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수행으로써의 명상이 말하는 인지에 대하여 – 『몸의 인지과학』 서평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러한 이유로 공이 아닌 것은 없다”라는 용수의 이론을 중심으로 불교적 수행으로써의 명상이 어떻게 기존의 인식체계와 전혀 다른 인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프란시스코 바렐라 저, 『몸의 인지과학』 표지, (김영사, 2013)
프란시스코 바렐라 저, 『몸의 인지과학』 표지, (김영사, 2013)

『몸의 인지과학』의 저자가 말하는 주제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인지과학과 인간경험의 순환이다. 필자에게는 어려운 개념이었다. 게다가 책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기 때문에 더 어렵게 다가왔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많은 이들도 그러지 않을까 하여 최대한 간결한 설명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함으로써 이 책의 서평을 대신해보고자 한다.

조금 과하게 해석하자면, 어쩌면 이 책은 인간중심주의에서 탈인간중심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을 인지과학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근대로 오면서 신중심주의에서 인간중심주의로 넘어가게 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구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며 그 당시의 문제점들을 살펴보는 데 좋은 관점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현대의 수많은 문제점들도 같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그의 유명한 경구는 고정된 기준점의 붕괴를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니체는 또한 허무주의를 근거에 대한 집착에 뿌리를 둔 것으로, 즉 아무것도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궁극적 기준점을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이해했다. (중략) 니체의 시도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영원회귀와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무근거성을 인정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차단하려고 한 것이다. 니시타니는 니체의 시도에 깊이 감복하지만, 객관론과 허무주의 양자 모두의 근원에 놓여 있는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니체의 시도는 실제로 허무주의적 난제를 반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니시타니는 허무주의는(아무리 이 개념이 탈중심화되었고 비인격화되었다 하더라도) 무근거성을 의지의 개념과 동일시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387p

여기서 허무주의는 객관화로 이어지며 객관화는 결국 한계에 부딪친다고 말한다. 인지과학의 다양한 사례들(철학, 생물학, 심리학, 컴퓨터과학-인공지능 등)을 제시하면서 주관과 객관, 절대주의와 허무주의를 다루며 독립적, 본래적, 절대적인 것들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인지해야 할까? 여기서 불교적 수행으로써의 명상이 제시된다. 명상을 함으로써 ‘공’의 개념을 알고 그것을 서양철학과 서양의 과학적 방법론에 직접적으로 대입하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이성적 인간관이 아닌 자아의 실체가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세상을 보는 관점을 인간의 이성적 ‘뇌’에서 관계적 ‘마음’으로 이동시킨다. 논의를 좀 더 진행해 보자.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공이 아닌 것은 없다”

용수

보는 자와 보이는 장면은 연결되어 있다.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장면은 존재할 수 없고 보이는 장면이 없으면 보는 자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을 인지한다는 건(그리고 그 서술은) 결국 상대적 원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절대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절대적 기준이 없으니 객관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공’의 원리이다.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그렇기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연기’라고 한다. 과감하게 논리를 진행해 나가면 결국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공이 아닌 것은 없다” by Su San Lee,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VFT8W5VfHw8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공이 아닌 것은 없다”
사진 출처 : Su San Lee

이것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로 저자는 ‘체화(體化)’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정확하게는 체화를 여러 가지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불교의 용어와 함께 한 가지 뜻에 대해 알아보자. 불교에서는 실천적 사상이라는 개념이 있다. 단순히 무언가를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앎으로써 나의 변화를 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만이 진정으로 앎의 단계(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눈을 통해 무언가를 봤을 때 단순히 ‘본다’는 것 이상의 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우리는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닌 ‘보려고 하는 것’만을 볼 뿐이다. 진정으로 보는 것은 보려고 하는 것과 반복적으로 보아 알게 되는 것뿐이다. 그리고 내가 본 대상이 그곳에 있느냐 하는 것은 인지적 측면에서 또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복잡한 관계들이 이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책에서 확인해 보자.

과학은 유래 없이 발전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버튼을 눌러 핵폭탄을 발사할 수 있고 원자력 발전소는 그보다 더 많은 나라들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사용되고 또 지어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있고 몇몇 과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우려를 표방한다.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과학의 발전을 감당하기에 무리가 있어 보인다(지구온난화와 플라스틱 쓰레기 등의 환경파괴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저자는 ‘자아 집착의 습관이 자비를 감춘다’고 말한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우리가 발맞추어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 이성의 발전이 아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영역이 아닐까?

이상

컴퓨터 프로그래머. 과학과 동물, 자연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 경계 어딘가에서 삶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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