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수행일기] ② 아르헨티나 할머니

차 한 잔 마시며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읽는 시간. 탈성장과 불교, 돌봄과 환대에 대해 생각한다.

한동안 일과 관련된 사회과학서적들만 읽었더니 마음을 보드랍게 해줄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한때 좋아서 헌책방에서 보이는 대로 샀던 요시모토 바나나가 떠오른다. 날카로워진 마음을 다시 따뜻하고 말랑하게 어루만져주고 싶을 땐 역시 그의 책이지. 구석에서 오래 방치되었던 책은 적당히 낡고, 먼지가 끼어 있다. 소설 속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집에서 나올 법하다.

차 한 잔 마시며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읽는 시간. 사진제공 : 벌똥
차 한 잔 마시며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읽는 시간. 사진제공 : 벌똥

바나나처럼 보드랍고도 먹고 나면 속까지 든든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본다. 조금은 서글픈 환상의 세계로. 바나나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자주 보이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세상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어딘가에 좀 맞춰 들어가지 못하고
인생이 나에게 멀어져 가는 것 같다고 (느끼는)

그녀의 인터뷰를 빌리자면 바로 이런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이다. 삶의 현실은 냉혹하지만 이야기 속 인물들은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작은 빛을 따라 담담하게 한걸음 내딛는다.

tvN STORY 유튜브 〈끊임없이 다양한 인물들로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 │치유 문학의 거장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 「아르헨티나 할머니」에 나오는 인물들도 역시나 범상치 않다. 유리(나리꽃)란 산뜻한 이름과 영 어울리지 않는 이 할머니는 매부리코에 세모꼴 콧구멍, 짙게 그린 아이라인, 빨간 입술, 낡은 모직 원피스에 가짜 진주 목걸이를 걸치고 있다. 유리는 젊은 시절 남미에서 배운 탱고와 스페인어를 가르치며 살다가, 점점 삶의 의지를 잃고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

화자인 고등학생 미쓰코. 나름 화목하게 살던 가족이었는데, 수영선수였을 만큼 건강했던 엄마가 갑자기 죽는다. 전통방식으로 석공을 하던 아빠는 부인의 죽음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미쓰코. 아버지가 한없이 밉지만 그래도 찾아 나선다. 헉.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아버지는 동네 마귀할멈으로 손가락질 받는 유리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거네.
그 지지부진하고 따분했던 감정들이
모두 착각이었어.
깊은 슬픔 속에서도 매일, 신선한 발견이 있었다.

「아르헨티나 할머니」 중에서

미쓰코에겐 이유도 모른 채 버려진 슬픔도 슬픔이지만, 작은 마을이라 온 동네 웃음거리가 된 아버지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한술 더 떠서 아버지는 “떠들게 내버려 둬라.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말하며 자신의 현재 삶에 당당하다. 아버지는 고양이 털과 먼지가 뒤엉킨 지저분한 그녀의 집에서 그녀와 다정한 식사를 나누고, 탱고를 배우고, 그녀의 건물 옥상에서 자신만의 석공 만다라를 펼치며 예술혼을 불태운다. 그 정신머리 없는 쓰레기장 같은 집을 안식처이자 무대로 삼으며 이전에는 직업이란 틀에 갇혀 펼치지 못하던 자신의 삶을 펼쳐내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정신이 이상하고 괴팍해 보이는 유리. 미쓰코는 냄새나고 덥수룩한 그녀가 처음에 싫었지만 점점 그 모습 너머에 있는 작은 빛을 발견한다. 유리는 누구보다 다정하게 낯선 사람들을 편견 없이 환대하는 사람이었다. 몇십 년은 될 법한 낡은 법랑 컵뿐이지만, 누구에게든 정성으로 끓인 밀크티를 그 안에 미소와 함께 건넨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한탄하지도 않는다. 수행하듯 허리를 곧게 펴고 탱고를 추며 바른 자세와 공손한 마음으로 누구든지 대한다. 더 좋은 것, 더 나은 삶을 외부에서 갈구하지 않고 있는 그 자리를 자신만의 낙원으로 만들고 산다. 그녀는 너무나 그녀답게 출산 후 떠나갈 때도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을 남겨주고 무소의 뿔처럼 홀연히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며 삶을 마무리한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 “무아, 무상”이 있다. 무상(無常)이란 이 세상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고, 여러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무아(無我)이란 나란 존재 역시 이 세상의 일부이기에 정체를 규명할 한 가지 존재가 아닌 언제든 열려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섣불리 이 세상과 타인, 심지어 나조차도 판단할 수 없다. 간혹 ‘업’이나 ‘윤회’를 말하며 불교는 염세와 허무주의로 가득한 종교가 아니냐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단정 짓지 않는 그야말로 무한의 가능성을 지닌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영화 《아르헨티나 할머니(アルゼンチンババア)》(Arugentin Baba, 2007) 화면 갈무리
영화 《아르헨티나 할머니(アルゼンチンババア)》(Arugentin Baba, 2007) 화면 갈무리

짧은 단편소설 「아르헨티나 할머니」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지만 그 어느 책보다 강렬히 느낄 수 있었던 단어는 바로 이것들이다. 탈성장과 불교, 돌봄과 환대.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쓰레기 더미에서 연꽃처럼 모든 것을 정화한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낙오된 존재들까지도. 오늘은 연꽃이자 탱고이자 밀크티 같은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떠올리며 두유 짜이 티를 끓여야겠다. 비록 유리가 가지고 있을 법한 낡은 법랑 컵은 없지만…

[법구경]

큰길의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맑은 향기로 마음을 기쁘게 하는
연꽃이 필 수 있듯이

이와 같이 보통 사람인
눈먼 쓰레기 같은 존재들 가운데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의 제자는
지혜로 밝게 빛난다.

길게 땋은 머리와 가문,
출생으로 브라만이 되지 않는다.
내면에 진실과 법이 있어
청정한 그가 바로 브라만이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길게 땋은 머리와
염소가죽의 옷1이 무슨 소용인가?
내면이 우거진 덤불인데
너는 겉만 닦고 있구나!

-한글.빠알리.영어 대역
-한글번역: 뉴욕정명사 도신스님


  1. 부처님이 수행하던 시절, 집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여 극심한 고행을 하던 수행자들은 헝클어서 길게 땋은 머리를 하고 가죽옷을 입었다 한다. 지금 인도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은 2022년 12월 3일 무유의 브런치에 게재되었습니다.

벌똥

하고 싶은 것을 미루며 살고 싶지 않아 5평짜리 생태인문 서점 에코슬로우를 열었다. 책방에서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은 낙관적인 시선을 갖게 되었다. 산책하고, 텃밭을 가꾸고,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고, 읽고 쓰는 삶을 계속하고 싶다. 최근에 불교를 만나고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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