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장] ⑮ 이장 해방 일지

이장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나는 짬이 생기면 카메라를 챙겨 곶자왈로 숨어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새들은 엉망이던 내 마음과 생각을 가지런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했다. 숲에서 멍 때리며 새들을 보고 기다리는 시간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이 찾아왔다.

얼음을 넣은 보냉병에 음료를 담고, 부엌 선반에 아내가 숨겨놓은 간식들도 살뜰히 찾아 챙긴다. 달콤한 초콜릿 과자면 더 좋지만, 텃밭에서 수확한 방울토마토나 먹다 남은 수박도 괜찮다. 무더운 날씨지만 긴 옷을 껴입고 챙이 넓은 모자와 장갑까지 낀 채 큰 가방을 메고 인적이 드문 마을숲으로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기어들어간다. 70-80년대 험한 시절이었다면 간첩으로 신고되기 딱 좋은 모양새다.

요즘 MZ세대들에게 다시 유행되고 있는 MBTI(성격유형검사)중 타고난 I유형(내향형)의 대표적 인간형인 나는 사람들과 만날라치면 이틀 전부터 에너지가 소모된다. 전화로 누군가와 즉시 연결되기 싫어서 핸드폰 사용을 고민한 적도 있었는데, 2년 차 이장에게는 다양한 사람들이 무수한 일로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한다. 주어진 일은 혼자서 요모조모 고민하며 처리하는 게 참 좋은데, 난 아이(I)형 인간인데, 왜 자꾸 만나야 할 사람은 많아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지고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걸까?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을 막으려면 사업을 반대하는 주체인 마을회의 반대입장이 중요했고, 총회를 뒤집고 사업찬성으로 돌아선 그분만 아니었어도 이 맞지 않는 어색한 옷은 입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런 성격에 선출직으로 마을이장이 되었다니 잠들기 전 헛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성격에 맞지 않은 일은 역시 스트레스를 동반했다. 평소 걸어서 산책하던 마을길에서 주민들을 만날까 봐 일부러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하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걸려오는 민원 전화 때문인지, 모르는 전화번호만 핸드폰에 떠도 가슴이 슬렁 내려앉는다. 정도와 상황의 차이는 있겠지만 요즘 회의에서 뵙는 대부분의 이장들도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하다.

곶자왈에서 써 내려간 해방일지

이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나는 짬이 생기면 카메라를 챙겨 곶자왈로 숨어 들어간다.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 운동을 하면서 ‘멸종위기 야생동물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업자의 엉터리 환경영향평가보고서를 반박하기 위해 3년 전에 울며 겨자먹기로 들어섰던 곶자왈인데, 그곳에서 만난 새들은 엉망이던 내 마음과 생각을 가지런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했다. 숲에서 멍 때리며 새들을 보고 기다리는 시간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이 찾아왔다.

탐조를 하다가 잠깐 휴식을 취하는 중. ⓒ이상영
탐조를 하다가 잠깐 휴식을 취하는 중. ⓒ이상영

이러한 평화로움(?)이 진드기에 물린 가려움과, 가끔 발 밑에서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낼름거리는 쇠살모사의 무서움까지도 한방에 날려버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숲에서 조용히 새들을 기다리며 가끔 새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의 해방일지를 써내려간다.

삼년 내리 멍을 때렸더니 결과물이 차곡차곡 쌓였다. 부인님께 오랫동안 읍소해 마련한 망원렌즈와 중고카메라는, 세계적으로는 보호받는 멸종위기종이지만 마을 곶자왈엔 흔하디 흔한 곶자왈의 새들을 찰칼찰칵 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공무원 이력 20년 동안 장착한 눈감고도 공문을 쓸 수 있는 신공을 발휘해 그럴듯한 보고서를 만들어 영산강유역환경청에 첨부해 민원을 제기했더니 해당 지역 생태조사를 진행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 보고서는 그해 국정감사에서도 강은미, 이은주 국회의원이 환경영향평가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일조했고, JTBC 뉴스 자료화면에도 사진과 동영상이 사용되어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의 문제점을 전국에 알리기도 했다. 엣헴!

무더위도 못 이기는 7월의 탐조생활

긴꼬리와 파란 눈테를 가진 긴꼬리딱새 수컷. ⓒ이상영
긴꼬리와 파란 눈테를 가진 긴꼬리딱새 수컷. ⓒ이상영

7월, 덥디 더운 날씨지만 아름다운 긴꼬리딱새를 가장 많이 관찰할 수 있는 시기라서 탐조를 멈출 수 없다. 긴꼬리딱새 수컷은 40cm나 되는 긴꼬리를 뽐내는 데다가, 선명한 코발트빛 부리와 파란 안경테를 쓰고 있어 처음 본 사람도 누구나 그 매력에 퐁당 빠질 수밖에 없다.

특히 곶자왈 계곡 곳곳에 장맛비가 만든 물웅덩이들은 새들의 워터파크가 된다. 눈치 백단인 새들을 속이기 위해 녀석들보다 더 철저하게 위장하고 숨죽이며 기다리다 보면 여름 무더위에 지쳐 하나 둘씩 모여든 새들이 물놀이 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다.

재미있는 건 대부분의 새들이 물가에 조심스레 내려앉아 날개를 적시는 것과 달리, 긴꼬리딱새는 1미터 정도 높이의 나뭇가지에서 아래에 있는 물웅덩이로 곧장 다이빙한다.

느린 화면으로 재생해 보면 정면으로 날아오다 물에 닿기 전에 순간 배를 뒤집어 다이빙한 후 곧바로 날아간다. 다이빙 순간에 수컷 긴꼬리딱새의 꼬리가 휘날리는 모습은 환상적이다. 올림픽 다이빙 종목에 출전만 할 수 있다면 금메달을 따놓은 당상일 텐데.

마을 숲에서 여름철에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흔한 새라고 착각하지 마시라. 이 친구들은 개체수가 적어 환경부가 멸종위기야생생물 2급과 적색목록 취약종(VU)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준위협종(NT)으로 지정한 국제보호종 조류다.

조금의 인내를 가지면 이런 친구를 만날 수 있는 마을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곳인가?

이 글은 『제주투데이』 2022년 8월 13일 자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이상영

20년 가까이 중고등학교에서 지리(사회)를 가르치다, 2018년 한라산 중산간 선흘2리로 이주한 초보 제주인. 2019년 초 학부모들과 함께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으로 선출된 후, 2021년 어쩌다 이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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