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마이클 하트 「정동되는 힘」②

로렌 벌랜트와 바뤼흐 스피노자는 둘 다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기획이 반드시 정동의 지형 안에서 형성되고,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기획의 열쇠는 우리의 정동되는 힘을 약함이 아니라 강함으로 인식하는 데 있으며, 우리가 비주권적 주체임을 후회하지 않으면서 깨닫는 데 있다. 우리는 정동을 경유할 때에만 해방과 기쁨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글은 마이클 하트 「정동되는 힘」 번역본 중 두 번째 글이다.

※ 서지사항



기쁨은 우리의 생각하는 힘과 행동하는 힘의 증가이며, 슬픔은 그 힘의 감소이다. by
Annie Spratt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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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은 우리의 생각하는 힘과 행동하는 힘의 증가이며, 슬픔은 그 힘의 감소이다.
사진 출처 : Annie Spratt

다음 걸음은 우리가 정동을 이해하고 그것에 참여하며 그 중에서 선택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바로 이것이 ‘정동되는 힘’ 이론의 두 번째 단계이다. 들뢰즈가 말하길, “어떤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그것이 지닌 정동되는 힘의 본성 및 한계에 상응한다.” 그리고 이것은 역으로 몸을 “채우는” 정동의 질에 달려 있다.1 정동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하나의 일람표를 만든다. 사랑과 증오, 질투와 분노, 수치와 자긍심을 포함하는 이 일람표는 기본적인 정동들을, 점점 더 복잡한 정동을 규정하는 다양한 순열들 안에서 결합시킨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기본 요소들을 힘과 인과관계에 따라 결합한(combinatoire) 정동들을 생성한다. 가령 기쁨은 우리의 생각하는 힘과 행동하는 힘의 증가이며, 슬픔은 그 힘의 감소이다. 그리고 사랑은 외적 원인의 인식에 의해 수반된 기쁨이며, 증오는 외적 원인의 인식에 의해 수반된 슬픔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동정(compassion)은 타인의 행운에 행복한 누군가를 정동하게 하는 한에서의 사랑이며, 시기는 타인의 불행에 행복한 누군가를 정동하게 하는 한에서의 증오이다. 내가 보기에 이 용어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와 우리의 일상적 사용이 얼마나 정확히 상응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그의 일람표가 정동이 일어나는 장의 중심에서 힘과 원인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누군가는 이러한 정동의 정의를 읽을 때,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오는 것을 추구하고, 슬픔을 피해야 한다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정말 가치 있는 목표이지만, 그러한 용어들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그 목표가 쉽게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여러 정동들과 관련해 기쁨의 길은 식별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실제로 있는 그대로로서의(어떤 사람이 우리가 그럴 거라고 바라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정동되는 힘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정동들로 가득 차 있다. 정동의 장은 종종 통과할 수 없는 가시밭처럼 보이고, 때로는 지뢰밭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정동의 원인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실천적인 기획 쪽으로 나아간다. 모든 정동은 능동(즉 내적으로 야기된 것) 또는 수동(즉 외적으로 야기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라틴어 “아펙투스(affectus)”의 번역어로 일상어에 더 가까운 “감정(emotion)”이나 “느낌(feeling)” 대신 “정동”을 쓸 때의 한 가지 이점은, 그것이 우리에 의한 그리고 우리에게 미치는 작용/행동(action)의 원인과 결과를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원인이 밝혀지게 되면, 그 기획은 수동 정서에서 능동 정서로, 즉 외부 원인에서 내부 원인으로 이행하게 된다. 수동보다 능동을 선호하는 이유는 정동의 경험 안에 있는 것은 아닌데, 정동의 경험은 원인이나 원천에 따라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설명하길, 수동 정서는 “그 원인 즉 외부 신체의 본성이나 본질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몸의 현재적 구성을 나타내며, 그래서 우리의 정동되는 힘이 그 순간에 채워지는 방식을 나타낸다.”2 수동 정서와 마찬가지로, 능동 정서도 우리 몸의 현재적 구성을 나타낸다. 정말 결정적인 차이는 시간적인 것이고 지속과 반복에 관한 것이다. 니체가 말한 바 있듯이, 이렇게 이로운 마주침 및 정동을 확장·반복하고 해로운 마주침을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수동 정서의 반복은 우리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물론 어떤 무작위 마주침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오지만, 우리가 그 마주침을 지속하거나 반복할 수 없다면 그것은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연한 마주침은 불행하게도 슬픔을 낳는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위태롭게 놔둔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어떠한 길도 없는 상태에 계속 머물게 될 것이다. “몸의 정동되는 힘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한, 그것이 우연한 마주침에 있는 것과 같다고 이해하는 한, 당신은 지혜로운 삶을 누리지 못할 것이며, 지혜를 갖지 못할 것이다.”3 수동 정서에 비해 능동 정서가 가진 큰 장점은 그것이 더 이상 외부 힘의 예측불가능성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몸이 스스로 정동되도록 야기하기 때문에, 우연은 제거되고, 몸이 마주침의 지속과 반복을 통제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당신의 정동되는 힘을 이해하고 확장하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수동 정서보다는 능동 정서로 채워진 그러한 힘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능동 정서관’은 몸(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주체)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모호하게 보일 수 있으며, 더 나쁘게는 도덕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기초적인 단일체나 기본 값을 갖는 ‘단일한 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설명하길, “하나의 신체는 자신의 부분들 간의 관계로 구성된다.”(『에티카』 4부 정리 39 증명[한글본] 268쪽) 그리고 그러한 부분들의 수와 구성은 변화 가능하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몸을 하나의 개체(혹은 개체 무리)로서가 아니라 대신 하나의 관계로 생각하기 위해 관점을 옮길 필요가 있다. 하나의 새로운 관계가 더해지면 더 큰 하나의 몸이 구성되고, 하나의 관계가 깨지면 그 몸은 약해지거나 해체된다. 이 모든 것은 몸의 내부와 외부 간의 경계, 그에 따라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들 간의 경계가 유동적이고 우리의 노력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수동 정서가 능동 정서가 되기 위해서, 외부 신체의 효과를 전에 경험했던 몸은 어떻게든 그러한 관계를 끊고 스스로 원인이 되는 법을 배울 필요는 없다. 대신 몸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 원인과 하나의 관계를 창출하거나 혹은 정말이지 몸을 구성하는 관계를 확장함으로써 원인을 ‘감쌀(envelop)’―이것이 들뢰즈가 사용한 용어이다―수 있다. 당신은 이러한 조건이 언제 존재하는지에 대한 앎을 다른 것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획득할 뿐이다. 즉 모든 마주침은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관계가 다른 것과의 관계와 일치하는 정도를 혹은 그와 함께 “구성할 수 있는” 정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기쁜 마주침은 늘 공통으로 발견할 어떤 것을 나타낸다. 들뢰즈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면 우리는 기쁜 정념의 도움을 받아, 어떤 외부 신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적인 것의 관념을 형성해야 한다.”4 일단 우리가 이 공통 관계를 인식하자마자 우리는 우리 기쁨의 원인을 포함하는 새롭고 더 큰 몸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인은 실제로 바뀌지 않는다. 원인은 말하자면 ‘정동된 몸’에 의해 단지 내부로 합병된다. 진정한 변화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이며, 따라서 신체의 구성이다. 일단 원인이 내적인 것이 되고 정서가 능동적이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변화에 종속되지 않는다. 즉 정동은 그것이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한, 연장될 수 있고 반복될 수 있다.5

몸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 원인과 하나의 관계를 창출하거나 혹은 정말이지 몸을 구성하는 관계를 확장함으로써 원인을 ‘감쌀(envelop)’ 수 있다. by Toufic Mobarak 출처:https://unsplash.com/photos/Kx2IgM3Q5jA
몸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 원인과 하나의 관계를 창출하거나 혹은 정말이지 몸을 구성하는 관계를 확장함으로써 원인을 ‘감쌀(envelop)’ 수 있다.
사진 출처 : Toufic Mobarak

따라서 수동 정서를 능동 정서로 변형하려는 실천적 기획은 궁극적으로 몸의 구성을 유지‧변형하는 결속 및 관계의 전략을 포함한다. 만약 스피노자가 당신의 치료사라면, 조언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것일 수 있다. 첫째, 너의 몸의 정동되는 힘과 그것을 구성하는 정동들을 발견하라. 다음으로 누군가 혹은 어떤 것과의 마주침이 기쁨을 준다면, 그것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을 당신의 일부로 만들고, 수동 정서를 능동 정서로 변형하라. 그 결과 당신은 더 이상 기쁨이 생기지 않을 때까지 마주침을 반복하거나 지속하게 만들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이 고정된 개체가 아닌 관계의 다발임을 인식해야 하며, 당신의 과제는 새로운 기쁜 관계를 구성하고 슬픈 관계를 해체하는 데 있다. 능동 정서의 비율을 늘리는 것이 우선적으로 원인이 된다는 것―적어도 직접적인 방식으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치료사는 당신이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고, 마치 그것이 주권적 의지의 작용이라도 되는 양, 질책하기만 하는 사람이다. 대신에 당신은 기쁜 마주침을 발견해야 하며, 그러고 나서는 수동 정서를 능동 정서로 만들어야 한다. 원인과의 일관된 관계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 우리를 새로운 몸으로 구성하는 새로운 관계를 지닌 원인을 감쌈으로써 말이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기술적인 어휘는 이 과정이 실제로 실천 기획일 때 그것을 모호한 것으로 들리게 만든다. 가령 타인과 함께 생각하는 당신의 힘을 생각해보라. 당신은 여러 지적인 토론과 마주침에서 더 혼란스럽고, 덜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가끔 당신이 전에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명확하고 더 강력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나 혹은 그가 있는 집단을 마주칠 때도 있다. 당신이 전에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을 갑자기 이해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스피노자가 상상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순수한 기쁨이다. 뭔가를 하는 실천적인 것이란, 그러한 기쁜 마주침을 외적 원인의 우연과 변동에 맡기지 않는 것이다. 지적 기쁨의 원천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구성하자. 그 마주침을 반복하고 지속시키자. 토론 그룹을 형성하거나 함께 책을 쓰자. 물론 이것이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관계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것이다.

물론 이는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어떤 사람 혹은 사물은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당신에게 슬픔을 야기할 것이다. 결속을 만들지 끊을지, 관계를 구성할지 해체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늘 복잡하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정동의 이러한 뒤얽힌 지형이 그토록 많은 벌랜트의 작업이 거하는 곳이다. 예컨대 스피노자의 정동 일람표에 쉽게 추가될 수 있는 그녀의 탁월한 스피노자적 공식을 생각해보자. “당신이 욕망하는 뭔가가 실제로 당신의 번영의 장애물이 될 때 잔혹한 낙관주의의 관계가 존재한다.”6 우리가 너무 자주 그러한 좌절의 욕망으로 채워진다는 그녀의 인식은 물론 절망의 원인은 아니다. 우리는 윤리적‧정치적 기획의 핵심인 바로 그러한 장 안에서 작업할 필요가 있다.

벌랜트와 스피노자가 그랬듯이, 우리의 윤리적‧정치적 과제를, 주권적 주체로 행동하는 힘이 아니라 정동되는 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 풍경이 향할 방향을 이동시키고,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연다. 정치적 기획은 단지 이성과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심지어 주된 것도 아니다) 그 모든 뒤죽박죽―그리고 그것의 추함― 속에서 우리의 정동되는 힘과 맞물리는 것에 있다는 것, 그것은 가장 명백하고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인간의 번영, 좋은 삶, 기쁨이라는 고전적 목표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당신에게 주는 권고는 우선 당신의 정동되는 힘을 증가시키라는 것이고, 다음으로 그러한 정동되는 힘 안에서 수동 정서보다는 능동 정서의 더 큰 부분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능동 정동을 최대화하기 위해, 당신의 결속과 관계에 주력하라는 것이다. 즉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올 사람과 사물을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몸을 구성할 지속적 관계를 형성하며, 그에 상응해 당신을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에 붙들어놓는 결속을 해체하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벌랜트가 만나는 곳은 바로 이곳, 비주권적 주체를 위한 정치적 기획 속에서이다.

참고문헌

  • Berlant, L. (2011). Cruel optim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 Deleuze, G. (1992).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trans: Joughin, M.). New York: Zone Books.
  • Deleuze, G. (1978). “L’affect et l’idée,” Course lecture at the Université de Paris VIII, Vincennes, 24 January.
  • Available at www.deleuzeweb.com in the original French and English translation.
  • Hardt, M. (1993).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 Schmitt, C. (2007).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trans: Schwab, G.).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Spinoza, B. (1985). Ethics in collected works (trans: Curley, 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 Spinoza, B. (2002). Political treatise in complete works (trans: Shirley, S.). Indianapolis: Hackett.

  1. Deleuze,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p. 218. [한글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294쪽.

  2. Deleuze,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p. 219-220. [한글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296쪽.

  3. Deleuze, “L’affect et l’idée,” 1978.[한글본] 『비물질노동과 다중』, 46쪽.

  4. Deleuze,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p. 283. [한글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382쪽.

  5. 나는 이 문단에서 스피노자의 “공통 개념common notion”의 역할에 대한 들뢰즈의 설명—이것은 그의 해석에서 결정적이다—을 엄청나게 축약시켰다. 들뢰즈의 요약은 이렇다. “스피노자에 의해 서술된 이 전 과정은 다음 네 단계로 나눠진다. (1) 우리 행동의 힘을 증가시키는 기쁨이며, 그로부터 아직은 부적실한 관념에 기초한 욕망과 정념이 흘러나오는 수동적 기쁨. (2) 이 기쁜 정념의 도움을 이용한 공통 개념(적실한 관념)의 형성. (3) 이 공통 개념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우리 행동의 힘에 의해 설명되는 능동적 기쁨. (4) 이 능동적 기쁨은 수동적 기쁨에 더해지지만, 그것은 수동적 기쁨에게서 나온 욕망의 정념을, 이성에 속하는 것이자 진정한 행동인 욕망으로 대체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기획은 모든 정념을 억누름으로써가 아니라, 기쁜 정념의 도움을 받아 정념을 우리 자신의 가장 작은 부분으로 제한함으로써 실현된다. 그 결과 우리의 정동되는 능력은 능동적 정서의 최대치로 발휘된다.” Deleuze,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p. 285([한글본] 385쪽). 나는 좀 더 길게 “공통 개념” 및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의 여러 다른 측면을 논의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Hardt, M.,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한글본] 마이클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김상운․양창렬 옮김, 갈무리, 2004를 보라.

  6. Berlant, L., Cruel optim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1, p. 1.

박성진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전공분야인 영문학에서는 낭만주의에, 비전공분야인 철학에서는 맑스주의와, 탈구조주의에 관심이 많다. 문학과 철학의 접목에 관심이 많다. 특히, 자연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빗발쳤던 낭만주의 시대에 쓰인 시들을 좋아하고,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상상력을 좋아한다.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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