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 살인마에서 우물 찾아주는 이웃으로- 영화 《미나리》에 대한 소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했던 영화 《미나리》는 미국 내의 인종과 이민자간 갈등을 넘어 전형적‧전통적 ‘백인성’에 대해 재조명한다. 인종과 계급간의 충돌과 갈등이란 기존의 공식과 편견을 깨고 가난한 백인과 동양인 가족 의 따뜻한 이웃으로서의 연대를 보여준다.

미국 공포 영화의 전형적인 줄거리 중 하나는 네댓 명의 젊은이들이 여행을 가다가 차가 고장 나 낯선 시골에 머물고 이후 차례차례 살해당하는 것이다. 대체로, 일행 중 노출 심한 금발 여성 또는 철없는 남성이 제일 먼저 살해되고, 착하고 의로운 남성이 끝까지 저항하다 마지막에 죽으며, 주인공 격인 영리하고 용감한 여성은 결국 살아남아 이후 이 여성과 관련하여 2탄이 예고된다. 두 번째 공식은 살인마에 대한 것으로, 그는 한 가난한 농가에서 숨겨져 길러진, 외모나 성격에 큰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그의 가족은 한결같이 더럽고 찢어진 내복차림으로 고르지 않은 이를 보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다. 이들은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에 사는데 이 집의 냉장고에는 반드시 정체불명의 썩은 고기가 들어있고 전화기는 고장나있다. 또한 이 마을의 경찰은 십중팔구 살인자 가족과 한통속이다.

이같이 미국의 낯선 지방의 농가에 대한 괴담이 많은 것은, 그만큼 미국 땅덩어리가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나라에서 먼 길 가는데 차가 고장 나거나 연료가 떨어지는 것만큼 공포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땅이 넓은 만큼 중앙 권력이 지역 곳곳에 미치지 못하고 차 정비업체 등 시장의 서비스도 빨리 제공될 수 없다. 또한,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과 유대가 유지되고 이것이 이방인에게 배타적일 수 있다. 이 모든 게 공포의 좋은 소재이다.

그런데 같은 지방, 같은 농가라도, 넓은 농토에서 트랙터 모는 부농이 아니라, 찌들고 가난한 빈농이 살인마가 된다. 그의 가장 최신식 장비는 전기톱 정도다. 《자이언트》의 록 허드슨이 악마일 리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부농이나 카우보이조차도 이제 더 이상 미국의 자랑이 아니다. 비싼 양복 입은 월스트리트 금융인, 후드티에 청바지 입은 IT 천재가 이제 미국의 주인공이다. 더구나 가난하고 못 배운 백인 농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공포 영화의 조연 이외의 존재이유를 갖지 못했다. 그러기까지 이들의 박탈감과 절망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리고 이들이 결국 트럼프 등 극우 정치인들의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트럼프는 더 나아가 이들과 이민자들 간의 대립을 조장하여 활용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의 권력자들은 이 방법을 즐겨 써왔다. 불만에 가득 찬 흑인들의 분노가 같은 동네 마트 주인인 아시아인에게 향하도록 했으며 이들 간 갈등과 충돌을 권력 유지에 십분 활용했다. 트럼프는 이 전략을 명시적으로 노골적으로 썼을 뿐이다.

그런데 정이삭 감독은 영화 《미나리》를 통해 이 관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고 미국인들은 이 포인트를 영리하게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다소 의아스러운, 《미나리》에 대한 전세계적 찬탄은 이와 같은 메시지 때문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자고로 예술이란 공식을 깨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부르주아의 기생성, 프롤레타리아의 희생성이라는 공식을 깼고, 선과 악, 유능과 무능의 구도도 뒤집어 흔들었다. 예술이 제일 먼저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선언한다. 그리고 세계인들은 다행히 이를 알아차렸다.

《미나리》 역시 공식과 편견을 깨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 첫 번째는, 인종을 넘어선 계급 간 연대이다. 가난한 백인은 이제 전기톱 든 사이코 살인마가 아니라, 이민온 동양인 가족이 우물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따뜻한 이웃이다. 가난한 백인들의 교회는 더 이상 이단적 광신자의 모임이 아니라 헌금이 슬쩍 도난당해도 그냥 넘어가는 관용의 장소가 되었다.

두 번째 메시지는, 각자의 고유한 정체성의 유지다. 백인과 동양인이 교류한다고 하여 서로 섞이고 닮아가고 하나가 될 필요는 없다. 과장된 친절도 불필요하다. 교양 있는 ―그리고 때로는 위선적인― 백인들의 ‘정치적 올바름’을 배우지 못한 백인 꼬마는 동양인 꼬마에게 ‘얼굴이 납작하다’고 말했지만 이는 스타벅스 직원의 ‘눈찢기’ 표시와는 다르다. 각자의 다름을 신기하게 보고 표현한 것이다. 물론 동양인 꼬마는 이에 발끈했지만 또 금방 어울려 고스톱도 같이 친다.

세 번째 메시지는 오리엔탈리즘의 거부다. 자연의 개척자요 이성의 화신으로 알려진 백인은 영화에서 오히려 ‘미신성’을 보여주었고, 동양인은 과학을 신봉하며 ‘한국인은 머리를 쓴다’고 자부했다. 이들 동양인이 오히려 서부 개척자로 보인다. 이는 또한 현재 세계에서 보여지는 아시아인들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자연과 생명과 영성의 회복을 보여주고자 했다. 미나리는 특별히 돌봐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또 인간에게 유익한 식재료가 되었다. 동양인 할머니가 가져온 신비한 약은 아마도 아픈 꼬마가 기적처럼 건강이 좋아진 비법 중 하나였을 것이다. 또한 영화는 백인 농부의 방언 기도나 귀신 쫓는 행위를 비웃지 않았고 따뜻하게 바라봤다. 그간 이런 행위는 늘상 흰 두건을 둘러쓴 사이비 광신자들이 나오는 공포영화의 소재가 되어왔다.

미나리 영화의 한 ‘장면’.
미나리 영화의 한 ‘장면’.

지금 우리는 영화 《미나리》와 관련하여 윤여정 배우의 수상에만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그 전에 왜 서구인들이 이 영화에 주목했는지, 그들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봤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 영화는 전형적・전통적 ‘백인성’에 대한 변명이고 재조명이다.

또한 현재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속출하고 있는데, 아시아인들은 그들에게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능력주의 신봉자인 아시아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가난하고 게으른 유색인종을 멸시하고, 백인사회에 편입되고자 기를 쓰고 노력했을 것이다. 구한말 〈독립신문〉도 흑인을 비하했고, 용산 미군부대 부근에 살았던 필자는 어른들이 흑인 차별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는 당연히 근절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흑인에 대한 은근한 멸시도 비판받아야 한다.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더 억울했을 것이다.

헐리우드는 그간 소외된 집단이었던 흑인과 여성을 영웅으로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백인들 특히 가난한 백인 농부는 그 영웅을 빛나게 해주는 조연에 머물러왔다. 《미나리》는 그들에 대한 아시아인의 따뜻한 시선이며 이 영화에 주어진 많은 상들은 이에 대한 미국인의 감사의 표시다. 이들은 이제 전기톱을 내려놓고 수맥탐지기를 든 이웃으로 보이고 싶은 것이다.

이 글은 『대학지성 In&Out』 2021. 5. 10.자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이나미

한국의 정치이념과 정치사를 주로 연구해왔다. 정의가 구현되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해법은 무엇인지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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