 시작했다. 강한 여성이라 호명되는 대상화, 가부장적인 사회와 젠더적 억압, 노동자, 계급, 자본주의 등 해녀의 몸을 사회의 객체로 정의하고 분석하였다. 덕분에 해녀를 둘러싼 구조적인 불평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한 관점은 일정 부분 깨달음의 희열을 주었지만, 어느 한 켠의 찝찝함을 남겨두었다.

순수하고 안전한 몸, 외부와 경계 짓는 정체된 몸은 사실상 허구이다. 
사진출처 : Alexander Krivitskiy
순수하고 안전한 몸, 외부와 경계 짓는 정체된 몸은 사실상 허구이다.
사진출처 : Alexander Krivitskiy

기후변화와 인류세 혹은 자본세, 쑬루세 시대를 맞이한 우리는 근대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위기에 처한 현실을 반추하게 된다. 사회과학은 이분법을 토대로 자연을 인간사회로부터 분리시켜 왔으며 ‘사회’란 자연과 동떨어져 있다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그 자체로 위험을 증대시키는 협소한 관점이다. 사회인문학은 더 이상 자연과 물질성을 외면해선 안 된다. 물질적 전환(material turn),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을 맞이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인’ 것을 ‘사회물질적인’ 것으로 재사유해야 한다. 신유물론은 자연계(비인간 세계)와 인간계(인간만의 세계)가 각각 상이한 세계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지구 아래 인간과 비인간은 언제나 함께 결합된 형태로 공통된 공동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 세계는 사회-물질적이며, 그 생명의 몸들은 횡단-신체적이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환경에 묶여 있는 주체”를 설명한다. 그녀에게 인간 유기체란 다양한 자원, 힘들에 접속되어 있는 사이-존재(in-between)이다. 인간은 영토적 기반을 토대로 환경에 묶여 있다. 물질/정신, 자연/문화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세계 속 결합물이다. 자연·사회·인간 혹은 기술적 환경은 인간 삶에 먹이를 공급하고 우리는 양분 받은 먹이를 통합, 변형시켜 물질대사한다. 횡단-신체성은 몸이 비인간 자연들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히고, 몸의 물질성을 드러내 신체를 관통하는 문화, 환경, 담론의 실재성을 조명한다. 순수하고 안전한 몸, 외부와 경계 짓는 정체된 몸은 사실상 허구이다. 몸은 언제나 물질과 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해녀는 그야말로 횡단-신체적이다. 찝찝함이 남아있었던 이유는 바로 다음을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질하기 위해 착용하는 물안경, 연철, 테왁 등의 기술적 도구는 자연에 다가서기 위한 몸의 확장이다.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숭고한 마음가짐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임을 해체하고 인간의 것으로써 자연이 아닌 자연의 것으로써 인간이 되기 위한 연습이다. 혹은 나의 몸인 자연, 자연의 몸인 나에 대한 이해이다. 비인간 자연들과 연결되는 경험을 직접 몸에 각인하며 여러 환경을 삼키고 내뱉는 상호작용을 통해 공생적 얽힘에 들어선다. 그 감각은 해러웨이가 말한 촉수적 연결과 비슷하다. ‘혼자선 살아갈 수 없다’는 흔한 말처럼 모든 것은 홀로 떨어져 살아가지 않는다. 스스로 고립되어서는 자신조차 만들 수 없기에 얽히고 설켜 있는 역동적인 상황과 공간, 관계 속에서 변화하며 그물망을 그려나가야 한다. 지구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아주 깊은 의미에서 나란한 친족이다. 우리는 연대를 사유해야 한다. 이러한 연결성을 지니기 위해 해러웨이는 “촉수적 감각”를 제안한다.

눈은 대상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반면, 촉수는 “더듬고, 시도하여” 낯선 대상과 직접 연결되는 기관이다. 《아바타》의 장면을 떠올리니 단번에 이해되었다. 나비족은 머리카락 같은 모양을 한 흔들거리는(살아있는) 촉수를 통해 – 비인간 생명을 포함한 – 여러 물질들과 접촉하고 정동한다. 촉수로 전달되는 느낌은 이질적이고 심지어 끔찍하지만 이내 따뜻하고 부드러워진다. 내가 이해하기론 촉수적 감각은 그리 유쾌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불쾌하고 낯설고 고통스러운 감각이다. 그러나 그 불쾌함과 고통을 “시도하여” 감내하는 것, 끝내는 연결되어 서로를 마주쳐야 하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보여지지 않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접촉하지 않고 만질 수는 없다(정연보, 2022.) 해러웨이는 “어느 누구도 모든 곳에 살지는 못한다. 누구나 어딘가에 산다. 어떤 것도 모든 것에 연결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무언가와 연결된다”고 말한다(해러웨이, 2018). 누구나 어딘가에 연결되지만,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들이 맺고 끊어지는지를 살펴보아야 함이 밝혀진다. 따라서 접촉으로서의 지식은 참여하는 지식의 문제(정연보, 2022)이며 촉수적 연결은 다양한 인간종, 비인간 생명 등과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실마리이다.

해녀는 이미 촉수적 연결을 느끼며 연대의 실마리를 푼다. 환경파괴로 인해 바다의 온도가 상승하면 수중생태계도 망가진다. 특히 산호초와 같이 탄산칼슘을 뿜어내는 해양생물들이 해양 산성화에 따라 생존을 위협받으면, 바닷 세상의 생명 다양성을 보존할 수 있는 조건들이 위태해져 해양 생태계가 망가져 버린다. 게다가 이미 해수면의 온도는 달아올랐고 해양 산성화, 조류와 풍향의 변화로 바다의 물리적, 생물학적 조성이 정상치를 크게 벗어나고 있다(조효제, 2022). 이러한 가운데 몸이 곧 바다이자 바다가 곧 몸인 해녀들의 생존 또한 불안해진다. 바닷님이 내어주시는 양식이 인간 활동(혹은 기업 활동)에 의해 없어지는 사건은 그녀들의 생계에 대한 위협이다. 환경파괴는 심지어 그녀들의 몸을 위협하는 폭력이자 위험이나 다름없다. 촉수적 연대는 인종이나 민족, 계급 등 다양한 사회 정체성을 넘어 연대하려 한 페미니즘 운동 세계관의 창의적인 계승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간여성들만 자매가 되는 것은 아니다(해러웨이, 2018). 해녀들이 바닷 세상을 지켜내려 산호초를 보호하는 움직임에 함께 하거나 해양 쓰레기를 줍는 이유는 자연, 비인간 생명들과 이미 정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닷 속에서 물질하여 노동하는 자신의 ‘몸’을 여러 담론과 물질이 넘나드는 공간으로 이미 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녀의 이야기를 신유물론과 횡단-신체성에 통과시켜 지금, 여기 새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해녀학교를 졸업하던 날, 나의 스승이자 단짝이었던 옥렬 삼춘께선 병원, 식당 등 곳곳에서 보석처럼 소중히 모아온 여러 종류의 사탕을 실로 한땀 한땀 엮어 목에 걸어주셨다. 그러면서 딱 한마디 하셨다. “막내야, 행복하여라.” 그 한마디는 커다란 위로가 되었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온기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과격하고 빠르게 파괴된 세상 속에서 해녀들의 삶을 지켜내, 낡아서 아름다운 옥렬 삼춘의 삶 또한 행복하게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나의 ‘젊음’에 쓰여진 막대한 책임이다. 이는 윤석이 말한 사람을 살리는 학문에 대한 갈증과도 연결된다.

학교에 돌아와 어떤 사회학을 배우던 해녀의 삶과 연결지어 보거나, 종종 해녀에 관한 연구들을 쫓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학문이 바라보는 대상화된 해녀의 삶과 실제 해녀들의 삶은 괴리가 컸다. 삶 자체가 아닌 언어로 재탄생하여 정의되는 과정에서 설명되지 않아 삭제되는 어떤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호한 어떤 것은 물질적이고 실재적이기에 명확히 살아있지만, 그 물질성을 – 살아있음을 – 부정당하고 있었다. 그러한 흐릿함을 부정하지 않고 분석할 수 있게 해준 개념이 바로 신유물론과 횡단-신체성이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흐리고 삶과 몸의 물질성을 학문과 언어의 세계로 끌어들여 설명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해소되지 않았던 나의 의문을 씻어내려 주었다.

비가 쏟아지던 그 날도 바다로 들어갔다. 물질을 연습해야 했지만 농땡이를 피우고 싶었다. 바다 밑으로 최대한 가라앉았을 때, 몸을 뒤집어 뉘었다. 빗방울이 바다에 맞닿는 순간의 단면이 보였다. 대개 빗방울을 앞에서 보거나 위에서 내려다보지 밑에서 올려다보진 않는다. 돌고 돌다 지구의 중심으로 떨어진 비가 바다와 하나 되는 장면을 마치 칭송하는 듯한 자세로 올려다보았을 때, 엄청난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동시에 충격받았다. 그 이유는 하찮은 내가 자연의 위대함 앞에 무릎 꿇어서가 아니라 자연이 순환하는 과정에 내가 연결되어 있고, 나의 몸이 그 자체로 자연임에 전율이 흘렀기 때문이다. 해녀 삼춘들에겐 내가 전율을 느꼈던 그 감각이 그닥 시적이지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체화된, 말하자면 일상일 뿐이다. 그러한 그들의 삶과 몸이 시사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론적 전환을 맞이할 수 있고 이미 자연, 생태와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해녀는 반드시 주위를 둘러본다. 예측 불가능한 바닷속에서 자신을 살펴줄 친구들을 살펴본다. 바닷속 길을 살펴본다. 몸 됨의 연장선이 될 무수한 생명들을 살펴본다. 그곳에서 그들은 공생하여야만 살아진다.

3. [흙: 생태/비인간] “마땅한 죽음은 존재하는가?” – 호찬

해러웨이는 ‘인간예외주의’와 ‘공리주의적 개체주의’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을 상상한다(해러웨이, 2021: 57, 102). 그 상상이 이루어지면 인간의 행위가 이전과는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듯하다. 그렇게 달라진 행위는 기후위기를 외면하지 않을까? 생태계의 균형을 중시할까? 그러나 그가 기대하는 행위(와 결과)가 무엇인지는 지금 여기에서 딱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다. 우리는 몇몇 이론과 개념을 배우고 있다.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활용하고자 한다면 인식, 태도, 지향, 실천은 달라진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달라질지가 궁금하다.

천문학을 접하면 사람이 겸손해진다고들 한다. 우주에서 지구와 인간은 그저 먼지에 불과하다면서 말이다. 생물학 지식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떤 동물은 상실감을 느낀다더라, 어떤 식물은 뿌리를 통해 주변에 위험을 알린다더라, 세포는 공존의 역사더라… 이 지식들을 기반으로 하는 이론과 개념은 어떠한가? 신유물론, 횡단-신체성, 촉수적 사고와 실뜨기, 공동생성을 접한 당신의 마음, 생각, 지향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이론들은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는 인식론을 이야기하면서도 태도와 윤리를 말하고 있다. 비인간, 연결, 행위성 등을 강조하면서 이미 무엇이 마땅하고 무엇이 좋거나 좋지 않은가에 대해 어느 정도는 방향을 잡고 있다. 인간에게 특정한 사유를 요구한다. 벌레들은 촉수적으로 살면서 실뜨기를 ‘잘’하고 있으니(해러웨이, 2021: 65) 인간도 잘 좀 하자고 말한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 가능한 한 ‘잘’ 살 수 있게 돌보자고 말한다(정연보, 2022: 93). 정해진 답은 없고 모든 것이 관계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잘’과 ‘마땅함’에 대해서도 주장한다.

“북미 지역의 소나무와 소나무딱정벌레는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공격하면서도 공존해왔다. 딱정벌레는 … 나무를 고사시키고, 소나무는 … 벌레를 익사시키거나 산불로 태워 죽이면서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어”왔다(해러웨이, 2021: 82). 여기서 말하는 생태계의 균형은 소나무와 딱정벌레가 서로를 지속적으로 죽일 수 있는, 그저 사실이 아니라 마땅히 유지되어야 할 상태일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딱정벌레의 개체수가 늘어나면 소나무들은 ‘균형 상태의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을 맞이하고, 이들과 연관된 다른 존재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생태계의 균형을 바람직하게 여긴다면 그 균형을 깨는 지구온난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바람직하지 못한) 지구온난화로 인한 개체들의 죽음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이 물질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고 싶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진 출처 : furkan_art
인간이 물질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고 싶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진 출처 : furkan_art

소나무 고사 이후 종 다양성이 감소한 채로 새로운 상태가 만들어질 수도 있고, 인간이 불을 질러 이 사태를 막을 수도 있다. ‘소나무 고사 이후의 종 다양성을 갖는 생태계’와 ‘소나무 고사를 막은 이후의 종 다양성을 갖는 생태계’ 중 더 좋은 것은 무엇인가? 물론 좋고 좋지 않음을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 시작은 좋거나 좋지 않음일 것이다. “비-인간과의 네트워크에 겸손하게 참여”하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정연보, 2022: 98). 그러한 참여는 좋은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우리는 단순히 사실에 부합한 존재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실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실뜨기를 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아는 것을 넘어서 어떤 실뜨기를 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인간예외주의를 벗어난) 위계가 없는 평평한 존재론(김환석, 2018: 9)이 인간을 살릴 수 있는가? 아니, 살려야 하는가? 노동으로 인한 죽음,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죽음 등 수많은 죽음이 있다. 우리는 인간 개체(한 사람)의 어떤 죽음을 생태계의 균형이라고 불러야 마땅할까. 반면 비인간끼리의 죽고 죽임이 갖는 의미는 개체로서 인식되지 않는다. 총체로서 이야기된다. 물론 딱정벌레 한 마리가 송진에 익사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애도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딱정벌레를 나무가 아니라 인간이 죽이면 잘못된 걸까? 생태계의 균형을 위해 인간이 불을 질러 죽였다면?

총체적인 인식은 없고 특정한 상황 속의 인식만 존재한다면(최유미, 2020: 125), 관계를 맺음에 따라 그 죽음은 마땅한 것일 수도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필요한 죽음들”(앞의 글: 147)의 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할까. 나는 인간으로서 최선의 죽음, 딱정벌레로서 최선의 죽음, 소나무로서 최선의 죽음이 무엇일지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땅한 죽음의 모습을 상상해야 한다. 그 마땅함이 우리를 때로는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살리기 위해 갖은 수를 쓰게 만들고, 때로는 오직 애도하게 만들 것이다. 인간이 물질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고 싶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구체적 상황에 처한 실제 인간들의 행위가 중요하다”면(해러웨이, 2021: 100), 접촉하는 삶을 사는 것만큼, 비인간 네트워크에 겸손하게 참여하는 것만큼 마땅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 나눠야 한다. 인간이라서 그렇다. ‘생태적 주체’로서 “자신의 인식론적-도덕적-정치적 활동에 대한 책임을 고백하고 그러한 책임을 떠안기 위해 집합적・개인적 입장을 표명”하면서 말이다(앨러이모: 54-55). 인간만을 위한 생각을 견제하는 것이 인간을 위한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촉수적 사유든, 비인간 네트워크든, 행위적 존재든, 횡단-신체성이든, 이 개념들을 흡수한 특정한 상황에 놓인 인간들의 인식들이 연결되어 이야기되길 바란다.

부록 – 신유물론의 단어들

  • 횡단신체성: 페미니스트 신유물론자인 스테이시 앨러이모는 횡단신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양한 물질이 우리 몸을 가로지르며, 경계를 넘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 반려종: 종을 횡단하며 서로 단단히 얽혀있는 자들을 분류하는 명칭으로, 유기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 홀로바이옴(Holobiome): 홀로바이옴은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에 따르면 진핵생물을 구성하는 게놈의 연합체로, 주어진 분류군 생물의 게놈과 그것과 공생하는 미생물 군집의 게놈으로 구성된다. 해러웨이는 이를 확장해 산호초에 생계를 의존하는 사람들과 죽어가는 산호초에 예술 활동으로 응답하는 공예가들까지 모두 포괄해 홀로바이움을 구성한다.
  • 실뜨기(String figures): 해러웨이는 빽빽하게 엉킨 사건들과 실천들 속에서 엉킴과 패턴을 찾는 것을 방법으로 삼는다. “실뜨기는 주기와 받기이고, 만들기와 부수기이고, 실을 줍기와 떨어뜨리기이다.”(해러웨이, 2016: 11p) 주체와 대상의 역동성이 형상화된다.
  • 테라폴리스(Terrapolis): 지구에 사는 모든 크리터들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테라폴리스의 시민이 된다.
  • 퇴비: 해러웨이에게 퇴비는 포스트 휴먼을 대신하는 탈인간중심주의 형상으로, 퇴비는 복수종들의 삶과 죽음이 상호 의존적으로 뒤얽힌 구체적 형상이다.
  • 쑬루세(Chthulucene): 해러웨이는 땅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크톤과 피모아 크툴루라는 거미의 이름을 토대로 쑬루세라는 새로운 시대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여성 혐오와 인종 차별주의가 담긴 크툴루 신화와 달리하기 위해서 메타플라즘(metaplasm)을 통해 철자를 바꾸었다.
  • 공-산(Sympoieses): 함께-만들기. 공-산은 자율생산을 껴안고 생성적으로 펼치고 확장한다.
  • 공생발생(Symbiogensis): 린 마굴리스의 견해로, 새로운 종류의 세포, 조직, 기관, 종들이 낯선 것들 사이에서 오래 지속되는 친밀성을 통해 진화한다.
  • 크리터(Creater): 생명체, 창조성이 있는 개체. 미국에서 온갖 종류의 성가신 동물을 가리키는 일상적인 관용어. 미생물, 식물, 동물,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때로는 기계까지 포함해 잡다한 것을 의미한다.
  • 친척(Kin): 친척은 반려종 관계를 지칭하며, 생물학적으로 얽힌 관계를 의미하지만 수직적으로 얽혀 있는 가족과는 달리 수평적으로, 심지어 생물학적 분류 체계를 황단하면서 서로 단단히 얽힌 관계이다. (린 마굴리스의 공생발생가설에 따르면 모든 생명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친척이다.)
  • 번역: ‘번역’은 브뤼노 라투르의 용어로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당연히 원본과 같을 수 없고 의미의 미끄러짐, 실수 같은 흠이 있기 마련이다.

참고문헌

  • 김환석. 2018. 사회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신유물론. 지식의 지평.
  • 김환석 외 21인. 2021. 이감문해력연구소.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이성과 감성.
  • 도나 해러웨이. 2021.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하기.
  • 몸문화연구소. 2022. 신유물론, 필로소픽.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2021. 이민아 옮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디플롯.
  • 스테이시 앨러이모. 2018. 윤준, 김종갑 옮김. 말, 살, 흙 –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그린비.
  • 정연보. 2022. 기후 위기 시대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 – 공동생성과 촉수적 사고, 생태주의적 돌봄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연구 제22권 1호. 73-108.
  • 주기화. 2019. 신유물론적 관점에서 본 토드 헤인즈의 〈세이프〉.
  • 최유미. 2020.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도서출판b.

  1. 결국 막지는 못했고, 지금도 한국의 마지막 석탄발전소 붕앙-2는 베트남에서 착실하게도 지어지고 있다. 지금은 관련 정부·기업과 형사·민사 재판을 하고 있는데, 집회시위법 위반, 재물손괴죄 등 현행법으로 다뤄지지 않는 사람의 숨과 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있다.

  2. 정치학에서는 정치생태학(Political Ecology), 경제학에서는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 페미니즘 경제학(Feminist Economics)의 출현을 이를 수 있다.

  3. 신유물론과 구유물론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말을 참조하라. “과거의 유물론은 관념론과 대립되는 자리, 즉 뒤집어진 관념론이었고 양자 모두 세계은 실체가 있다는 본질주의essentialism를 배경으로 한다. 신유물론은 관념 없는 물질, 물질 없는 관념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 자체를 거부한다. 자연과 문화, 물질과 정신이라는 독립적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정신, 자연=문화이다. 물질과 정신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스테이시 앨러시모, 2018 :391p).”

  4. 혹자는 난해한 세상을 묘사하는 과정이 난해하게 읽힐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보다 근대적 언어를 뛰어넘고자 하지만 근대적 언어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역설이 있다.

  5. 기후우울(Climate grief)은 이제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와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기구에서도 공인된 심리 질환이다. 기후우울은 소극적 설명으로는 기후변화가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위협적인 미래를 앞둔 세대가 겪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을 폭넓게 이른다.

  6. 잘 단련된 쇠.

  7. 해녀가 물질을 할 때, 가슴에 받쳐 몸이 뜨게 하는 공 모양의 기구. 박의 속을 파내어 만들고, 채취한 것을 담는 그물로 된 그릇이 달려 있다. 제주 지방의 방언이다.

  8. 호미처럼 생겼지만,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가늘게 만들어 암반 틈의 소라·문어·성게 등을 잡을 때 사용했다. 말하자면 바다에서 사용하는 낫.

  9. 숨비 소리.

  10. [동사] 물질하다.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따다. 주로 해녀들이 하는 일이다.

노마

앎은 앓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기후위기로 지구의 온도는 올라가는데 사람들의 온도는 낮아 괴롭습니다. 삶의 이상한 간극 사이에서 널뛰며 하루를 지나보냅니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세상을 꿈꿉니다.

솔빈

그 순간, 녹색이 보인다.

호찬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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