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7일, 서울에는 1907년 근대적인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로 117년 만에 최고치의 눈이 내렸습니다. 이틀에 걸쳐 전국적으로 내린 이번 ‘첫눈’이 올해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과 따뜻해진 가을을 지나며 미처 단풍을 들이지도 낙엽을 떨구지도 못한 나무 위에 쌓이면서 생각지 못했던 풍경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AI가 만들어 낸 풍경이었더라면 오류라고 사과했어야할 만한 이미지들이 현실에 펼쳐졌습니다. 하얀 눈이 아직 푸른 잎들에 달라붙은 모습을 가리켜 ‘풍성한 튀김옷 입힌 상추튀김 같다’며 재미있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습기를 머금어 축축하고 무거운 눈이 미처 잎을 떨구지 못한 나무를 짓누르며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한 예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수령 6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8호 ‘재동 백송’은 가지 5개가 부러지면서 1933년 천연기념물 제도가 시행된 이후 폭설로 훼손된 첫 번째 천연기념물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600년을 넘게 살아온 나무도 117년 만의 기록적 폭설에 가지를 다섯 개나 잃었을 정도이니 아직 100살도 살아보지 못한 대부분의 어린 가로수들이 생애 처음 경험한 폭설에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습니다. 여기저기 나무가 부러지고 쓰러지면서 전기와 길이 끊기고 막혀 역시 100살도 살아보지 못한 어린 우리도 많이 당황했습니다.

절기상으로 11월 22일이 소설이었으니 첫눈이 내릴 때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첫눈부터 ‘눈폭탄’이라 할 만한 기록적인 양이 내린 건 뜨거워진 서해바다 때문1이라고 합니다. 현재 서해의 해수면 온도는 14도에서 16도로 평년보다 3도 가량 높은 상태인데 북쪽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공기가 이렇게 뜨거워진 바다 위를 지나며 더 많은 수증기를 품게 되어, 눈구름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겁니다. 올여름 폭우가 내릴 때 뉴스에서 설명했던 이유와 계절만 다를 뿐 같은 이야기입니다. 뜨거워진 바다로 인해 하늘에서 이런 일이 생기는 동안 땅에서는 따뜻해진 가을로 인해 나무들이 미처 겨울 준비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은 새봄 부지런히 틔우고 한여름 정성들여 키웠던 소중한 잎들을 단 한 장도 남김 없이 떨구어버립니다. 그래서 가을나무의 미덕은 한 해 만들어 내고 소유한 모든 것을 아무런 미련도 없고 집착도 없이 깔끔히 정리하는 ‘무소유’의 실천에 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나무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훼손하는 일들이 점점 더 짧아지고 따뜻해지는 가을에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들이 아름다운 마무리 축제를 여는 단풍의 시기도, 무거운 눈을 피하고 모든 것을 얼려 동파시키는 겨울을 대비해 잎을 떨구어야 할 이별의 시기도 충분히 갖지 못하는 가을이 되어버렸습니다.
겨울을 준비하며 나무가 미련도 없이 집착도 없이 떨구어버린 낙엽은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요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는 법화경의 문장은 나무에 이르러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애초에 나무를 보고 지은 말일지 모릅니다. 나무가 키우다 떨군 낙엽은 비가 내릴 때 나무가 딛고 선 땅이 빗물의 충격으로 패이는 것을 방지하고 빗물이 헛되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나무 아래 소복히 쌓여 추운 겨울 맨땅을 덮어주는 포근한 이불이 되어주는 낙엽은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서서히 썩어가 스스로 훌륭한 비료가 되어 나무의 뿌리를 통해 다시 나무에게 돌아갑니다. 겨울을 이겨낸 나무는 새봄을 맞아 다시 잎과 꽃을 내고 여름에 잎과 열매를 키우며 가을에 낙엽과 열매를 떨굽니다. 낙엽은 나무 자신뿐만 아니라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지렁이도 키우고 나무와 공생하는 버섯도 키우고 나무를 둘러싼 여러 생명, 나무의 생태계 전체를 풍성하게 하는 먹이가 되고 퇴비가 되고 마침내 모든 생명을 품는 흙이 되어 새로운 계절에 새로운 생명으로 순환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낙엽은 폐기물관리법 상 ‘쓰레기‘입니다.2 가로수로 하여금 빗물을 머금고 숨쉬게 할 만한 땅 한 평도 허락하지 않는 도시에서, 살아있는 나무도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잘라 베어버리는 도시에서 우리는 매년 떨어지는 낙엽에 관심을 가질 여지가 없습니다. 도시에 떨어진 낙엽은 길을 미끄럽게 만들고, 배수로를 막으며,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을 모아 태워버립니다.3 이것저것 뒤범벅한 쓰레기와 화석연료를 태워가며 뜨거운 바다와 뜨거운 여름과 뜨거운 가을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우리는 나무로부터 겨울을 준비하며 낙엽을 떨궈야 할 시간도 빼앗고, 새봄을 맞아 다시 나무로 돌아가 생명의 순환을 이어갈 낙엽들도 빼앗아버리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나무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을 스스로 빼앗는 날을 맞이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을 앞두고 낙엽을 떨구고 있는 나무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응원의 말 한마디 건네면 좋겠습니다. “어제 푸른 잎들이 오늘 물들어 떨어지더라도 내일 다시 푸르른 잎으로 나겠지. 우리도 맑고 깨끗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오늘부터 노력할게.”
「폐기물관리법 시행규칙」별표 4에 따라 낙엽은 ‘그 밖의 식물성 잔재물’로 분류된다. ↩
일부 지자체에서 낙엽퇴비 사업 등 낙엽 재활용 방안을 진행하고 있으나 담배꽁초 같은 도시 쓰레기들과 섞여 오염된 낙엽을 분리 수거하기 쉽지 않아 인력난, 비용 등 여러 이유로 일반 생활 폐기물처럼 소각하거나 매립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경기도의 경우 2023년 기준 낙엽폐기물의 총 수거량은 9,564톤에 달하며 이 중 70.7%가 소각처리되었다. (경기도의회 보도자료, “최승용 의원, 낙엽폐기물 재활용 시스템 구축방안‘ 용역 최종보고회 참석”, 2024.10.25. ↩
원래 있었던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세상을 기대해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선순환 해야할 자연의 생명사이클을 인간이 훼손하고 있다는 것에 지구인의 한사람으로 깊이 반성합니다. 좋은 글 읽고 다회용품 사용을 생활화 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숲에가면 천천히 조금씩 가볍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운다는 사람에게서 느낄수 있는 좋은 글입니다 자주 글 올려주시면 읽고 함께 공감하고 생각해보는 어른이고 싶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기후위기와 숲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법화경의 문구도 가슴에 와닿네요.
잔잔한, 그러나 깊은 울림이 있는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식물이 사라지면 동물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이치를 호모 사피엔스만 모르나 봅니다.
마지막 응원의 한마디가 무척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떨어진 낙엽도 밟고 싶고 충분히 가을이 가는 것을 느끼고 싶은데.. 직무에 충실히 하시는 건지 너무 빨리 다들 떨어진 나뭇잎을 치우셔서..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낙엽은 나무의 재산이니 나무에게 돌려주자” ^^