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출간] 가장자리, 소수자, 문제제기의 지혜

신간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출간을 기념하며, 책의 머리말인 [들어가며]를 소개합니다. 고(故) 신승철 선생님의 기획에서 출발한 이 책은 조합원들의 공동 사유와 실천을 모아 기후위기와 고립의 시대에 필요한 생태적 지혜를 공유지·연결망·정동의 세 층위로 담아낸 집단 프로젝트입니다. 생명과 연대, 공생의 가치를 전하는 이 원고가 답답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혜의 지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2년 8월 18일 발간된 《이코노미스트》표지.
“미생물이 인간을 만든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2012년 8월호 표지는 한 시대의 끝을 알렸습니다. “미생물이 인간을 만든다(Microbes Maketh Man)”라는 대담한 제목 아래에는 형광색 미생물로 이루어진 알록달록한 인체 비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인간이 외부와 독립된 단일한 주체라는 믿음에 아름답게 종말을 고한 이 표지를 지리학자 제이미 로리머(Jamie Lorimer)와 티모시 호젯(Timothy Hodgetts)은 ‘인간 너머의 조건’이 도래했음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장면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사람의 몸 자체가 생명들이 얽히고설킨 채 살아가는 공동 주거의 장소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간과 자연을 엄격히 분리하거나 인간을 만물의 중심에 두는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 너머로 나아갈 계기가 마침내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체 비례도의 다채로운 색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일조차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부담스러운 시대입니다.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여섯 사람 중 하나가 혼자 살고 있으며 청년 스무 명 중 한 명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고립·은둔자입니다. 24시간 접속할 수 있는 미디어가 늘 곁에 있고, 도시에서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 음식과 물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살아남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로 인해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있으며, 관계는 성숙하게 무르익기보다 감정의 교류 없이 잠시 이어지다 금세 사라집니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공동체는 이미 지나가 버린 낡은 유물이나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기획자들은 기업가가 아닌 개인도 각자의 삶을 하나의 사업으로 다루도록 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경제인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부동산, 주식, 코인, 인맥, 기술 등을 보유한 ‘1인 기업’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 소유물을 발판 삼아 다시금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합니다. 축적할 수 있는 이윤을 내느냐 내지 못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이처럼 소득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방식이 되면서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는 사랑과 연대보다는 제한된 부를 두고 싸우는 적자생존의 경쟁이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협력과 우애의 언어는 뒷전으로 밀리고 그 자리를 효율과 성과의 언어가 차지합니다. 다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나 사회적 소수자들은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로 낙인찍히고, 심지어 소수자 자신마저도 그러한 낙인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실정입니다. 동일한 리듬, 동일한 생각이 지배하면서 어느 도시를 방문하더라도 차이는 사라지고 똑같은 상품과 똑같은 거리 풍경이 이어집니다.

언제부터 이런 장면이 당연해진 걸까요? 아이들이 건물주를 꿈꾸고 사람들의 꿈이 부자가 되는 것으로 고정된 세계, 그렇게 상상계마저 상품과 이윤과 자본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세상 말고 차이와 생명, 연대가 중시되는 삶을 펼칠 수는 없는 걸까요? 이 같은 열망을 갖고 주변과 가장자리에 주목하면서 생명체들과 함께 어우러지기 위해 발휘되는 지혜가 바로 생태적 지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장자리는 밀려난 이들의 하치장일 뿐일까요? 소수자는 공동체의 방해꾼이자 추방해야 할 존재일까요? 생태적 지혜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가장자리는 오히려 생명과 다름이 창발하는 곳이며, 소수자야말로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고 공동체 구성원들을 강건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생태적 지혜는 이윤보다 생명을, 경쟁보다 협동을, 적자생존보다 공생을 우선시하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무수한 형태의 비인간들이 함께 살고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세계를 위한 앎이자 그런 세계를 만들어 가는 행위입니다.

공동체를 사랑했던 한 철학자의 기획을 이어받으며

2019년 6월,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창립 총회. 사진제공: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이하 연구소)은 이처럼 따뜻한 눈빛을 보내며 빙긋 웃는 사유인 생태적 지혜를 사랑하며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2018년 여름, 무려 34일간 계속되며 최고 기온 41℃를 기록한 폭염에서 ‘기후위기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이들이 모여 씨앗 조직을 만들었고, 이듬해 6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지혜와 정동을 연구하고 그것을 글로 나누고자 연구소가 출범했습니다. 11명이 소박하게 시작한 이 모임은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 활동가, 예술가, 종교인, 주부, 교사, 학생 들이 하나둘 함께하면서, 2026년 현재 약 170여 명의 조합원이 활동하는 꽤 큰 규모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2023년 작고하기까지 연구소의 이사장과 소장을 겸임했던 고(故) 신승철 선생님의 기획에서 출발했습니다. 15년 동안 마흔 권이 넘는 책을 출판하고 수많은 논문과 연구 보고서, 기획서를 세상에 내놓았던 신승철 선생님은 크고 작은 모임을 조직하면서도, 조합원들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독려했습니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천 명이 넘는 이들의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고, 영면에 들기 전 몇 달 내에 연락을 주고받은 이들만 해도 수백 명에 달했습니다. 선생님의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후, 그를 추억하고자 모인 조합원들은 그의 전략이 마치 다단계 사업과 같았다는 농담 섞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제안(쪽글을 쓰거나 세미나 모임에 참여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그다음 조금 더 어려운 제안(칼럼을 쓰거나 짧은 글을 번역하거나 행사를 조직하고 홍보하는 일)을 하고 또 그 다음의 일들을 제안(책의 공동 저자가 되거나 세미나 모임을 주관하거나 큰 행사를 기획하는 일)하는 식으로 책임과 부담의 정도를 높여 갔다 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 제안받은 사람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어느새 주변인에게 연구소를 소개하고 권유하게 하는 등 ‘헤어 나올 수 없는 늪’ 같았다고 했습니다. 모두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마음을 쏟은 것인지 이야기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생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1년이 지나 조합원들이 꾸린 1주기 추모 축제(‘추모 축제’라 이름 붙인 것은 늘 증오보다 사랑을, 슬픔보다 기쁨을 노래했던 신승철 선생님의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에서, 이 책이 태동했습니다. 신승철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며 그와 조합원들의 글을 다수 출판했던 알렙출판사의 조영남 대표가 ‘신승철 소장이 특이하게 즐겨 썼던 개념어들을 모아 『신승철 개념어 사전』을 펴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나 생태주의자들이 자주 쓰는 개념어를 설명하고 우리의 생태적 현실에 맞게 변경해서 사전으로 묶고자 했던 신승철 선생님의 뜻이자, 동시에 그가 하던 천 가지 공상 중 하나였던 기획을 다시금 되살려 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그렇게 ‘신승철 개념어 사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면 신승철 선생님 본인이 먼저 강하게 반대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글이 오로지 자기만의 것일 수 없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유들은 수많은 세미나와 읽기 모임, 서로배움터 강좌, 행사 뒤풀이 그리고 일상에서 오간 대화에서 구성된 사이주체성의 산물이라고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리고 완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거듭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적 개념들을 한 명의 인격체인 신승철의 성취로 드러내기보다, 공동체의 관계 망과 사회적 공유재로서 표현하는 것이 그의 뜻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출판을 위한 집단 프로젝트가 2025년 4월 22일 시작 되었고, 꼬박 1년이 지나 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쳐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기획,『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알렙, 2026)

이 책은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창립선언문’(2019)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생태적 지혜를 공유지, 연결망, 정동이라는 상호 의존적인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1부 ‘공유지의 지혜’에서는 우리의 생활과 사회를 울타리 친 소유지가 아니라 지혜가 발아하는 공유지로 가꾸기 위해 각 저자가 실천하고 상상하고 있는 아이디어와 대안 모델을 제안합니다. 2부 ‘연결망의 지혜’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과, 그리고 자연과 사물 같은 무수한 비인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규명하고 그 연결의 형상과 윤리, 끊어진 연결과 복원의 방법까지 폭넓게 탐구합니다. 3부 ‘정동의 지혜’는 공동체의 자원과 활력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인 정동과 욕망을 다룹니다. 이 역동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고정된 정체성에서 탈주케 하고, 일상의 배치를 바꾸게 하며, 마침내 거대한 문명 전환인 떡갈나무 혁명까지 이뤄 내는지 소개합니다.

우리는 이 책이 이유 없이 답답하고 막막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생성과 탈주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가 되어 주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기력, 기후불안, 생태슬픔에 좌절하게 될 때, 읽는 이를 든든히 받쳐 주는 지혜의 그물이자 치유와 회복의 선물이 되길 바랍니다. 이 책의 모든 개념은 정답을 규정하는 아카데미적 지식이 아니기에, 세미나와 읽기 모임에서 하나의 개념에 저마다의 경험과 언어를 더하며 풍성한 대화를 만들어내는 도구로 사용해 보시길 권합니다. 또한 읽는 이만의 고유한 맥락을 개념의 여백에 써 내려가며, 완결된 진리가 아닌 과정적 기록으로서 이 책의 의미를 이어가 주시길 청합니다. 배우고, 돌보고, 활동하고, 일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이 일상 속 미시정치와 분자혁명의 아이디어가 되고, 길 잃은 운동의 방향성을 재정립하게 하는 참조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이를 대표해 이 책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우선, 어설픈 제안과 서투른 과정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지혜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뜻에 공감하며 흔쾌히 저자로 참여해 주신 연구소 조합원들께 감사드립니다. 빛나는 원고와 함께 보내 주신 응원과 격려는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나아오게 한 힘이었습니다. 평소 연구소 활동을 물심양면 지원해 주는 지지자이자 함께 생태 문명을 만들어 가는 동료로서 추천사를 보내주신 한윤정, 손은정, 김찬휘 님께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이 책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선뜻 후원을 결심해 주신 텀블벅 후원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편집자인 알렙 출판사 조영남 대표와 오병현 편집자가 아니었다면 이 책을 시작할 수도 완성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래 잠들어 있던 기획을 꺼내어 제안해 주시고, 인내와 섬세함으로 책을 만들어주신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조해민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는 마음으로 다종도시를 그려나가는
생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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