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콜로키움 특집] 서로 연결된 우리, 함께 구성해갈 반성적 미래 – 『인류세』를 읽고

10월 21일 진행된 제8회 콜로키움에서 함께 나눈 『인류세』 발제문을 기반으로, 거기에 콜로키움 후기를 더한 글이다. 인류세는 인류의 산업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환경이 극단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지질시대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제안된다. 그 변화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은 ‘기후위기 시대’에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 파울 크뤼천에 의해 처음 명명된 ‘인류세’는 지리학, 생태학,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여러 관점으로 해석이 되고 있다. 저자인 해밀턴은 통용되는 인류세가 국지적인 생태학 측면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미디어가 주도하는 사회에서 여론주도자나 정치 지도자들이 무감각한 태도로 지구적 위기에 반응하고 있음을 비판하며 인류세에 대한 대응으로 신인간중심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클라이브 해밀턴 저, (이상북스, 2018)
클라이브 해밀턴 저, (이상북스, 2018)

신인간중심주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한계성과 오만함을 자각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이 가지지 못한 인간만이 가진 기술력과 고유함만이 결국 자연을 구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지구시스템 전체를 위험에 처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인간이기에, 그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저자는 인간이 지구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믿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인간의 변화의 의지를 포기하길 바라는 극단적 생태철학자들, 인간의 고유한 기술 능력을 펼치자는 에코모더니스트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없애려는 포스트휴머니스트들, 그리고 무관심하게 현재 체제를 옹호자들 모두 인류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는 특별히 두 개의 집단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첫째는 바로 에코모더니스트들이다. 빌게이츠나 엘론머스크 등 샌프란시스코의 두뇌 집단, 브레이크트루 인스티튜트와 이를 뒷받침하는 보수 엘리트 집단의 기술 중심주의의 오만함을 지적한다. 이들은 인간 본성의 심리적 취약함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으로 보기에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는 포스트휴머니스트들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없애려고 시도하는 도나 해러웨이, 애너 칭, 제이슨 무어 등이 있다. 저자는 포스트 휴머니스트들의 논리는 결구 과학을 통해서 증명하려 하기에 모순적이라고 말하며 이런 시도들이 환원주의라고 말한다. 이러한 반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이 초래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기에 인류세 대응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고 여긴다.

전 지구적으로 거대서사가 된 ‘인류세’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책임감 있게 행동할 원칙과 동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저자는 계속해서 철학, 문학, 사회학, 과학의 전 영역을 책 한권 내에서 방대하게 펼쳐내며 답을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 책을 어떻게 끝내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너무 어렵고 불확실하다고 말이다.

너무 어렵고 불확실한 대안

책의 말미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렇게까지 솔직할 일인가? 애써 모든 주장들을 반박하다가 갑자기 나도 모르겠다라니. 지구가 처한 현실을 하나씩 알아갈수록 회의적 관점에 가까워져버리기 쉽상이라 내심 이 책의 끝부분에 이르러 희망을 찾기 바랐는데, 모르겠다라뇨! 진정성을 가지고 파고든 학자가 미래를 불투명하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마음이 덜컥했다. 저자는 미래세대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아래와 같이 마무리를 짓는다. 지구를 지키는 것은 오직 아래로부터(대중)의 ‘집단적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단호한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사회구조 제도, 문화 같은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이다.

저자는 에코모더니스트들 만큼이나 과학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지구 행성의 미래가 인간의 의식적인 힘의 결정에 달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나약한 의지와 심리적 취약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걸 어떻게 극복해서, 인간의 선한 의지를 집결시켜, 지배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대안이 없다.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와 소수의 공룡기업이 가진 기술 독점화의 현실 앞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신인간중심주의는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 만든 기술, 진보, 문명을 고유성으로 인정하고 잘 보존하면서, 동시에 탐욕, 이기심을 절제하고, 그런 선한의지를 가진 아래서부터의 대중들의 힘을 집결시켜 인류세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는 걸까?

우리 안에 있는 촉수적인 감각을 천천히 느껴보며 되살리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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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있는 촉수적인 감각을 천천히 느껴보며 되살리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진 출처 : pxfuel

게다가 신인간중심주의라는 개념어가 없어도 이미 환경단체를 비롯한 녹색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소수라 할지라도 이미 신인간중심주의의 관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마존의 정글에서 어떤 환경운동가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자신이 가진 선한 인간성을 극대화하여 투사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마주하는 현실 앞에선 때론 미래에 대한 공포심이 몰려온다. 기술의 발달을 꾀하는 에코모더니스트들은 이제 지구가 아닌 우주로 인간의 무대를 확장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고,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현실이 일상이 되기 위한 바탕을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를 다하고 있다. 제대로 된 세금을 내지 않고 막대한 부를 쌓고, 제3세계에서 법적인 문제를 교묘히 피해가며 온갖 인적, 물적 자원을 착취하여 수명이 짧은 물건을 만들어 내고, 그 잔여물 (쓰레기)들은 고스란히 그곳에 내던져 버리고 있다. 동시에 지구와 미래세대를 위한 ‘디지털 혁명, 에너지 정의’란 키워드는 결코 빼놓는 법이 없다.

지난 10월 21일 열린 생태적지혜연구소의 콜로키움에서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란 책도 함께 다뤘다. 인류세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를 놀라게 했던 저자는 나를 다시 놀라게 했다. 그가 그토록 비판한 도나 해러웨이는 스스로를 포스트휴머니스트라고 불려지는 것을 거부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해러웨이는 “현실적 생존을 위해 사이보그를” “빨리 달려, 꽉 물어” “닥치고 훈련해”라고 외치면서 자신을 ‘퇴비주의자’로 명명한다. 대체 해밀턴은 왜 그렇게 해러웨이를 포스트휴머니스트라고 몰아붙였던 것일까?

3시간이 넘는 열띤 대화 가운데 해러웨이에 비해서 해밀턴은 참여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여러 논리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망해가는 지구를 어떻게든 구해보고자 하는 애쓰는 그의 마음이 책을 읽으며 고스란히 느껴졌기에 그가 그렇게라도 (인간의 선한 의지와 능력을 부각시켜 지구를 인간이 구하자는) 주장하고 싶었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마음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촉수적 사고를 둘러싼 논의

콜로키움 말미에 많은 참여자들은 해러웨이가 제안한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고 촉수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던졌다. 나는 모임이 끝난 후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우리는 촉수적으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도나 해러웨이라는 유명한 서구 학자가 개념을 제시하기 수 천년 전에 동양의 노자나 장자 석가모니 등은 우리가 모든 생명과 무생물과도 연결되어 있는, 연기적 존재라고 말해왔다. 무의식 안에 이미 우리는, 특히 동양인들은 촉수적으로 사고하고 있지 않을까? 근대에서 탈근대로 넘어오며 근대성에 한계를 느낀 서구 학자들이 동양의 철학과 사상을 흡수하여 자신들만의 개념어로 다시 동양인들에게 전하는 언어와 표현방식은 나에게 너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 대중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와 개념어들을 표현하는 엘리트 학자들이, 과연 대중에게 ‘응답‘ 받기를 바라는 건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무언가를 더 채우고 학습하기 이전에 이미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는 촉수적인 감각을 천천히 느껴보며 되살리는 감각을 살리는 여유를 가져 보면 어떨까. 이 글을 쓰는 시점은 11월 초이다. 예년 같았으면 벌써 두툼한 겉옷을 걸치고 다닐 정도로 추위를 많이 타는데, 얇은 겉옷으로 산책을 나선다. 어제는 다른 동네 산책을 하는데 한여름이라도 되듯 활짝 핀 길가의 장미꽃들을 보았다. 어떤 청소년들은 심지어 길에서 반팔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지구 온난화는 이제 과학적 데이터 수치에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체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나 역시 해밀턴의 솔직한 고백처럼 모르겠다 라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오늘도 자비의 마음, 연기의 마음, 내 안에 있는 모든 촉수들을 감각해 보는 마음을 품어보자며 붉은 단풍잎 아래 길고양이들에게 빌어본다.

벌똥

하고 싶은 것을 미루며 살고 싶지 않아 5평짜리 생태인문 서점 에코슬로우를 열었다. 책방에서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은 낙관적인 시선을 갖게 되었다. 산책하고, 텃밭을 가꾸고,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고, 읽고 쓰는 삶을 계속하고 싶다. 최근에 불교를 만나고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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