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연약한 그물망에 있다.”
— 존 더스 패서스
대부분의 독일 녹색당원들은 독일 통일의 속도에 반대했다. 우리는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서서히 통합되는 두 개의 독일 연방과, 핵무기가 없고 비무장한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동독이 유럽의 평화 지대가 되기를 바랐다. 1989년 가을의 동독 혁명은 매우 강인한 여성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그 중에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인 배르벨 볼리(Bärbel Bohley), 카티야 하페만(Katja Havemann), 울리케 포페(Ulrike Poppe)를 비롯해 많은 용감한 여성들과 남성들이 있었다. 1980년대 동안 동독의 반체제 인사들인 이 친구들의 비좁고 담배 연기로 자욱한 거실과 부엌에 앉아, 힘없는 자들의 힘, 사상의 힘, 그리고 정신의 힘에 대해 토론한 일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엄청난 탄압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시민 참여로 만들어지는 비폭력 혁명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함께 나누었다.
1989년 12월 달라이 라마는 독립국 시민이자 인권 운동가들 간의 만남을 주선한 우리의 초대를 수락했다. 소중한 친구들인 그들은 우리 생각에는 동독의 새로운 정부를 이루게 될 예정이었다. 당시는 에곤 크렌츠(Egon Krenz)1가 아직 실권을 쥐고 있었지만 그가 사임 의사를 밝힌 12월 6일, 게르트 바스티안(Gert Bastian)과 나는 달라이 라마를 모시고 동베를린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다소 긴장했는데, 그에게 관용차를 허용한 일이 내 지위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가 체포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체크포인트 찰리’2를 통과하는 순간, 우리는 뭔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동독의 공포스러운 국가보위부 슈타지(Stasi)의 감시를 수년간 받아왔던 우리가, 이제는 슈타지 요원들의 작은 트라비 차량으로 동베를린 거리를 지나 전설의 원탁회의가 시작될 장소로 안내를 받게 된 것이다.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활동가들이 원으로 둘러싸면서 달라이 라마에게 촛불을 건넸다. 그곳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는 유대인 양로원 문 바깥에 티베트의 기도용 숄을 깔았고, 곧 이어서 우리들은 원탁 회의실로 향했다.
우리는 〈시민행동운동〉이 평화주의, 생태주의, 사회 정의, 페미니즘의 가치를 반영한 매우 진보적인 헌법을 채택하는 것을 목격했고, 독일 땅에서 일어난 최초의 혁명이 독일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자유와 관용을 지닌 새로운 사회를 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시민행동운동〉3은 달라이 라마를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국가의 첫 공식 사절로 맞이하면서 이제부터는 동독이 티베트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게 될 것임을 약속했다. 우리 모두가 이 역사적인 순간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달라이 라마는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로 출발했고, 에곤 크렌츠는 사임했다. 그러나 우리가 꿈꾼 새로운 동독의 꿈은 서방의 정치인, 은행가, 사업가들에 의해 순식간에 무산되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낡은 개념과 시대착오적인 경제적‧환경적 해법을 들고 동독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89년 12월부터 1990년 3월까지 동서를 오가던 서독의 관료들은 “완벽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청사진을 휴대하고 있었다.
우파 정치인들은 재빨리 민족주의적 수사로 회귀했고, “독일인이다”라는 말은 최악의, 가장 오만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1989년 10월과 11월 동독인들은 “우리가 국민이다”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과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 목표,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서독 국기가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독일 국가(國歌)가 점점 더 많이 불리게 되었으며, 갑자기 구호는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로 바뀌었다. 내 생각에 이것은 혁명의 종말이었다. 불과 몇 달 안에 모든 것이 뒤집혔고, 1990년 3월 동독에서 처음 실시된 자유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혁명 이후의 혼돈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가 제시한 서독 사회의 청사진을 선택했다.
서독 총리 헬무트 콜, 나토(NATO), 유럽 공동체, 다른 서방 국가들, 심지어 교황까지 마치 자신들이 직접 동유럽을 해방시키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하인리히 알베츠(Heinrich Albetz) 목사가 말했듯이, “서독이 동독을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것이 차라리 더 솔직했던 것일지 모른다.” 심지어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4조차 민족주의적 수사를 펼쳤고, 순식간에 동독의 모든 것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들의 보편적 보육 정책이나 낙태의 자유를 명시한 법조차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다. 오로지 “서쪽으로 가자”(Go West)라는 말만이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독일 담배 브랜드 이름이었다.

동독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 볼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공포가 스며들었고, 시민들은 서방의 침략 앞에 압도당했다. 그들은 혁명의 목표를 논의하거나 통일의 과정을 결정할 어떠한 기회도 얻지 못했다. 우리의 동독 친구들은 동독의 해체가 아닌 더 나은 동독을 꿈꿨다. 그러나 3월이 되자 언론은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5와 그의 동독 정권이 중국식 해법을 채택하려 했던 1989년 10월에 혁명의 최전선, 시위의 최전선에 섰던 저 용감한 여성들과 남성들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1989년 혁명이 극적으로 뒤집힌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1990년 여름 장갑차들이 1200억 독일 마르크(700억 달러)를 동독으로 실어 날랐고, 7월 1일 수백만 명의 동독인들은 1만여 개의 은행 지점과 경찰서에 줄을 서서 동독 마르크를 독일 마르크와 1:1 비율로, 그리고 4만 동독 마르크부터는 1:1.5 비율로 환전했다. 9월이 되자 헬무트 콜 총리에게 남은 유일한 장애물은 동독 주둔 소련군의 배치 문제였다. 그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30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수와 그들의 재정착을 위해 8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50억 달러는 소련 내 3만 6천 채의 새 아파트 건설에, 나머지 30억 달러는 군인들의 민간 직업 재교육 비용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그 대가는 2차 대전 승전국의 전후 권리 모두를 종료하는 조약이 모스크바에서 순조롭게 체결될 것이라는 점을 사실상 보장받은 것이었다. 이 합의가 가진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서명식이 단 5분 만에 끝났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990년 10월 2일과 3일, 베를린에 있는 악명이 높은 저 국회의사당에서 우리는 첫 번째 합동 의회 회의를 열었는데, 놀라운 것은 통일 조약에 대한 논의가 열띤 분위기 없이 밋밋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독일 유대인 중앙협의회〉는 7월에 헬무트 콜 총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前文)이 실린 안건서를 제출했다.
독일 역사의 연속성을 인식하고, 특히 1933년과 1945년 사이에 자행된 전례 없는 폭력 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한 모든 희생자에 대한 의무 그리고 인권 존중과 평화에 헌신하는 독일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책임을 마음에 새기며…
독일 정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초안을 제출했다.
독일 역사의 연속성을 인식하고, 인권 존중과 평화에 헌신하는 독일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 우리의 과거로부터 비롯된 특별한 책임을 마음에 새기며…
토론 과정에서 녹색당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구절을 전문에 포함하자고 했지만, 외로운 주장이었고 우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정부안이 다수표를 얻었고, 통일 조약에는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자행된 전례 없는 폭력 행위”에 대해 일언반구도 넣지 못했다.
콜 총리는 이어서 독일의 행복과 번영이 “천년” 간 지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몰지각한 말인가! 히틀러가 “천년 제국”이라고 말했을 때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1990년 10월 3일 헬무트 콜은 서독이 동독과 합병하여 완전한 주권을 확보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단번에 거의 반세기 간 지속된 공산주의 체제가 종식되고, 동독인들은 기업 및 노동조합 관행, 복지, 보험 및 기타 기준에서 서독의 규칙을 따르게 되었다.
동독 정부가 공식적으로 해산될 때, 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동독 경찰과 군인들은 제복에 이제 자신들이 서독인임을 알리는 작은 플라스틱 표식을 달았다. 이제 서독 정부 소속으로 복무하게 되었는데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그들은 “우리는 명령권자에게 충성한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독일을 또 다시 본 것이다.
조속한 통일에 반대 목소리를 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던 작가 귄터 그라스는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우슈비츠는 민족 자결권조차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그 끔찍한 만행의 전제조건 중 하나는, 다른 오래된 자극들 외에도 강력하게 통일된 독일 제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도, 바이에른도, 심지어 오스트리아조차도 조직적인 대량 학살을 자행할 의지와 방법을 개발하고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통일된 독일 제국을 필요로 했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기능하는 단일체인 통일된 우리 자신을 우려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냉전과 통일 이후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 묘지 훼손을 비롯한 반유대주의 행위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독일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 즉 외국인들(Ausländer)에 대한 증오심이 커지고 있다. 최악의 상황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나는 축구 훌리건들이 히틀러 찬양가를 부르고, 유대인 및 외국인들과의 대전에서 승리하라는 노래를 부르고, 네오나치들이 히틀러 시대에 불렀던 옛 가사로 ‘독일의 노래’를 부르고, 외국인들이 지하철과 기차역에서 폭행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전차 종착역 인근에 있는 외국인 거주 시설에서는 우익 단체들이 밤마다 찾아와 창문과 문을 부수고 거주자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울름(Ulm)에서는 극우파들이 그리스 청년집단을 공격해 13세 소년을 잔인하게 폭행했지만, 길 가던 독일인 중 돕겠다고 나선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탈리아 남성 두 명과 여성 한 명이 소년을 도우려고 하자 그때서야 스킨헤드들은 그를 놔주었다. 울름 경찰은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아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소수자를 괴롭히고 공격하는 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나라, 외국인이 위협받고, 공포에 떨고, 심지어 살해당하고 있는데도 방관하는 나라가 도대체 무슨 나라란 말인가?
1992년에는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하루에 한 건 이상 발생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네오나치의 공격으로 사망한 외국인의 수는 공산주의 시절 국경을 넘으려다 사망한 외국인의 수보다 많다. 통일 독일에서 베트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이전보다 더 심한 억압과 노골적인 증오에 시달리고 있다. 불관용과 증오가 사방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네오나치, 우익, 스킨헤드의 잔혹 행위만이 우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서독과 동독 모두에서 이러한 행위가 일어나는 동안 평범한 독일인들이 모른 척 지나치거나,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이러한 잔혹 행위를 저지르도록 가해자들을 선동했다는 점이다. 클라우스 하르퉁(Klaus Hartung)은 〈디 차이트(Die Zeit)〉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들의 무관심, 소극적 태도, 그리고 그들이 속으로는 내심 즐긴다는 것을 신문이나 TV가 다루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진정한 위협이다. 도처에서 사람들은 용기를 잃어가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국내 문제가 되고 있다.” 베를린의 한 기차역에는 이런 낙서가 적혀있다. “누가 감히 스킨헤드를 쫓아가 때릴 수 있겠는가?”
네오나치와 파시스트 집단, 그리고 스킨헤드들이 독일 전역을 증오와 혐오로 물들여 놓았다. 동독 경찰은 네오나치와 스킨헤드들에 대해, 동감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완전히 무력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나치의 노래와 구호가 소란을 일으켜도 수수방관하기 일쑤고, 사람들이 자경단을 조직하도록 방치하고 있으며, 난민 수용소가 잔혹한 공격을 받을 때에도 대게는 너무 늦게 도착한다.
십대 네오나치 집단은 자신들이 그렇게 많은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매일 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모잠비크, 베트남인들에 대한 공격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뤄지고 있다. 네오나치들이 외설적인 구호를 외치고 외국인 노동자의 숙소와 가옥에 화염병, 돌, 병을 던지는 동안, 지역 주민들은 그것을 보면서 “짐승들을 쫓아내라”고 외친다. 외국인 남녀노소는 쓰레기통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격을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많은 난민 수용소에는 도움을 요청할 전화조차 없다. 동독에 있는 나의 외국인 친구들은 밤늦게 혼자 거리를 다니거나 기차를 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시사 주간지 《슈피겔(Spiegel)》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인의 34%가 우익 극단주의 경향에 공감하고 있다. 응답자의 96%는 자국에 “경제 난민”이 더 줄어들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우리 독일의 현재 인구는 8천만 명이다. 이 중 530만 명이 이주민들이지만, 우리는 이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 난민과 이주민들은 서독의 번영에 기생하고 독일인의 삶을 혼란에 빠뜨리는 골칫거리로 간주된다.
많은 독일인이 거주나 취업 또는 망명을 신청하는 외국인들에게 위협을 느낀다. 수십 년 동안 독일에서 살면서 일해 왔던 외국인들이 여전히 “손님” 취급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지방 선거에서조차도 투표권이 없다. 네오파시즘과 우익 극단주의가 이러한 외국인 혐오를 배경 삼아 발전하고 있는데, 이는 파시즘과 인종차별주의 간의 역사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대응할 힘이 없고 고립된 이주민은 해결되지 않은 모든 긴장과 문제들의 희생양으로 삼아지기에 특히 적합하다. 바이에른을 비롯한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는 외국인 유입을 막기 위해 시민 행동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노골적인 외국인 혐오는 약자, 외국인, 그리고 그 밖의 힘 없는 이들에 대한 멸시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이면에는 공격의 위협과 무력 사용 의지가 도사리고 있다. 베트남, 모잠비크, 쿠바, 폴란드, 앙골라, 중국 출신 사람들이 혁명의 슬로건인 “우리는 국민이다”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두고 과거에 [독일 유대계 시인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1797-1856)가 했던 말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독일인의 애국심이란 마치 추위에 노출된 가죽처럼 그의 마음이 좁아지고 쪼그라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국적인 모든 것을 증오하면서 더 이상 세계 시민이나 유럽인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다 그저 속 좁은 편협한 독일인이 되고자 한다.” 헤르베르트 로이닝거(Herbert Leuninger)는 이렇게 덧붙인다. “난민에 대한 독일 연방 공화국의 행태는 난민들이 탈출한 그 나라들의 수준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6 현재 우리 의회와 언론에서는 망명의 자유를 허용한 헌법의 개정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녹색당은 이러한 법 개정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독일 내부에서는 지역주의적 색채를 버리고 다시 “정상적인” 국가로 돌아가자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전 지구적 규모에서 독일이 더 큰 군사적 역할을 맡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독일의 경제력이 군사력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는데, 우리가 현실적으로 논의해야만 하는 것은 미래에는 독일의 군국주의적 민족주의가 핵 보유력과 결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독일과 독일인들은 두 차례의 끔찍한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그 전쟁들에 휘말려 들어갔으며, 유대인을 지구상에서 말살하려 했다. 우리는 자제력을 발휘해서 모든 무기의 수출 금지, 군산복합체 해체, 전쟁 재원 편성 금지, 평화봉사단(Peace Corps) 창설, 동유럽과 남유럽의 생태 재건을 위한 대규모 투자 등과 같은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 독일 헌법은 군사주의 반대, 국제적 개입 불참, 정치적 난민의 망명 허용을 보장하고 있지만, 나는 [독일인들이] 이른바 “정상화”를 위한답시고 이 모든 기조를 바꿔버릴까 두렵다.
우리는 경계해야만 한다. 나는 기독민주당 사람들이 헌법이 개정되면 독일군을 걸프전에 파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아주 이른 시기에 들었던 적이 있다. 사담 후세인에 맞서는 독일 군인들은 세계 다른 어떤 군대보다 우월할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독일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이사국이 되어야 하고, 세계적인 경제·군사 대국이 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도 들었다.
유럽 대륙의 독일화, 즉 독일의 경제 제국주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독일은 아마도 전반적으로 더 강력해질 것이고, 구 동독은 “환자 상태”(sickman)로 남아있을 것이다.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은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까지 합류해, 노암 촘스키가 구 소비에트 제국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화”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일을 실행할 것이고, 구 공산당 관료들은 외국 기업의 지사를 운영하게 될 것이다. 자기제어, 탈군사화, 민주화 정책, 즉 독일이 새롭고 더 강력해진 통합된 유럽에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신호들은 완전히 부재하다. 우리는 독일 정부가 유럽 정치 연합에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유럽 공동체에서 가장 큰 금융국, 생산국, 소비국, 수출국이기 때문이다. 서유럽은 더 겸손해지고 제3세계와 더 연대해야 하며, 막대한 부를 다른 나라들과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수치스러운 독일 무기 산업의 역사는 우리가 책임감 있는 세계 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독일 산업계가 보유한 기록에는 무기 수출 스캔들의 사례로 가득 차 있다. 100여 개가 넘는 독일 기업이 이라크, 파키스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란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치명적인 무기를 판매하는 데 관여했으며, 무기 수출은 여전히 독일 외교 정책의 핵심 기둥 중 하나로 남아있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무기 공장에 독일 무기의 수출 계획이 잡힌 것에 대해 100통이 넘는 공식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대부분은 독일 정부 부처 사무실 휴지통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7
미국 의회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1989년 독일은 주요 무기 수출국 중 유일하게 제3세계에 대한 무기 판매량을 1988년 8억 3천만 달러에서 13억 달러 이상으로 늘렸다.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족에게 사용한 독가스는 독일의 기술과 독일이 설계한 살충제 생산 설비의 판매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쿠르드족 어린이들이 독가스로 죽어갈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우리 정치인들은 독일 군인들이 독일제 무기와 화학무기로 죽을까 봐 우려를 표했다. 걸프전 당시 독일은 이스라엘에 방독면을 기증하거나 판매했으며, 동시에 이라크에는 소형 가스실을 판매해 개들에게 독가스를 실험할 수 있게 했다. 심지어 실험용 개들조차 독일이 보낸 것이었다. 새롭게 통일된 독일은 무기 수출 스캔들을 들춰내는 문제에 있어 이처럼 오만하고 비도덕적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독일인들은 너무나 자주 사적인 도덕과 공적인 도덕을 구분한다. 서독 정부가 독일 기업들이 이라크의 독가스 공장 건설을 정말 도왔는지 조사해보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조사가 착수하기까지는 거의 7년이 걸렸다.
“독일 문제”는 해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되풀이되는 유산이다. 우리는 “누구도 독일인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어왔지만, 귄터 그라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다시 하나로 뭉쳐, 조용히 말하려 할 때조차도 강하고 분명하게 목소리를 낼 것이다.” 독일 의회에서는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가 과거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놔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그 결과 독일 정부는 나치 치하 강제 징용에 대한 피해 보상 법안조차 통과시키지 못했고, 수천 명의 피해자들이 지금도 가난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녹색당과 사회민주당은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 기금을 조성할 것을 요구했지만, 정부 자문단은 이 문제에 대해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에서는 러시아계 유대인의 이민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녹색당이 의회 토론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정부는 일부 유대인의 입국을 허용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지만, 그것이 언제 어떻게 시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재 러시아계 유대인은 독일 입국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독일에 보호를 요청하는 모든 유대인 남성, 여성, 어린이는 이곳에 올 권리를 갖고 있다. 우리 독일인들은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8에서 살아남은 러시아계 유대인들을 어떤 식으로든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독일에서 러시아계 유대인에 반대하는 주장들─독일은 이민 국가가 아니다, 러시아계 유대인을 받아들이면 독일 전역에 반유대주의가 더욱 확산될 것이다, 독일이 러시아계 유대인을 받아들이면 이스라엘이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등등─이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파시스트였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의 동독이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도덕적‧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구 동독 집권당의 막대한 자금이 에리히 호네커와 그의 측근들의 주머니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호네커 정권의 희생자들에 대한 재정적 보상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고작 3주간 재교육을 받은 전 동독 국가 변호사 800명과 판사 1,000명이 독일 정부로 고스란히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관료들의 개인 기록이 법적으로 말소되어, 이들 변호사와 판사들의 과거 경력을 추적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는 히틀러가 몰락하고 나서 나치의 산업, 사법, 안보에 연루되었던 주요 인물들이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대접을 받았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구 공산 정권의 지도자 중 일부는 현재 수감 중이거나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에리히 호네커는 포츠담 인근 군 병원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으며, 전 국가보위부 수장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은 교도소 병원에 수감되어 있다. 하지만 정치국(Politbüro)을 비롯해 그 정권을 지지하고 그 정권의 일원이었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호화 별장에 앉아서 호네커를 손가락질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불법적으로 축적한 재산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슈타지 파일에는 200만 명의 서독인들을 포함해 600만 명의 재정 문제, 성생활, 기타 개인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다. 많은 동독인들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파일을 보고 싶어 한다. 친구나 이웃이 자신을 배신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우정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내가 인기가 있었던 것은 단지 부품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내 이웃은 국가보위부의 공범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나를 공범으로 의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고통스러운 질문이 생기는 일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동독과 서독 사이에는 강력한 심리적 장벽, 즉 마음의 베를린 장벽이 존재하며, 이 분리는 한 세대 이상,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될지도 모른다. 많은 서독 정치인들이 두 독일을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독은 번영을 누렸던 반면, 동독은 나치 정권에서 공산주의 국가까지 57년간 전체주의 독재가 계속 이어지는 상태에서 살았다. 많은 동독인들은 이제 그들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 하며, 이것은 그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다. 부동산, 임대료, 사회 복지 혜택 삭감, 실업 등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많은 이들이 속거나 손해를 보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불신이 팽배해 있다. 1989년 혁명 이후 생활 여건이 너무 극적으로 변해서 그 영향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컸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치솟는 실업률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들은 여성, 미혼모, 노인, 장애인, 그리고 사회 최하위 계층의 노동자들이다. 반면에 전직 공산당원들로 구성된 고위 관리직들은 사무실 의자에 딱 붙어 앉아 있다. 한 노동자는 “호네커 치하에서 사회주의를 위해 싸웠다고 주장한 이들 중 몇몇이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탄했다.

사진출처: Roman Verton
40년간의 공산주의 체제가 남긴 피해를 복구하는 데는 수년이 걸릴 것이다. 구 동독은 분명히 변화하겠지만, 나는 서독 또한 그 과정에서 변화해 더욱 겸손해지고 배우려는 자세를 갖기를 바란다. 동독은 파산 상태이다. 8천여 개의 낡은 기업 대부분이 붕괴 직전이며, 실업률은 25%에 육박한다. 공장과 설비시설의 건설 혹은 보강, 도로 건설, 통신망 구축, 산업 오염의 정화 등에 드는 비용은 4,5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향후 10년간 최대 7,750억 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재건은 생태적으로 건전하거나 분산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서구에서 통상 이뤄지는 강경한[경성] 자본주의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서독의 원자력 발전 로비는 부드러운[연성] 에너지 체계로 개발하는 대신에, 마치 체르노빌과 스리마일섬 사고가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동독의 학교 교육 체계 또한 혼란에 빠져 있다. 많은 학교 교장들이 ‘친공산주의적 열정만이 유일한 재능’이라고 간주한 탓에 해고되었지만, 적합한 후임자가 부족해 그중 절반이 재고용되었다. 지난 50년간의 독일 역사는 이제 세 번째로 재작성되고 재평가되어야 한다. 요제프 괴벨스의 나치 시대에 뒤이은 25년 후, 그의 옛 제자였던 마고트 호네커(Margot Honecker)9가 교육부 장관으로서 동독 어린이들의 마음에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심을 것을 교사들에게 요구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역사는 이제 다시 쓰여야 하고, 역사책은 다시 한번 수정되어야 한다. 한 학생은 많은 이들이 느끼는 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 나라가 최고이고 가장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모든 게 틀렸다고 말합니다.” 1990년 5월 베를린에서 열린 동독 작가 회의에서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는 그녀 자신의 생애가 송두리째 빼앗긴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40년 넘게 받아들였던 정체성을 빼앗았다면, 그 자리에 의미 있는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과 정체성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간단히 말해, 독일 통일의 과정은 재앙으로 판명되고 있다. 과거의 유산, 공산주의의 폐해, 그리고 서방의 착취적인 기회주의는 구 동독 지역의 사회적 권위, 경제, 그리고 도덕적 기준의 붕괴를 낳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익 극단주의자들이 옹호하는 포퓰리즘 이데올로기가 번성하기에 위험한 토양이 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독일의 과거에서 드러난 부정적 잠재력을 그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은 옳았다.
통일로 인해 나타난 위험들은 국내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국제 정책으로도 넓혀진다. 나는 통일된 독일이 걱정되는데, 그들은 국내외에서 새롭게 얻은 힘을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다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금융과 차관, 그리고 다른 더욱 은밀한 압력과 영향력 행사를 통해 동유럽이 독일화될 것 같아 두렵다. 군사력의 위협에 의존하지 않고 유럽에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작은 가능성은 아직 있다. 하지만 막대한 군사 기반 시설과 엄청난 양의 무기가 여전히 남아있으며, 또한 콜 총리는 유럽 공동체에는 서유럽 국가들이 확립한 노선을 따라 강력한 군사, 경제, 정치 연합을 구축하길 원하는 국가들만 가입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신호들을 고려할 때, 유럽이 변화할 가능성은 적다.
독립적인 시민 운동의 영향력은 약해졌고, 그들이 꿈꿨던 시민 사회에 대한 비전 또한 퇴색했다. 옌스 라이히(Jens Reich)는 많은 이들의 생각을 대변하여 “우리는 21세기의 정치 문화를 발전시키길 원한다”고 말했다. 원탁회의와 시민단체들은 시민 사회와 직접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닦으려고 의도된 사회적 자기조직화 형태였다. 독일의 가을 혁명은 정당만이 사회를 대표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당을 초월하는 가치들을 드러냈으며, 대중의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성취했다. 그러나 서독 정부는 동독 국민들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가는 데 자신들의 고유한 경험, 이념, 그리고 자극을 가져올 기회나 시간을 거의 주지 않았다. 혁명은 너무 빨리 끝났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독일을 함께 형성하기 위한 노력의 토대이자 표현으로서 철저한 공개 토론, 급진 민주주의의 절차, 그리고 새로운 헌법이 필요하다. 우리는 더욱 광범위한 생태적‧민주적‧사회적 권리를 헌법에 포함시키고, 핵무기와 무기 수출을 포기할 것을 선언해야 한다. 새로운 독일 헌법에 약간의 자제력이 담긴다면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제2의 천년의 끝에서 독일은 평화, 인간 존엄성, 정의, 그리고 세계적 연대가 있는 나라로 변신할 기회를 맞았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독일이 되리라는 우리의 희망은 혁명을 이끌었던 독립적인 시민권 운동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반체제 인사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시민 사회를 건설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1989년 가을의 저 날들로부터 비폭력 사회 변혁의 가능성과 그에 대한 위협에 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다.
독재자 에리히 호네커가 국가 원수직에서 강제 사임된 직후인 1989년 10월 18일부터 12월 7일까지 호네커의 추천으로 동독의 새 통일사회당 중앙 위원회 서기장에 오른 인물─옮긴이 ↩
냉전 당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분단하던 베를린 장벽의 가장 유명한 검문소 이름─옮긴이 ↩
당시 동독의 시민운동 단체들인 ‘신 포룸(Neues Forum)’, ‘데모크라티 옛츠(Demokratie Jetzt)’ 등이 연합한 연대체로, 새로운 ‘동독 헌법 초안(Verfassungsentwurf)’을 마련하고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 총선에 출마했지만 서독 체제로의 흡수와 화폐 통합을 공약으로 내건 보수 연합에 패배해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는 데에는 실패했다─옮긴이 ↩
독일 사민당을 대표해 1969-1974년 동안 서독 총리를 역임했던 인물─옮긴이 ↩
1971년 5월부터 1989년 10월 18일까지 장기집권을 했던 동독의 독재자─옮긴이 ↩
Buntesdeutschland: Ansichten zu einer multikulturellen Gesellschaft, Editor Heiner Boehncke, Harald Wittich, Rowohlt Taschenbuchverlag, 1991. ↩
Nuclear Fuel, March 6, 1989 (U.S.A.). ↩
나치 독일이 2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 거주하던 600만 명의 유대인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세운 반인륜적 학살 계획─옮긴이 ↩
에리히 호네커의 아내로 1963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의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 강력한 스탈린주의를 교육정책으로 밀어붙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옮긴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