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오공과 정동의 손바닥

플랫폼 자본주의가 장악한 인류문명의 미래는 존재하는가? 인류는 우주식민 건설을 통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가? 미래에 대한 약속 없이도 지구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본원적인 정동의 흐름에 대해 고찰해 본다.

자본주의는 결국 정동자본주의

정동자본주의로서의 현대의 경제는 비물질재가 수익 창출의 핵심 원천이 되는 자본주의이다. 그래서 현대자본주의는 정보경제와 플랫폼경제의 특징이 강조된다. 이것은 물질문명이 사라지고 정신적인 면이 강조된다는 것보다는, 물질재가 정보의 흐름에 복속되어 통합되고 조절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동 자본주의의 본질을 되짚어 보면 자본주의는 언제나 정동자본주의였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전 세대의 물질재 중심의 경제에서도 모든 물질이 언제나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질재가 수익창출의 원천일 때에도 사용가치나 교환가치와 같은 물질이 가진 비물질적 정동성이 수익 창출의 핵심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언제나 정동자본주의였지만 이제야 우리는 이전세대에 물질이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가치가 물질의 정동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노동가치론을 통해 물질자원(물질적 정동)에 노동의 가치를 더한 것이 교환가치가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희귀한 금속이 흔한 금속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사회적 평균 필요노동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물론 노동가치론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수요 공급에 의한 가상적 기준점이 가치의 척도였다는 믿음이 있었겠지만 두 이론이 모두 보지 못한 점은, 오직 인간의 노동, 인간의 필요가 정동과 가치의 원천이라는 전제 때문에 간과한 자연의 ‘본태적인 정동성’이다. 정동이란 인간의 필요, 욕망, 의도와 관련된 가치나 행위의 방향으로 정의되지만 정동이 정신이나 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동’은 일상적인 의미의 ‘감정’을 뜻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것을 규정하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스피노자로부터 온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몸을 정동하고(affecting) 정동되는(beingafected) 능력의 관점에서 말합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별개의 능력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항상 같이 나옵니다. 내가 무엇인가에 영향을 주게 되면, 동시에 나는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그걸 경우 나는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변화(이행)을 겪게 됩니다.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죠. 능력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동은 바로 이러한 문턱의 이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브라이언 마수미 저, 『정동정치』 p27.

자연이 가진 본태적인 정동성, 정동의 연기론

문명이 슬기롭게 ‘오래도록’ 정동 속에 존재하는 방법은 스스로 자연계의 정동 속에 존재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by Pixabay 출처: www.pexels.com/ko-kr/photo/355288/
문명이 슬기롭게 ‘오래도록’ 정동 속에 존재하는 방법은 스스로 자연계의 정동 속에 존재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정동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적 주체가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무엇과 영향을 주고받는 다는 것은 언제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만은 아니다.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지적 체계와의 관계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노동에 대한 이해에서 물질재와 이미 존재하는 비물질재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결합되어 새로운 상품이 생산된다고 이해된다. 이를 물질과 정동의 결합이 정동을 생산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동은 정동하는 것만이 아니고 정동되어지는 관계라는 스피노자의 통찰을 기반으로 정동의 중심에선 주체를 중심으로 양방향의 정동성이 모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추론에 따르면 인간의 가치를 넘어서 자연의 방향으로의 정동도 존재한다. 아니 자연과 인간의 방향 그리고 인간에서 문명과 사회의 방향으로 모두 정동되어 지고 정동한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좀 더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정동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본태적인 정동성”이란 자연으로 인간을 거쳐 문명과 사회로 이어지는 물질과 비물질재 모두를 총괄하는 사건의 흐름일 뿐이다. 에너지와 물질이 서로 변동 가능하듯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해 보존되며 움직이는 정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정동을 이용하여 의미를 생산하고 필요를 충족하는 것은 인간의 가상 체계 코드이고 코드의 추상적 반대 개념이 물질(물자체)인 것이다.

더불어 물질이라는 개념은 정신만큼이나 추상적이다. 개념적으로 물질도 코드도 완벽한 개념과 체계를 지니고 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에서 완벽한 개념과 체계는 실존하지 않는다. 오직 정동만이 존재할 뿐이고 정동을 포괄하는 좌표와 정지된 시간 하에 추상적 개념으로 정동을 담지 하는 물질이 정의될 뿐이다. 그러나 물질은 언제나 정동적이고 오직 변화하고 운동하는 분자와 입자 그리고 변동하는 에너지가 존재할 뿐이다. 이는 절대정신의 운동이나 기계적인 유물론의 변하지 않는 단자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원이나 정의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라는 특이성에 의해 혹은 자본주의라는 단층에 의해 분리되는 사고가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문명까지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연결되어진 본원적인 정동성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부르자면 “정동의 연기론”이라 할 수 있겠다.

“정동의 연기론”적인 접근은 현대의 정동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에도 새로운 시사점을 준다. 우리는 비물질노동과 비물질적 정동 뒤에 숨어있는 정동성을 바로 보아야 한다. 비물질적 노동은 언제나 물질적 정동을 수반하여 움직일 뿐이다. 정보, 지식, 창의성, 혁신 같은 비물질적 노동들은 일견 물질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비물질적 정동의 움직임에는 언제나 많은 에너지와, 네트워킹을 동반한다. 인간의 정신노동은 다양한 역사적 지식 축적과 네트워킹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결정들은 언제나 물질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많은 행동의 결과들을 낳는다.

자본주의적 정동은 무엇을 소비하는가?

패스트패션의 예를 들어보자. 이 사업의 핵심은 의류라는 물질보다 디자인의 대량생산과 판매와 연관 된다. 다중에 의해 선택되는 디자인의 대량생산과 판매로 기업은 이윤을 얻는다. 하지만 폐기되거나 이월된 디자인에는 엄청난 정동들이 폐기되어진다. 다품종 소량생산, 혹은 유행주기가 짧은 제품의 한시적 생산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역동성이 강조되지만, 그 이면에는 더 많은 물질적 정동이 숨어서 움직이고 있다. 혹은 게임 산업의 예를 들어보면 대규모 동시접속게임 대작을 만들기 위해 협업하는 대규모의 네트워킹은 많은 프로그래머들 혹은 관련 디자이너들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그에 사용되는 제작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물질적 정동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막상 그 게임에 수많은 사람이 접속하여 시간을 보낼 때 비물질적 소비는 개인의 육체를 많은 시간 동안 콘텐츠에 묶어 놓는다. 그리고 그 매개로 쓰이는 스마트 기기나 컴퓨터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에너지 생산은 화석연료의 연소 혹은 핵발전이라는 물질적 정동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인간 존재는 시간을 보내야 하고 그 시간 많은 물질적 정동과 비물질적 정동과 교차하며 정동되어지고 정동한다. 그런데 현대의 비물질적 정동의 발전은 인간의 존재를 더 많은 네트워킹에 관계시키고 한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당 에너지 소비량은 점점 더 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인구의 증가율보다 더 높은 에너지 소비 증가율이 존재할 것이고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더 늘었을 것이다. 특히나 부유한 국가의 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에너지의 소비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정보화 사회가 에너지 소비의 감소를 불러오진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윤창출에서 비물질적 정동의 역할이 증가할 뿐 물질적 정동의 소비량이나 비물질적 정동에 의해 유지되는 에너지 소비량을 줄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관여하지 않는 인공지능도 에너지 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데이터와 서버의 유지를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바 순수한 비물질적 정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터는 물질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순수한 정신적 개념이나 독창적인 기술적 개념조차 언제나 더 먼저 존재했던 개념에 기대고 있으며,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네트워크의 유지는 실체와 물질-에너지의 소비를 전제한다. 정보란 일정정도의 질서를 요구하지만 자연계의 모든 존재는 무질서를 향해 간다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활자화된 지식도, 구전의 지식도, 디지털화된 정보도 언제나 복제와 재해석 정돈을 필요로 하며 유지를 위해서도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 못한 정보는 자연 속으로 풍화되어 사라질 뿐이다. 결국 순수한 정신으로 여겨지는 정보도 물질도 정동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물질/정보의 인간의 노동은 언제나 본태적 정동을 변용하고 거기에 인간 존재의 정동을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본태적 정동’은 가치의 개념이 없다. 가치란 본래 영향을 주고받는 공통적인 관계로서 존재하는 정동을 구획하고 소유를 나눈 개념일 뿐이다.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인클로저를 통해 토지와 공유물을 사유화하고 자본화 했듯, 인간은 자연의 정동성을 이해와 노동이라는 이름을 통해 가치로 전화한 것이다. 가치의 근원은 정동이고 정동은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지지 않는 서로 정동하고 정동되어지는 사건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굳이 가치의 주체 주인을 따지자면 모든 것은 원래 모든 것의 소유일 뿐이다. 그래서 정동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편집증적인 정동운동은 본원적인 정동운동과는 다른 흐름을 만들어낸다. 자연이 흐르는 강을 막아 강의 흐름을 착취하고 코드화해서 고도의 정동적 집중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창조라 믿었던 정동적 집중은 원래 엔트로피 증가의 자연적 흐름과는 다른, 만들어서 자연적으로는 분해되지 않는 쓰레기의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완전하지 못하고 가상적이고 찰나적인 흐름일 뿐이다. 정동에는 시간이 없고 자연계에서 유일한 흐름은 엔트로피 증가의 경향으로 움직이는 흐름일 뿐이다.

자연의 속도에 발맞추어 가는 정동

시간을 발명해낸 인간의 관념 속에서 문명은 창조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구적 관점에서 문명은 정동적 흐름 속에 존재한다. 지구 온난화와 자연재해는 지구의 입장에서는 본래적인 정동의 흐름일 뿐이다.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인류가 만든 코드의 체계인 문명의 체계가 위험할 뿐이다. 수많은 다른 생물계의 정동을 착취하고 이용하여 이룩한 문명의 체계일지라도 정동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과학과 문명은 과학과 해석을 바탕으로 한 희망의 신화이다. 화학이라는 말로 연금술이 대체되기까지 연금술은 오랜 동안 지배적인 해석 체계였다. 과학이라는 말이 신성과 연금술의 문명을 무너트리기 까지 오랫동안 인류는 신성과 연금술로 세상을 해석해 왔다. 연금술이 제시한 황금이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의 파라다이스를 이룩한 것은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기술발전과 제국주의로 인한 정동의 초과 착취이다. 하지만 정동의 집중은 한계에 도달했고 지구의 온난화와 환경오염의 신호는 더 이상 이런 발전을 계속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문명은 지구라는 공간을 탈출해 화성이나 더 먼 우주의 식민지 건설을 통해 문명의 확장을 계속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지구 탈출과 외계 문명건설은 허구적인 종교일 뿐이다. 그리고 지구의 정동을 벗어난다 할지라도 태양계의 정동, 우주의 정동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여전히 정동 속에 존재할 뿐이다.

문명이 슬기롭게 ‘오래도록’ 정동 속에 존재하는 방법은 스스로 자연계의 정동 속에 존재하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자연계의 속도와 발맞추어 가는 정동. 무위자연의 깨달음은 반문명주의가 아니라 오로지 문명을 위한 일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언어는 축의 시대의 깨달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돌에서 깨어난 돌 원숭이 손오공은 본래의 능력에 도술이라는 기술을 더해 화과산의 지배자에서 남섬부주의 패권자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산과 바다 하늘의 어떤 존재도 그에게 대적할 수 없었으며 그의 과도한 능력은 다른 존재들의 평화를 위협했지만 어떤 지배구조나 군대나 기술로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 다른 존재들에게 큰 위협과 혼란을 빠트린 그를 깨닫게 한 것은 관음보살의 손바닥이다.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천변만화의 도술을 부려도 벗어날 수 없었던 관세음보살의 손바닥은 거대한 힘이나 더 뛰어난 기술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 내의 존재이며 세계와 연결될 존재라는 깨달음의 힘이다. 관음보살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우리는 정동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문명을 무겁게 덮쳐오는 정동의 오행산에 갇혀 지구 위의 멸망한 문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혹은 소멸되거나.

오민우

문학회 출신의 약사다. 비건이면서 요가철학을 공부하고 지역품앗이한밭레츠 대표를 맡고 있다. 욕망에 휩쓸리고 화를 내기도 하고 깨달음을 추구하기도 하는 에고를 관찰하는 취미가 있다. 그걸 글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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