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하트의 Prison Time] ① 감옥의 시간

이 글은 예일대출판부에서 정기 발행하는 저널 『Yale French Studies』 1997년 No. 91에 실린 마이클 하트의 「감옥의 시간(Prison Time)」에 대한 번역이다. 총 5회로 나누어 연재할 예정이다.

감옥과 그 수감자들은 너무나 실질적인 실존을 갖고 있어서

자유로이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장 주네, 『장미의 기적』

레닌은 감옥을, 혁명가를 양성하는 대학으로 생각하길 좋아했다. 약간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장 주네 역시 수감 시절 동안 혁명을 교육받았다. 그는 사랑과 욕망의 변형적 힘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주네의 혁명은 현재 우리를 구속하는 텅 빈 시간을 파괴하고, 새로운 시간 및 새로운 삶의 리듬을 구성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의 혁명은 물질적이면서 비물질적이며, 또한 사회적이면서도 신성한, 그러한 변형이다. 감옥은 천국을 습격하는 집단적 기획을 위한, 있을 법하지 않거나 유별난 출발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주네의 글에서 감옥의 시간이 우리의 사회질서의 핵심이며, 감옥의 파괴가 모든 혁명의 조건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시간은 권력의 척도이며, 그래서 주권 권력이 우리의 시간을 갖게 되면 그것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 Jon Ty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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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권력의 척도이며, 그래서 주권 권력이 우리의 시간을 갖게 되면 그것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 Jon Tyson

감옥의 시간은 우리 세계의 명백한 처벌 형태이다. 자유, 즉 우리가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현대 사회의 핵심이자 현대 사회에서 가장 탐나는 소유물로 간주된다. 그래서 의심할 여지없는 논리에 따르면, 처벌의 패러다임은 모두가 똑같이 소유하며 가장 소중한 자산인 시간을 잃는 것이다.1 감옥은 정확히 정해진 양만큼 우리의 시간을 가져간다. 노동-시간과 가치 사이의 방정식처럼, 우리 사회는 감옥-시간과 범죄 사이에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정교한 계산법을 설정한다. 차량 절도는 6개월, 불법 마약류 판매는 5년, 살인은 10년과 같다. 구체적인 범죄는 추상화되어 신비한 변수가 곱해진 뒤, 정확한 시간양의 처벌로 다시 구체화된다. 계산은 완전히 임의적이지만(이 계산은 절도를 했다고 손을 자르는 식의 끔찍한 환유와는 어떠한 상관관계도 갖지 않는다), 우리가 간혹 방정식의 두 항이 갖는 상대적 값에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어도 계산법 자체의 실용성을 의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처벌은 시간과 같다. 이 논리는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 내부에서 보면 아주 분명하다. 일련의 훈육‧규격화‧명령으로서 권력은 감옥을 통해 시간에 직접 투여된다.2 시간은 권력의 척도이며, 그래서 주권 권력이 우리의 시간을 갖게 되면 그것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가령 주네가 우리에게 말했듯이, 어떤 수감자의 시신은 그의 형기가 3년이 남았기 때문에 가족에게 인계되지 않고 임시로 감옥에 안치되었다.)3 우리 사회에서 권력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시간에 대한 권력이다.

수감자들은 흔히 자신들이 감옥에서 보내는 시간을 바깥의 시간과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라고 말한다. 감옥은 시간을 버리고, 시간을 부수고, 시간을 텅 비운다. 수감자들은 자신들의 범죄에 대한 시간을 치르고 그들의 벌금을 지불하려고 복역한다. 당신은 열심히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쉬엄쉬엄 보낼 수도 있다. 그것은 태도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은 똑같이 버려지는 것이다. 감옥의 일정 및 일상의 반복으로 인해 시간은 텅 비워진다. 시간은 일종의 시각적 환영으로 인해 길게 늘어졌다가 무너진다. 정확히 지정된 필수 활동 및 규정들로 하루하루가 채워진다. 시간은 달팽이 걸음으로 움직인다. 하루가 끝없이 이어진다. 당신은 벽에 붙은 파리와 그 움직임이 무한히 느리다는 것을 목격한다. 식사 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이 날들을 돌아보면, 그것들은 식별이 불가능하다. 그 날들은 아코디언의 바람통처럼 서로 접혀있다. 시간 보내기는 그 구성요소의 정확한 반복, 동질성, 신선함 결여로 인해 어떠한 지속도 어떠한 실체도 갖지 않는 것 같다. 감옥의 시간은 우연이 없는, 운명이 정해진 시간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더 높은 권력에 의해 미리 계획된다. 교도소 당국의 무수한 손짓은 모두 프로그램된 감옥 시간의 경로를 따라 수감자를 이동시키는 전능한 운명의 손짓을 구체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감자들은 쏜살같이 지나는 이 덧없는 시간을 헛되이 붙잡으려 한다. 달력의 날짜를 ×표로 지워가고 벽에다 시간을 표시하는 작대기를 긁어 가면서 그 시간에 어떤 구체적인 실체를 부여하면서 말이다.

수감자들은 감옥을 삶으로부터 추방 아니 오히려 삶의 시간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체험한다.4 시간은 늘 그들의 최우선 관심사다. (수감자라면 누구나, 수형 시간이 절반으로 준다면 두 배 더 가혹한 처벌과도 거래할 것이다.) 감옥의 시간에서는 수감자들의 존재 자체가 텅 비워져 복도를 따라 어슬렁거리며 걷는 그림자 정도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숙명의 무게, 즉 감옥 시간의 주권 권력이 부과한 운명이 수감자들을 그들의 몸에서, 실존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죄수들은 그들의 버려지고 빈곤해진 실존으로부터 떼어내진 채, 다른 곳에서 본질을 찾아야 한다. 몇몇 이들에게는 내면의 삶이 시간 밖의 피난처, 쳇바퀴 도는 감옥의 고통과 지루함을 넘어서는 피난처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나를 교도소 당국의 잔인한 시선에 아무리 노출시켜도, 알몸 수색과 모욕을 아무리 많이 당해도, 그들은 진정한 나의 내면은 건드릴 수 없어’라고 말이다. 다른 수감자들은 그들이 실제 겪은 과거나 다른 현재, 아니면 출소 후의 미래 등 그들을 감금한 벽 바깥에서의 충만한 자유의 삶을 열렬히 상상하며 위안을 얻는다. ‘밖에 나가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이다. 그럼 난 정말 살아있는 것이겠지.’ 이처럼 충만한 존재와 충만한 시간은 그들의 실존과 일치할 수 없기에 항상 다른 곳에 투영되어야 한다. 그토록 많은 수감자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가장 강렬한 형이상학적 문제들 중 하나와 씨름해야 하며 또한 그들은 지독한 존재론적 병을 앓는다. 그들은 존재와 분리된 실존에 유폐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삶으로부터 추방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바깥에서 감옥 안을 보는 자유로운 사람들은 감옥 시간과는 정반대로 규정되고 또 감옥 시간과 비교되어 강화되는 그들 자신의 자유를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이 감옥에 다가갈수록, 당신은 그곳이 정말로 사회와 분리된 배제의 현장이 아니라 오히려 전 세계에 널리 분산된 권력 논리가 최고도로 집중된 중심점이자 그 현장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사회를 가장 잘 실현한 형태가 바로 감옥인 것이다. 당신이 수감자들의 실존적 물음(existential question)과 존재론적 몰입(ontological preoccupation)을 접했을 때, 당신 자신의 실존의 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만일 내가 수감자들이 꿈꾸는 그러한 다른 곳에서 충만한 존재로 살고 있는 것이라면, 내 시간은 정말 그토록 충만한가? 내 삶은 정말 버려지지 않는 건가? 내 삶 역시 훈육체제를 통해 구조화되고, 나의 하루는 기계적 반복성(출근‧노동‧퇴근‧텔레비전‧잠)을 띠며 지나간다. [수감자들과] 동일한 신체적 불편함이나 성적 박탈감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벽이나 창살이 없다 뿐이지 내 삶도 기이하게 그와 닮아간다. 더 정확히 말해, 내 시간은 생기가 있든 없든 종종 똑같이 텅 비고, 똑같이 버려진다. 하루와 주말을 돌아보면 나 역시, 텅 비어 있어서 압축된 채 접혀있는 아코디언 같은 시간을 경험한다. 나는 우리의 자유로운 사회 안에서 삶으로부터 추방된 채 감옥 시간을 산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는 시간을 구원할 수 있고, 어떻게 충만한 시간을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필요로 하면서도 절박하게 만드는 것은 감옥의 바로 그 실존이다.

주네의 기적은 텅 비고 동질적인 감옥 생활의 시간을 충만한 시간으로 변형시키는 데에 있다. 그는 이 문제를 그 강도가 최고도에 이른 지점에서 공략하고, 시간의 충만함이 가장 부정되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는 것처럼 보인다. 주네 소설의 화자들이 반복해서 자신들은 감옥을 사랑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단순히 우리의 예상을 뒤집는 괴벽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5 “나는 추문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다.”6 그저 여론을 거스르려는 목적으로 사회적 관행 및 통념에 대응하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위반에서 규범[의 정당성]을 확인하게 만드는 반응적 몸짓일 수 있다. 하지만 아니다. 감옥에 대한 사랑은 진짜다. 그러나 감옥을 사랑하는 마음을 감옥살이에 대한 단순한 욕망이나 바깥 사회보다 감옥살이를 선호하는 마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주네의 등장인물들은 감옥에 대한 사랑이나 아름다움 때문에 감옥에 가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체포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그들이 석방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행하지 않는다. 절도와 폭행이 투옥의 주요 원인으로 제시되지만, 결국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운명의 힘으로 감옥으로 인도되는 것처럼 보인다. 주네에게서 우리가 이해하고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은 사랑과 운명의 복잡한 관계이다. 첫 번째 순간에 우리는 신성한 비체화의 상태에서 운명의 힘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힘에 사랑이 포함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순간에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운명을 형성할 수 있는 능동적 역할을 하게 된다.

※ 이 글의 원문은 온라인으로 다운로드 가능하다. Michael Hardt, 「Prison Time」, Yale French Studies, No. 91, Yale University Press, 1997, pp. 64-79.


  1.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속하는 것이 선(善)인 … 사회에서 어떻게 감옥이 탁월한 형벌이 아닐 수 있겠는가?” Michel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 trans. Alan Sheridan, New York: Vintage Books, 1977, p. 232. [한글본]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출판사, 2000, 335쪽.

  2. “시간, 처벌의 관리자.” “권력은 시간과 직접 접합된다. 권력은 시간의 통제를 보증하고, 시간의 활용을 보장한다.” Foucault, ibid, p. 108 and 160. [한글본] 푸코, 같은 책, 167쪽과 241쪽.

  3. “… 봇차코의 경우처럼, 모든 수감자가 자신의 선고 기간을 끝마쳐야 하고, 그가 아직 3년의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가족은 3년이 지날 때까지는 그의 시신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Jean Genet, Miracle of the Rose, trans. Bernard Frechtman, New York: Grove Press, 1965, p. 234. [한글본] 장 주네, 『장미의 기적』, 박형섭 옮김, 뿔(웅진), 2011, 299-300쪽.

  4. “… 수감자들은 그에게 요구되는 체류 기간(그의 형량) 동안, 삶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당했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Erving Goffman, Asylums, New York: Anchor Books, 1961, p. 68. [한글본] 어빙 고프먼, 『수용소』, 심보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8, 91쪽.

  5. “나는 메트레[감호소]를, 투렌 왕국의 중심에 있는 이 낙원을 사랑한다.” Genet, Miracle of the Rose, p. 171. [한글본] 장 주네, 『장미의 기적』, 219쪽. “나는 내 손가락들을 하늘에 날릴 많은 시간이 있다! 앞으로 10년이나! 나의 선(善)이자 다정한 내 친구인 내 감방! 내 달콤한 도피처, 나만의 것인, 나는 너를 사랑한다!” Genet, Our Lady of the Flowers, trans. Frechtman, New York: Grove Press, 1963, p. 129.

  6. Genet, The Thief’s Journal, trans. Frechtman, New York: Grove Press, 1964, p. 214. [한글본] 장 주네, 『도둑 일기』, 박형섭 옮김, 민음사, 2009, 310쪽.

박성진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전공분야인 영문학에서는 낭만주의에, 비전공분야인 철학에서는 맑스주의와, 탈구조주의에 관심이 많다. 문학과 철학의 접목에 관심이 많다. 특히, 자연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빗발쳤던 낭만주의 시대에 쓰인 시들을 좋아하고,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상상력을 좋아한다.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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